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늦여름 더위가 기승이야.
그래도 언젠가의 귀갓길에는 산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밤바람을 맞기도 했어.
그 바람이 너무 좋아서 하마터면 그 밤에 산을 오를 뻔 했어. (웃음)
오늘 아침 출근길에는 편의점에 들렸어.
즐겨먹는 계란말이 김밥이랑 고소한 곡물 두유, 그리고 폭신하면서도 쫀득한 식감을 가진 옥수수빵을 골랐지.
보통 아침을 거르고 점심을 바로 먹는 편인데, 오늘은 뭘 먹지 않고서는 업무를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땡기는 것들을 양껏 사서 출근했어.
요즘은 좀 잔잔하고 울적한 것 같아.
고요하고 여유로웠던 여름방학이 끝나서 그런 걸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보다는 더 큰 끝을 앞두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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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 들어가야 겠다고 결심했던 건 2023년 봄이었어.
2018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취업을 했지만, 진로 탐색과 고민..이라고 쓰고 방황이라고 읽는 시간을 4년 정도 지냈던 것 같아. 그 시간 동안 회사에 다니면서 글도 써보고, 독립출판도 해보고, 데이터 마케팅도 기웃거려 보고 꽃도 만져보면서 여러 길을 탐색했었지.
그러다 덜컥, '상담'에 걸려버린 거야.
그 시작의 마음은 어땠나? 궁금해져서
약 2년 전,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썼던 글을 다시 읽어보았어.
독립출판을 홍보했던 인스타 계정에 썼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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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0.
안녕 여러분, 민경입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나요?
긴 시간을 건너 안부를 여쭈어요.
저는 그간 대학원 입시를 준비했어요. 그리고 얼마 전 합격 소식을 들어서, 내년에 서른을 맞아 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답니다👀✨️
서른이라는 나이도, 대학원 입학도 아직 실감이 안 나요. 그래서 가족과 친구들이 축하의 말을 건넬 때 멀뚱하고 어색하게 웃어 보이게 된답니다. 아직 스스로에게 축하한다는 말도 해주지 못했고요.
그래서 이 자리를 빌려, 저에게 축하의 말을 전하려고 해요.
-너를 지켜줄 일을 발견하고, 첫발을 디딘 걸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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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넷 졸업 후 처음 가진 직업은 실용서를 만드는 일이었어요. 어렵지 않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일부를 꾸며내야 하고, 지향하는 성장의 방향과 어긋난다는 점은 불만족스러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죠.
하루는 ‘나를 닮은 일’이라는 책 제목을 보게 되었어요. 그 책이 궁금했지만, 한편으로는 펼쳐보기 두려웠어요.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나를 닮은 것. 그리고 그 일과 내가 닮아가는 것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그때부터 저는 저의 일과 닮아가지 않기 위해, 수단으로만 삼기 위해, 동시에 닮아가고 싶고, 나를 담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 분투했어요.
어떤 일은 닮고 싶었지만, 그 일에 담을 제가 없었고, 어떤 일은 저를 담을 수 있었지만, 그 일을 닮고 싶지 않았어요. 해오던 일의 단점은 커져만 가고, 그 일로부터 저를 지키는 데 품이 점점 더 들어갔어요.
그러다 우연히 참가한 집단 상담, 그리고 이후 추수 상담을 받으며 저는 제가 닮아가고 싶고, 저를 담고 싶은 일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저는 상담심리 전공으로 대학원에 입학할 예정이에요.
