높이 나는 황새가 그렇게 근사해보일 수가 없었다. 내 어린 시절, 안경 너머 속 세상엔 늘 높이 나는 황새들만 가득해보였다. 날 때부터 황새로 태어난 그들이 부러웠고 그렇기에 늘 동경해마지 않았다. 마치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마냥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그저 사람들과 적당히 어울려가며 성실하게 사는 것, 뱁새라는 나의 정체성을 일찍이 알았던 덕에 그들과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명확한 선을 그은 채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부대끼며 살았다. 제법 눈치는 있는 편이라 별다른 큰 문제는 없었다. 체념, 혹은 달관. 뭐라 부르던 사실 삶을 대하는 썩 좋은 태도는 아니었다.
뭐든 적당히 하고자 했다. 열심히 할 필요 뭐가 있나. 그런다고 황새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닐텐데, 어떤 큰 부귀영화 바란다고. 그렇다고 너무 티나게 그러진 말고. 적당히 말이야. 끈기가 없다고 일장연설하는 웃어른이나 열심히 좀 해보라는 친구 녀석의 말은 늘 따라다녔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대관절 무엇을 위해서. 그 질문에 답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내 주위엔 없었다. 열심히 해봐야 뱁새일 것을 말이야. 적어도 구질구질해 보이진 말아야지, 구질구질한 뱁새는 정말 최악이니까. 변명으로 일관하는 뱁새보다는 차라리 구질구질한 뱁새가 더 나은 줄 지금은 알지만, 그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티내진 않았지만 나름 그 이유를 찾아보려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을 하건 열심히 해야 할 아무런 이유를 여전히 찾지 못했었다. 다행인 건, 그 이유를 계속해서 찾으려 노력해왔다는 것. 서른 해를 지나고도 다섯 해를 더 보내고서야 가까스로 그 답에 근접할 수 있었다. 이유는 허무하리만치 간단했다. 열과 성을 쏟을만한 ‘가치’있는 일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 쉽게 말하자면 단지 재미가 없었던 것이었을 뿐이었다.
내게 가치 있는 일은 대관절 뭘까. 재미있는 일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마음 속 어떤 충동이 일렁일 때마다 ‘남들 다 그러고 산다’는 말이, ‘배 부른 소리’라는 시덥잖은 말들에 번번이 가로막혔다. 그 당시 내게 오기와 용기 조금 있었다면 모를까, 재미를 찾기 위한 여정 대신 난 그들의 말에 수긍하고 인정하는 편을 택했다. 그들 말대로 적어도 내 주위 사람들은 모두 대동소이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시절 내가 동경했던 황새들도 별반 다를 것 없는 삶을 사는 듯 보였다. 결국 그들 말마따나, 다 그러고 살고 있었다. 수긍은 했으되, 그러나 그들이 더이상 근사해보이지는 않았다.
어떤 굉장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단지, 체념하듯 현실에 수긍하는 그들이, 또 그래야 높이 난다며 내게 조언하는 그들이 되려 측은해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였을까, 높이 나는 것에도 난 관심이 없어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 대수롭지 않아보였다. 알고보니 난 고소공포증이 있었으니, 애시당초 몸에 맞지도 않는 옷을 입으려 한 셈 아니었을까. 결국 내가 그토록 찾던 재미는 높이 나는 데에 있지 않았던 셈이었다. 반대로 그 단순한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순간부터 나만의 여정은 시작됐다. 어디에 있을까, 어디서 발견할 수 있을까. 궁금한 게 늘 많았던 반면 방향치였던 탓에 길은 늘 헤매기 일쑤였다. 다만 헤매인 길에서도 늘 두리번 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오매불망 감격적인 상봉을 늘 꿈꿨다.
그러나 몇 해 전 결국 발견하게 된 그 재미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 헤매던 그 길 위에 있었다. 재미를 찾아 헤매던 시간들이 나에게 좋은 글감이자 ‘쓸 수 있는 힘’이 되었으니 말이다. 짧은 다리 탓에 높이 날 생각을 애당초 접었던 덕분에 이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우연찮게 조우한 ‘쓰는 삶’은 그렇게 나의 ‘재미’이자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 혼자였더라면 몇 해를 더 헤매야 했을 그 길이었건만 나와 같은 사람들 덕분에 그나마 지름길로 내달릴 수 있었다. 지나고나니 그 덕분이었다고밖에. 지난 모든 시간들에 감사하게 된다.
