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구월이 벌써 끝났다니 믿기지 않아.
팔월 중순부터 구월이, 그러니까 대학원 생활 4학차가 두려웠어.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내가 그걸 다 해낼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지.
그래서 엑셀 하나를 만들었어. 세로축에는 날짜를, 가로축에는 신경 써야 할 일들을 나란히 적어 보았지. 그랬더니 마음이 좀 안정되었어. 뭉개서 보았을 땐 이번 가을, 겨울에 해내야 할 일들이 너무 버겁기만 했는데 엑셀표에 정리된 날들은 조금 귀여워서, 하루하루 이렇게 조금씩 그날의 과업을 해내며 살면 되겠구나 싶었어.

그리고 하나 다짐했던 건, 집으로 돌아와서는 일이나 공부를 하지 않겠다는 것.
집을 온전히 쉼의 공간으로, 나를 돌보는 장소로 삼았던 게 구월을 잘 보내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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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평화롭게 흘러갔던 것 같은데, 종종 자극을 느끼기도 했던 구월이었어.
오늘은 구월에 상처 받았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해.
다친 부위는 그것이 피를 보는 것 등 심각한 상처가 아닌 이상 다음날 더 아프다는 거 혹시 아니? 지난 목요일에는 길을 걷다가 털썩 넘어졌었는데, 금요일에야 정확히 어떤 부위가 땅에 부딪혔는지 알 수 있었어. 마음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어떤 말은, 들은 직후가 아닌 다음 날 더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하더라.
그날, 사람들이랑 밥을 먹던 중이었어. 그런데 한 사람이 내게 대뜸 공격적인 말을 했어. 내가 자신에게 폭력적인 것 같다며, 같이 밥을 먹던 다른 사람들이 잠시 빠져주어 둘이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어. 당황스럽고 기분이 나빴지만 최대한 감정을 빼고 차분하게 그 사람에게 말했어.
'나도 왜 너를 그렇게 대하는지 생각해보았었다고' 그리고 내가 생각한 이유를 말해주었는데 그 사람은 듣지 않았어. 그리고 내 탓을 했지. 더 화가 났지만 조용히 말을 이어나갔어. '그렇게 느낄 수도 있는데 이렇게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폭력적이라는 그런 말을 하는 건 내게 타격이 좀 있다고' 그 사람은 그 말도 받지 않고 또 다시 비협조적인 말을 했지. 그렇게 대화가 끝났어. 그리고 4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였나? 그 사람에게 사과 문자가 와서 사건이 일단락되었어. 그렇게 잘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눈을 떴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어. 뭔가 잘못된 것 같았어. 내가 미웠어. 그래서 자비명상을 잠깐 틀어놓고 들었는데 별로 효과가 없어서 영상을 끄고, 나에게 말을 걸어보았어. 무슨 일이냐고.
슬펐던 이유를 들여다보니 외부 자극보다도, 그 자극으로부터 나를 적극적으로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어. '나도 공격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화 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를 방치한 건가?' 이런 생각들.
그런 생각들은 나를 불안하게 했어. 내가 나를 잘 지키지 못해서 나를 오래 버려두었던 날들이 내게 있었거든. 그리고 그게 나에게 너무 큰 상처였었거든. 내가 여전히 그런 것 같아서 너무 슬펐던 거야.
그런데 나랑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날 그 장면에서 내가 나를 최선을 다해 지켜냈다는 걸 알게 되었어. 정말 애써서 나를 지켰더라고. 그걸 알게 되니 마음이 좋아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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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 전에 유행했던... 뭔가 이 편지에 그 단어들을 적으려니 살짝 망설여 지기도 하는데 (웃음) 그래도 그냥 적어볼게.
에겐, 테토라고 아니? 에겐은 에스트로겐(여성호르몬), 테토는 테스토스테론(남성호르몬)을 뜻해. 각각 여성스러운, 남성스러운 정도를 나타내지.
난 내가 테토녀(남성스러운 여성)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어. 옷도 중성적으로 입고 키도 크고, 자기 주장도 하는 편이고, 익살스러운 면도 있으니까.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를 에겐녀(여성스러운 여성)라고 하더라고, 그게 조금 충격적이었고 뭔가 달갑지 않았어. 특히 나를 오래 보아온 룸메 언니(11년지기)는 '테토라고 느낄만한 게 하나도 없는 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게 너무 웃기다'라고 했어. (웃음)
그 말들을 듣고 혼자 생각해보니 주변 사람들의 말이 맞는 것 같았어. 물론 이분법으로 나눌 수는 없겠지만, 그들이 말하는 에겐녀 같은 모습들(세심하고, 따듯하고, 감정이 풍부하고, 조심스럽고)이 나를 더 잘 설명하는 것 같아. 근데 나는 왜 몰랐을까?