이전 직업에 대해 가장 큰 불만을 말해보자면, ‘이게 진짜 필요한 일인가?’하는 회의감이었어요. 그래서 다음 직업을 택할 때는 세상에 꼭 필요한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요. 집단 상담과 이후 개인 상담을 받으며, 이제껏 힘겹게, 그러나 어떤 이유가 있어 유지해왔던 죄책감과 수치심을 놓아줄 수 있게 되면서, 기능(다른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이 좋아지는 저의 모습을 보면서 상담의 필요성을 믿게 되었어요. 상담을 받은 후로 저는, 고여 썩어가던 마음의 에너지가 풀리면서 더 잘 사랑하고, 공부하고, 나로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그래. 이 직업이 누군가에게 꼭 필요하다는 건 체감했어. 그런데 너가 그 일을 할 수 있어?’ 상담에 매력을 느끼고, 준비를 시작한 후에도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했어요. 상담 이론 공부가 재밌다고, 논문 읽는 게 어렵지 않다고, 상담사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다가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이 일을 제가 할 수 있겠다고 작게 확신한 순간이 있었답니다.
자기소개서에 인터뷰 놀이와 <만나는 사람> 이야기를 적었어요. <무결레터>도 소개했고요. 그 이야기를 적기 위해 저의 삶을 돌아보았어요. 스무 살, 그리고 그 이전부터 이어진 저의 어떤 맥락. 사람을 궁금해하고 다가서려는 일련의 행동들을 보면서 저는 이 직업에 담을만한 제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이러나 저러나 저는 사람 마음이 가장 재미있고, 그 마음을 들여다볼 때 가장 깊이 몰입하게 된답니다. 앞으로 매일 하게 될 일이 그 일이라는 게 신나고 기대되어요. 하지만 소진도 될 테고, 누군가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도움을 주어야 하는 책임도 가볍지는 않겠죠. 하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이 일이 저를 지켜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닮고 싶고, 저를 담고 싶은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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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아마 인터뷰 놀이, 만나는 사람, 무결레터가 없었더라면 저는 이 일을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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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글을 다시 읽어보니 첫 마음은 참 귀하다는 생각이 들어.
여러 일에 치여서, 여유를 잃어서 많이 지쳤었는데, 그때의 내가 쓴 글. 특히 사람 마음이 가장 재밌고 그것을 들여다 볼 때 가장 깊이 몰입하게 된다는 그 말이 지금의 나에게 힘이 되는 것 같아.
공들여 쓴 옛글들은 가끔 지금의 나에게 꼭 필요한 선물로 돌아오기도 한다는 걸 이번에도 감사히 깨닫게 되었어.
"제가 닮고 싶고, 저를 담고 싶은 일이니까요."
과거의 나의 예상처럼 대학원에서의 1년 반동안 나는 상담사에 꽤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고, 동시에 그 직업에 나를 꾸준히 담아 왔어. 상담사라는 직업의 틀에 나의 고유한 면면들을 부어 직업적 정체성을 만들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최근에는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하나 생겼어.
그 부분에 탁 걸려버려 잠시 주저앉게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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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사는 언니에게 한날 밤, 토로하듯 말했어.
'정상성을 추구하는 일이 너무 숨 막힌다.'
상담에서 내담자를 처음 만나는 시간을 '접수 면접'이라고 불러, 50분 남짓한 시간 동안 내담자의 호소 문제, 가족관계, 성장 과정, 인간 관계, 직업, 종교, 건강 상태, 강점과 약점 등을 파악하는 과정이지. 접수 면접 다음 회기에는 보통 심리검사 해석을 진행하게 돼. 30점, 70점, 65점 등 기준 점수들을 바탕으로 내담자의 특성을 파악하는 과정이지.
그리고 나서는 사례의 틀을 잡고 상담 목표를 내담자와 합의하고, 상담을 진행하게 돼. 물론 사례개념화는 새로운 정보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수정되는 것이지만..일단은 처음의 틀이 되어주는 거지.
위의 일련의 과정은 '진단'의 양상을 띠고 있기도 해. 그러니까 일종의 평가 과정. 나는 이 평가 과정에서 수퍼바이저 선생님들께 공통된 피드백을 받았었어.
"(내담자의) 이런 이야기 이상하지 않았어요? 근데 그냥 수용해버리네.."