이제는 때론 황새가 볼품없고 초라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 잔뜩 힘 준 자태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수고스러울까. 다른 사람 시선과 평가 얼마나 의식하며 살까. 나는 이제 그들이 부럽지 않다. 부디 높이 훨훨 날기를. 난 관심 없는 그 세계, 마음껏 호령하길. 그 높이에선 도무지 보이지 않는 이 세계는 내가 대신 즐기겠노라며.
옛 속담에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가 찢어진다.’고 했다. 그 가랑이 찢어진 뱁새는 어찌 되었을까. 황새를 동경했던 예전과 달리 이제 난 모로가도 해피엔딩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하물며 이젠 욱신거리는 가랑이마저도 난 글감으로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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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
뭔가 읽으면서 예전에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님이, 작가들은 성공하지 않은 여행을 했을 때도 글로 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는(?) 말이 생각이 나네요 ㅎㅎㅎ 누군가의 인정을 바라고 쓴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글을 쓰게 되는 순간 저도 모르게 다른이의 시선과 평가를 의식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제 그것이 부럽지 않다고 말하는 에디님이 멋지고 부럽네요 :)
월간 사생활
조이님도 조이님만의 여정을 즐기시길 바라며, 앞으로 조이 님만의 고유한 글쓰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칭찬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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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
욱신거리는 가랑이마저도 글로 쓰겠다는게 마음에 드는 문장이에요🤣 에디님 글은 잔잔하게 단단해서 늘 좋아합니다! 앞으로의 글도 기대하고 응원하겠습니다!
월간 사생활
잔잔하게 단단하다는 표현이 제 마음에 쏙 듭니다. 저 역시 서영 님의 글 계속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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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영
최근에 황새의 세계와 부딪힐 일들이 생겨서.. 작가님 글이 유독 와닿네요. 그 높이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도 충분히 아름답고 행복한데 말이죠. 동류를 만나 지름길로 들어섰다는 사실이 부럽습니다. 제 주변엔 저더러 황새가 돼라고 이죽대는 사람들이 대다수라 ㅜㅜ 앞으로도 잔잔하면서 진정성 넘치는 글 기대하겠습니다.
월간 사생활
모두가 황새일 필요는 없잖아요. 말씀하신대로 지금 높이에서만 누릴 수 있는 풍경과 아름다움을 간과하지 않으시길 바라며, 이죽대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서영 님이 되시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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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개인적으로 작가님의 여정이 제게 많은 귀감이되어요. 매번 두리번거리고 헤메이면서도 결국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것. 그러면서 발견하신것들, 작가님께서 쓰는 삶과, 함께 여정을 가는 사람들을 대함이 너무 소중한게 느껴져요. 너무 좋은 영향받았습니다. 앞으로도 작가님만의 여정을 유유히 즐기시며 걸어나가시길 바라요🙂🌸
월간 사생활
고래 님 역시 유유히, 그리고 성실히 자기만의 길을 가시길 응원할게요. 글을 통해 느낀 고래 님은 이미 그 길을 가시고 계신 중인 것 같아 별다른 조언이 필요 없을 것 같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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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A
비유가 정말 와닿는 글이었어요..! 처음부터 내가 가야할 길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듯이 결국엔 내가 가고싶은 길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늦게나마 마주한 쓰는 삶에 그간 모든 경험이 좋은 글감이 되어 참 다행이네요 :-) 그런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저또한 뱁새이면서 황새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요..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내가 가진 소중한 것을 빛내보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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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
높이 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높이 날기를 포기하지 못하던 미련한 날들이 있었어요. 제대로 포기하는 것은 간단한 것 같아도 실은 큰 용기와 깨달음이 필요했고요. 그렇지만 이제는 포기함으로 얻는 새로운 것들에 기뻐할 수 있게 되었어요. 마침 이런 생각을 하는 시절이었는데 에디님의 글을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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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트루
행복한 날만 너의 인생이 아니고 슬픈 날도 너의 인생이듯, 모든 날이 눈부시고 모든 글이 가치있다고 생각한지 꽤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가끔 타인의 글을 보며 제 글을 되씹어보곤 했는데 한 가지 확실한건 저는 제 글이 좋고 제가 글 쓰는 맛에 살아보려 합니다 ㅎㅎ 에디님의 글을 읽고 더욱더 확신하게 되네요. 글을 쓰는 이유와 가치를요. 힘내서 더욱 써보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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