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는 말들

4. 산책하는 말들 / 단순하고 유용한 삶

30대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40대의 고민

2024.03.31 | 조회 4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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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4. 산책하는 말들 / 단순하고 유용한 삶

30대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40대의 고민

 

 

명랑한 운둔자를 쓴 캐럴라인 냅은 다음 생에는 평범함 삶을 꿈꾼다고 했다. 

“나는 다음 생에는 안경점에서 일하고 싶어.” 환상의 형태가 살짝 달라질 때도 있지만 - 은행 창구 직원이 되고 싶을 때도 있고, 24시간 편의점에서 일하고 싶을 때도 있고, 와이오밍주의 목장에서 일하고 싶을 때도 있다 - 보통은 안경점이다. 나는 그 일이 직접적이고 수수께끼 따위는 없다는 점에 끌린다. 하루 종일 손님들을 의자에 앉히고, 안경테를 골라주고, 작가 같은 직업이 사람들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갖게 해 주려고 간접적으로 우회적으로 애쓰는 것과는 달리 정말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사람들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주는 것이다. “자, 이건 어떻습니까? 편한가요? 초점은 다 맞고요? 잘됐네요. 다음 손님!” 만족스러울 것 같지 않은가? 최고의 의미에서 평범한 것 같지 않은가? 단순하고 유용한 삶. 너무 거창하지도 너무 복잡하지도 않은 삶. 그냥 보통의 삶.

캐럴라인 냅이 안경점이 안경점을 꿈꾸었다면 난 공장에서 일하는 모습을 자주 상상한다. 한 때는 빵집에서 일하기를 꿈꿨지만 정확하게 계량하는 베이킹은 자신 없을뿐더러 숫자와 친하지 않으니 계산을 하는 것도 두려워서 시작도 하기 전에 그만두었다. 기계나 숫자와 멀리 떨어져 일을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고민하다 찾은 답은 공장이었다. 평소 책을 포장하거나 엽서를 비닐에 넣는 것은 좋아했으니까. 도안 없이 뜰 수 있는 간단한 컵받침 같은 것을 대량 생산하길 좋아하니까. 하염없이 시간이 흐르길 바라면서 가만히 앉아 반복노동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무척이나 뿌듯해지지 않을까 막연한 꿈을 꾼다.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헛소리겠지만 누군가가 작가를 책상에 앉아 고고하게 노트북만 두드리는 직업이라 여기는 것처럼 알지 못하는 세계는 상상을 채울 수밖에.

공순이라는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차별석 시선과 ‘나중에 너 공장 갈래?’ 라던 선생님들의 험악한 말의 의미와 달리 실제로 공장에서의 삶은 꽤 괜찮을지도 모른다. 공장이 많은 산업단지에 살면서 목격한 그들의 삶은 무척 단단해 보였으니까.

 

글을 써서 잘 팔리는 작가가 되겠다는, 출판사로 성공해서 유명해지겠다는 뜬구름 잡는 꿈은 이제 그만두고 현실을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자주 고민한다. 그동안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꽤나 긴 시간을 썼으니 이제부터는 노년을 위해 정신 차려야지. 그런 삶에서 오는 안정감이 오히려 날 더 행복하게 해주지 않을까. 저럼한 카페를 찾아 2천 원 짜리 커피를 마시며 4시간 동안 글을 써도 내 지갑에는 돈 한 푼 들어오지 않는 이 일을 언제까지 해도 되는 걸까.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하고 있지만 내 일이 노동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저 앉아있기만 해서일까 돈을 벌지 못해서일까.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40에, 70에, 90 살에도 꿈을 포기하지 않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다시 흔들린다. 무언가가 되지 않더라도 원하는 삶의 방향으로 걸어가는 건 나이에 상관없는 게 아닐까. 이런 걸 욕심이라 할 수 있을까. 이걸 빼면 나에게 뭐가 남아있을까.  

 

언젠가 동네 엄마들과의 술자리에서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다. 내 이야기를 듣던 언니는 너무 먼 미래 말고 현실을 잘 살자고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자고. 프레시 매니저, 구몬 선생님, 작은 회사의 경리 등등 여러 직업을 거쳐온 생활력 강한 단단한 사람의 말이라 믿음이 갔다. 요즘은 이렇게 나보다 몇 해 더 산 인생 선배들의 삶에서 힌트를 얻으며 산다. 

쿠팡에서 일하는 내 오랜 친구는 오랜만에 만났더니 얼굴이 확 폈다. 실제로 살도 빠지고 컨디션도 좋다고 한다. '이 나이에 그것도 여자가 이런 일'을 한다는 시선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퇴근 후에는 아무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받을 일 없어 좋다고 했다. 돈이며 학벌이며 어디 하나 빠지지 않은  친구가 선택한 삶은 꽤나 현명해 보였다. 캐럴라인 냅의 말처럼 단순하고 유용한 삶.

그래도 몸을 쓰는 일이니 앞으로 길어야 5년 본다고. 그 이후의 삶은 아이가 있는 동생이 부담스럽지 않게 자신이 엄마의 노후를 책임지려고 한다는 확고한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부모의 노후는커녕 나의 중년도 어찌하지 못하고 있는 나보다 네가 낫구나. 다음에 만날 땐 언니라 불러야 될지도 모른다.

 

사실 갑상선 암 진단을 받기 전 꼬마김밥집 아르바이트를 지원했었다. 평일 이틀 오전 10시부터 2시까지 라는 맞춤인 근무 시간과, 김밥 좋아하는 아들 덕분에 평소 김밥말기가 김치볶음밥 만들기처럼 쉬운 내 적성에도 딱 맞았다.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주춤하던 사이 마감되어 아르바이트는 무산되었지만 여전히 내 노동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을 기웃거린다. 공장이나 김밥집에서 일할 수 있는 것도 앞으로 몇 년 남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게 될까. 놀랍게도 40에도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을 30에는 알지 못했다.

 


구독자 님 안녕하세요.

저는 수술을 잘 끝내고 퇴원해서 친정에서 요양하며 뉴스레터를 씁니다. 수술은 잘 되었고 빠르고 회복하고 있어요. 걱정해 주신 구독자님 덕분입니다. 정말로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마도 다음 마흔 일기는 암(2)가 될 것 같네요. 어쩌다 보니 시리즈가 되었어요. 

다음 편지까지 건강하시길. 다가오는 벚꽃 철 즐길 만만의 준비를 하고 계시길 바랍니다.

 

24.3.31.

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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