이상한, 그러니까 평범하지 않은, 즉 평균을 벗어난 사고와 감정, 행동을 내가 그렇게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 수퍼바이저 선생님들의 요지였어.
처음에 나는 반항심이 들었던 것 같아.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그냥 이 사람의 고유성 아니야? 그리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하지만 이런 생각은 곧이어 바뀌게 되었어. 수퍼바이저 선생님들이 짚어준 '이상하다는 부분'에 개입했더니 내담자의 심리적 어려움이 줄어드는 게 보였거든.
그 뒤로부터는 내담자의 어떤 사고와 감정, 행동들이 적절한가에 대한 판단을 열심히 하게 된 것 같아. 당장 그게 도움이 되니까, 그렇게 해오다가. 거기에 익숙해진 지금은 조금 슬퍼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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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공개사례발표에 참여하기 위해 보고서를 읽고 있던 중이었어. 자료를 읽으며 속으로 '편집적인 사고네', '분열적이다' 라는 생각을 하다가 위와 같은 이유로 슬퍼졌었어. 이렇게 납작한 자료들만 보고 납작하게 한 사람을 평가하는 일이 너무 싫다는 생각이 들었지.
슬퍼진 마음으로 공개사례발표를 듣고 있다가, 수퍼바이저 선생님의 한 마디에 푹 꺼져 있던 마음의 고개가 살짝 들리는 게 느껴졌어.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
"전형적인 편집-분열자리에 있는 내담자다. 그런데 나는 이 사람의 이 공격성을 좀 읽어주고 싶다."
선생님께서는 이어서 지금의 이 이상하고 다른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내담자의 공격성이 내담자의 삶에서 어떤 의미였을지,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지, 그러는 마음은 어땠을지,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일지를 섬세하게 말씀해주셨어. 그걸 듣고 있는데 눈물이 났어.
정상이고, 이상이고 그런 걸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들려주시는 선생님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감동적이었어. 저런 말들은 누군가를 살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또는 존재할 수 있게 하거나.
우리는 타자로부터 '나'를 만들어 내니까. 누군가 봐줌으로써 '나'라는 존재가 성립되는 것에서 부터 시작했으니까. 생애 초기, 타자가 나를 어떻게 다루고 봐주었는지에 따라 '자아상'을 만들어내니까. 아무도 봐주지 않았으면 '나'를 만들어내지 못했을 거고, 제대로 봐주지 않았으면 형성된 '나'는 나에게 부대끼고 불편했을 테니까.
상담은 그 봐줌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혹은 그것이 전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보여진 적 없었던 누군가를 처음으로 봐주는 일, 또는 제대로 보여진 적 없었던 누군가를 다시 봐주는 일. 그래서 그가 스스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을 키워주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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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관점에서 지금의 내 괴로움을 정리해보자면, 내담자를 잘 봐주고 싶지만 경험과 배움이 부족해 진단 너머의 그 고유함까지는 읽어주지 못하는 상태인데 그걸 어렴풋이 깨달아서 힘든 상태인 것 같아.
이렇게 스스로를 읽어주었더니 마음이 좀 안정되는 것 같아. 왜 괴로운지 알았으니 어디로 가면 되겠다라는 계획도 생겼고, 언젠가는 그럴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생겼어. 그러기 위해서는 앞서 사람들의 마음에 대해 치열하게 생각한 사람들이(학자들이) 어렵게 만들어 둔 진단, 그 최소한의 이해를 잘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제 '진단'이라는 단어를 봐도 슬프지는 않을 것 같아. 이제는 그 단어가 디딤돌로 보여.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는 지금, 여기가 도착점인줄 알았는데, 사실은 출발점이었던 걸 깨닫게 되었어. 그래서 또 다시 처음처럼 마음이 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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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의 초입에는 큰 끝을 앞두고 마음이 울적하다 했었는데, 말미에는 그 끝이 새로운 출발점이라는 걸 알게 되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아.