사실 몰랐다기 보다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게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아. 왜 좋지 않았냐면, 너무 약한 것 같아서. 약하면 힘드니까. 쉽게 상처받고 울게 되니까.
앞서 말했던 일을 겪고 다음 날 슬펐던 것도 내 안의 취약한 나를 마주해 버려서인 것 같아. 그 애를 데리고 살려니 참 힘이 들어져서. 그 애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러면 애초에 그런 말에 동요하지 않거나 바로 화를 내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었나 봐.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지. 그 애와 함께 살아온 삶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 애는 어떤 장면에선 나를 강하게 만들어주기도 해. 그리고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도록 해주었고, 깊은 마음을 나눌 수 있게 도와주었어. 그래서 나는 그 애도, 그 애와 함께한 이 삶도 사랑해.
대학생 때 가장 좋아했던 교수님이 해주셨던 말이 있어. '좋기만 한 일도, 나쁘기만 한 일도 없다고' 이 말 앞에서는 늘 숙연하고 초연해져. 내가 지금 가진 것을 제대로 바라보고, 품을 수 있게 해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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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너에게도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것이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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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조금 습하지만, 가을이라는 게 느껴져.
환절기에는 늘 새로운 마음이 돼.
특히 나는 가을을 좋아해서 선선한 아침 공기를 처음 느낀 구월의 어느 날 참 기뻤던 것 같아.
맑고 선선한 날씨 속에서 평범하고 안녕한 하루들을 보내길 바라.
다음 달에 또 편지할게, 안녕!
2025.10.06. 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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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지의 답장을 나눌게, 출발점과 도착점 또는 그 사이 어디에 서있는지 물었었어.
민경아 잘 지내고 있니? 구월이다. 벌써 셋째 주에 접어드는 구월인데..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어야 하지 않나?? 내일 모레 결혼식 하객 룩을 고르고 있는데 아무래도 한여름 옷을 입고 가야 할 것 같아. 너무 덥고 습해서 옷 소재도 마 계통의 통풍이 좋은 옷을 입어야 할 것 같아. 우리가 망쳐 놓은 지구의, 계절이 뒤죽박죽인 것 같다. '앗!' '우리'라고 뭉뚱구려 말하지 말아야겠네. 환경을 지키기 위해 애 쓰시는 분들도 많으니까,
네 편지는 잘 읽어보았어. 독해력이 떨어지고 있는 나에겐, 다소 논문 같은 장문의 편지였지만 정성 들여 꼼꼼히 읽었어. 그리고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왜 남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게 좋을까? 나는 남의 마음 들여다보는 것을 싫어해서 에세이 읽는 것을 정말 싫어했거든. 물론 지금은 (정확히는 올해 여름을 거치면서) 조금씩 남의 마음을 궁금해 하기 시작하고 있어. 갑자기 독서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거든. 그러니까 나는 지금 출발점에 서 있어. 죽기 전에 한 천 권 정도는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오늘 아침에 읽은 책의 저자는 과학자인데 나무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아. 아직 초반을 읽고 있어서 전체적인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아주 인상 깊은 대목을 읽었어. '모든 시작은 기다림의 끝이다' '모든 우거진 나무의 시작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씨앗이었다.' 아주 흥미로운 씨앗 이야기였어. 그래서 생각해 보았지. 지금 민경이의 꿈은 몇 년을 기다려온 씨앗일까? 인터뷰 놀이 때 부터였을까? 아니면 그보다 훨씬 전 이었을까? 아니면 민경이의 엄마의 꿈이었을까? 책을 읽기 시작하니까 상상력이 풍부해지는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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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이 쓰고 나서 일주일이 지났는데 완연한 가을이 되었어. 귀뚜라미 소리가 깊어지고 바람이 선선하여 저녁이면 창문을 닫고 잠을 잔다. 간밤의 콘서트에서 피아니스트의 협연을 들으면서 생각해 보았어. 저 피아노 주자는 언제부터 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을까? 피아노 치는 일이 정말 좋을까? 피아노를 칠 때 기쁘고 행복할까? 나는 어떤 일을 할 때 기뻤던가? 다시 위에서 언급했던 책 이야기(랩걸 Lab Girl)로 돌아가자면, 이제 중후반 부분을 읽고 있는데 ‘이렇게 까지’ 싶을 정도로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더라. 실험실을 꾸미고 연구에 쏟아붓는 정성에 온 몸과 영혼을 털리면서도 ‘나무’를 알아가는 일을 멈추지 않더라.
나는 여전히 모르겠어. 내가 꿈을 꾼 적이 있었던지, 무슨 일을 할 때 기쁘고 행복했었는지, 내가 닮고 싶고 담고 싶은 일이 있기나 했었는지. 다행스럽게도 책을 읽기 시작했으니 차츰 알아가게 되지 않을까 막연하게 기대해 본다.
다가오는 추석 명절을 가족과 친구와 누리길 바란다.From.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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