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칠월은 어떻게 보냈니?
나는..(이렇게 쓰고 한동안 뒷문장을 쓰지 못했어)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느라 조금 고생스러웠던 것 같아. 학생이고, 사무직이라 하루 거의 대부분 에어컨이 있는 실내에서 생활하는데도 정신을 차리기가 참 어려웠어. 바깥을 걸을 때면 들숨으로 느껴지는 묵직하고 뜨거운 공기가 늘 낯설었고 말이야. 내가 알던 여름이 아니라 새롭게 겪어보는 어떤 계절 같았어.
그런 시간들이 흐르고 흘러 팔월이 되었네, 하지만 마찬가지로 덥다고 하니 아무래도 정신을 원하는 만큼 또렷히 두고 지내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날씨 덕을 보기는 어려운 날들이지만, 팔월도 우리 모두 안녕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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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는 더운 날씨에 PMS(월경 전 증후군)가 더해져 꾸벅꾸벅 갓 태어난 동물처럼 지하철에서, 책상에서 졸면서 지냈어. 사실 편지를 쓰는 지금도 눈이 반쯤 감겨 있어. (웃음) 어제 늦게 자고, 숙취 영향도 있는 것 같네.
(결국 한시간 낮잠 자고 돌아왔어)
나는 한달에 한번 정도 술을 마시는데 그게 어제였어. 원래 친구들 중에 술을 즐기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최근에 친해진 동생이 술을 좋아해서 달에 한번 꼴로 같이 술을 마시고 있어. 1차에서는 고소하고 기름진 생선구이가, 2차에서는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던 어묵탕이 안주였어.
집에 돌아와서는 후딱 씻고, 취해있을 것을 예상하고 나오기 전에 치워둔 방 침대에 안기듯 누웠어. 그리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놀이기구를 탄 느낌을 조금 느끼다 잠에 빠져들었어.
어제의 수면은 참 요란했어. 자세가 불편했는지 가위에 눌리는 듯한 느낌을 두차례 정도 받았고(악을 쓰며 가위를 풀려고 했던 기억이 있어), 룸메 언니 방이 멋진 정원이 되는 꿈을 꾸었고(미음자 모양 정원이었는데 비 오는 처마 아래 고즈넉하게 뻗은 채도 낮은 소나무가 정말 멋있었어), 누군가를 버스 정류장에 데려다주는 조금 슬픈 꿈도 꾸었어.
그리고 잠에서 깼어. 어제 그렇게 많은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머리가 어지러웠어. 그러니 갑자기 짜증이 나기 시작하더라고, 속으로 나 자신과 아래와 같은 대화를 주고 받았어.
'그니까 왜 술을 그렇게 마셨어'
'너 별로 안 마셨어, 그리고 원해서 마신 거잖아'
'알아! 근데 짜증나! 머리 아프잖아!'
'감수해야지...바보야...'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 게 내 기분이 나아지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일어나 세수를 하고, 신중히 고른 메뉴를 주문했어. 밥을 먹고 나니 기운은 좀 났는데 기분이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울해지기 시작했어.
PMS의 영향도 있고, 흐린 날씨 탓도 있겠지만, 어제 대화를 하면서 무언가 건드려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근데 술 기운이 올라와 있기도 했고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서 뭐가 건드려졌는지는 알 수가 없었어. 도대체 이 복합적인 이유로 가라앉은 기분을 어떻게 풀어줘야 하지? 곤란해져서 내게 물었어.
'어떻게 하면 네 기분이 나아질까?'
'울고 싶어'
그래서 유튜브에 '울고 싶을 때'라고 검색하고 영상들을 보았어. 드라마 장면을 모아둔 영상도 있었고, 노래 영상도 있었는데 '뭐야 전혀 안 슬픈데..' 하던 것도 잠시, 정신을 차려보니 엄마 아빠를 부르며 울고 있었어. 그렇게 잠깐 울고 나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아 맞다, 오늘 무결레터 마감날이네' 였어.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게 반가웠고, 편지를 쓰면 내 마음이 조금 더 나아지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점차 더 기분이 괜찮아졌어.
샤워도 하고, 손톱도 자르고, 편지도 쓰고 낮잠도 자고 했더니 지금 기분은 예상했던 것처럼 평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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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너는 네 마음을 어떻게 나아지게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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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나절 동안의 우당탕탕 기분 회복 이야기가 너에게 어떻게 읽혔을지 모르겠네. (웃음)
더불어 너에게 알려주고 싶은 감정조절 팁이 있어.
감정이 요동칠 때는 아래 두 가지를 떠올리면 좋아.