끝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무언가 시작할 때의 기쁨이 압도적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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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너는 출발점과 도착점 또는 그 사이의 지점 어디에 서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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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은 고요했지만 참 치열했어.
그리고 가끔 발걸음을 멈추고 귀여운 구름들을 찍는 순간들이 행복했어.
너의 여름은 어땠을지 궁금해.
그럼 결, 우리는 다음 편지에서 또 만나!
2025.08.29. 민경
답장은 여기로 보내주면 돼, 더 빠르게 마음 나누고 싶다면 아래 댓글로 남겨줘!
👀지난 편지의 답장을 나눌게, 네 마음을 어떻게 나아지게 하는지 물었었어.
구월이 오기나 할까?싶은 의구심이 드는 팔월 주말이야. 안녕하니? 민경,
몇 주 전부터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길래 가을이 오는가 보다 했는데 왠 걸 갑자기 요 며칠 상 간에 그 소리가 사라졌어. 걔네들도 가을인가 하고 왔다가 너무 더우니까 후퇴했나봐. 밤 낮으로 더우니까 잠을 제대로 못 자고 그래서인지 집 안 일은 쌓여 있어도 손을 쓸 수가 없다. 이런 때일 수록 카페인, 알콜은 조심해야 할 것 같아. 당장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도 결국 더 힘들어질 것 같아. 하지만, 유혹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지.
숙취~끔찍하지! 그럴 줄 알면서도 꼴딱 알콜이 불러 일으킬 반향은 황홀하지. 그 와중에 취해있을 것을 대비해서 민경이는 방 정리를 하고 나왔다니 꿀팁이네!! 팁 하나 더 보태자면, 냉장고에 콩나물을 준비해 두는 것도 좋을 것 같네.
몸과 마음이 엉망인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어떻게 하더라? 곰곰 짚어본다.
어떠한 연유로 내가 힘들어졌는가에 따라서 다른 것 같아. 만약 사람이나 일 등으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는 알콜이 최고이기는 할 것 같아. 비가 내리는 날 파전에 막걸리면 어지간한 스트레스는 날려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만약 스스로에게 실망을 한 경우라면 조용한 공간을 찾아 힐링 타임을 갖는 것도 좋겠지. 공간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는 요즘 한옥이 주는 위로에 좀 매료된 것 같아. 그래서 어디 좋은 한옥 카페가 있나 열심히 찾고 있어. 그리고 어떤 공간에 내가 머무르고 싶은지 상상해 보는 것 만으로도 행복할 때가 있어. 사실 나는 '건축 탐구'를 열심히 시청 중이야. 어제 본 영상이 인상 깊었는데 'ㄷ'자 형 건축물이었는데 가운데 공간에 주방을 두고 좌, 우 공간에 각각 엄마 방과 딸 방을 두었더라구. 서로 다른 생활 패턴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의도로 지은 집인데 나는 왜 저런 생각을 못했을까 후회가 되어서 더 인상적이었던 것 같아.
이야기가 옆길로 새었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숙취로 심신이 힘들 때는 정말 답이 없는 것 같아. 기다리는 것 밖에는, 몸이 회복되는 시간을 견디는 게 답인 것 같아. 유명한 박사님(오은영박사님)이 했던 말이 기억이 난다.어려운 일을 당하면 그 일을 극복하려고 하지 말고 ‘견뎌라!’라고, 바람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는 어부처럼, 때로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숨을 내 뱉으면서 상황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려면 내공을 쌓아두어야겠지. 그런 의미에서 요즈음 독서에 흥미를 붙이게 된 것은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내친 김에 도서관에서 운영하는 독서회 모임에도 가입을 했어.
그래도 가을이 오겠지? 창문을 닫고 주변의 소음을 벗어나 푹 잠을 잘 수 있으면 좋겠어.
민경아! 가을에 만나자!From.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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