하나, 나는 감정이 아니다. 감정은 지나가는 날씨 같은 것. 나는 하늘이다. 또는 이렇게 생각해도 좋다. 감정은 내가 운영하는 호텔의 투숙객 같은 것. 반갑지 않은 손님(슬픔, 절망감, 수치심 등)이 찾아오더라도 반드시 체크아웃할 것이니 그저 잘 쉬다 가라고 하면 된다.
둘, 나를 구할 수 있는 건 다름아닌 나, 그리고 시간이 그것을 도울 거다. 오랜 시간이 걸려도 괜찮으니 할 수 있는 만큼, 하고싶은 만큼 나를 구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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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지는 아마 '결, 구월이야!'라고 시작하지 않을까 싶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다가오고 있어. 여름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특히 더 가을이 정말 많이 반가울 것 같아. (웃음)
만약 지금이 가을이었다면, 나는 내 기분을 나아지게 하기 위해 무작정 바깥을 걸었을 것 같아. 어서 걷기 좋은 계절이 와주었으면.
그럼 결, 팔월 건강히 보내고.
우리는 구월에 또 안부 나누자:)
2025.08.03. 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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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지의 답장을 나눌게, '상담을 받게 된다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물었었어.
만두가 된 것 같다니..풋 웃음이 나면서 만두가 먹고 싶네. 스팀에 만두를 찌는 것처럼 그만큼 습하고 덥다는 이야기를 한 것 맞지? 그런데 답장을 쓰고 있는 오늘은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고 여기 저기 홍수 경보가 발령되고 종일 안전 문자가 날아오고 있어. 비가 많이 내려도 너무 더워도 바람이 많이 불어도 건조해도 그리고 너무 추워도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하니 사시사철 불안 불안하다. 아니 사실 이러한 변화에 익숙해져 있으니 계절의 변화가 없는 곳에서 살아야 한다면 단조로움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어떤 동화를 좋아 했더라 생각해 보아도 퍼뜩 떠오르는 것이 없네. 나는 호 불호의 경계가 모호한 셩격인 것 같아. 너무 좋은 것도 없고 너무 싫은 것도 없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24시간을 민경이는 꽉 채우면서 요즈음을 보낸다니 전문 지식 없는 나도 얼핏 그건 아닌데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전문가이신 상담 선생님께서 잘 짚어주셨네. '공부만하고 놀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는 서양 속담이 생각나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것이니까 화이팅!
안 그래도 요즈음 나도 상담을 받아 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많이 해. 내가 고질적인 위장병이 있는데 약으로는 해결이 안 될 것 같고 마음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최근에 하게 되었어. 건강 검진을 받기 전후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서 검진 자체가 나에게 병인이 되는 것 같아. 그렇다고 검진을 안 받을 수도 없고 그래서 알 수 없는 검진 결과를 기다리는 불안감을 어떻게 제어해야 하는지를 상담 받고 싶어. 나도 이성적으로는 잘 알고 있지.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면서 여기 저기 고장이 날 수 밖에 없고 나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 그리고 상황에 맞추어 약을 복용하든지 운동을 하든, 식이 요법을 하든 해결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감성을 제어할 수가 없으니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 싶어. 동네마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병원이 있지만 상담을 어디서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막막해서 생각만 계속하고 있어.
요즈음 텃밭 농사를 짓고 있는데 (농사라기엔 작물이 허접하지. 고추 몇 포기, 가지 2포기, 오이 3포기, 정도) 자라난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는 공간이야. 말로는 정말 설명할 수가 없네. 좌우지간 죽을뚱 살뚱 마구마구 자라. 특히 잡초의 생존력은 놀라워서 혀를 내두를 지경이야. 비록 신체는 노화의 길을 걷고 있지만 마음은 무르익어가는 계절처럼 콩나무처럼 쑥쑥 자라 볼 생각이야.(하하 긍정모드, 이정도면 상담이 필요없을라나)
쑥쑥자라나고 있는 민경이의 편지를 내달에도 기다릴께! 안녕!From. 심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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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
음주 뒤에 겪는 숙취 과정이 적나라 하네요. 어느 날인가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괴로웠음.
무결레터
너무 생생했나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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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
꿀팁 고마워요. 반 드 시 체크아웃 하겠죠?
무결레터
그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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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
감정은 지나가는 날씨같은것!! 나한테 꼭 필요한 말이야
무결레터
필요한 말이었다니 뿌듯하네ㅎㅎ관련 내용이 더 궁금하면 '마음챙김'이나 'ACT치료'의 '탈융합' 개념을 찾아보면 좋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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