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일기

40. 마흔 일기 / 노년

나는 내 보호자가 되었다

2024.08.14 | 조회 7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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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40. 마흔 일기 / 노년

나는 내 보호자가 되었다

 

 

며칠 운동을 소홀히 하면 누웠다가 일어날 때 허리에 힘이 들어간다. 약해졌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근육이 긴장하고 버티려는 것이다. 누워서 바로 잠들지 못하고 불 꺼진 방에서 핸드폰을 몇 시간 붙들고 있던 다음 날 아침에는 안경을 몇 번이나 닦는다. 깨끗한 안경알을 보며 그제야 뿌옇게 흐릿한 것이 안경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몽골 사람들이 멀리 봐서 눈이 좋다고 했다던가 산책을 나갔다가 괜히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아파트 숲을 바라보며 걸어본다. 눈이 안 보이면 책은 이제 오디오 북으로 들어야 하나 지금처럼 글을 쓰는 건 어렵겠지 생각하면서.

한 때는 술을 곁들인 기름진 야식을 거하게 먹고 누워 행복이 별거냐, 맛있는 거 먹고 드러누워 배 두드리고 있으면 그게 천국이지 여기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12시까지 야식을 먹으면 (심지어 새벽까지 먹지도 못한다) 별안간 움직일 거리를 찾아 집안일을 한다. 벌떡 일어나 건조기에 있던 수건을 꺼내오는 내 옆에는 배가 부르다며 침대에 눕지 않고 고무장갑부터 끼던 남편이 설거지를 하고 있다. 

이제는 부족하다 싶게 먹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이 나의 적당한 기준이 되었다. 예전처럼 생활하는 것은 여전히 즐겁지만 중년이 된 내 몸에게는 혹독한 일이라는 것을 서러워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

 

눈과 허리, 위장까지 제 기능을 100% 발휘하던 때는 지났다. 이제 나는 매 순간 내 몸을 신경 쓰며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까지 세심하게 나를 돌보며 살아가는 것은 처음이다. 제멋대로 살고 싶은 날 잘 구슬려서 결승선에 끌고 가려고 어르고 달래서 부탁하는 또 다른 내가 보인다. 나이가 들었다고 징징거리려는 것이 아니다. 섬세하게 내 몸을 관찰해야 하는 때가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 그때를 일찍 알아챌수록 내 몸에 부탁할 때 덜 미안할 테니 되도록 잘 보이고 싶다. 

그때가 지금인지 벌써 늦었는지, 다행히 빠른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매일 상기하는 것으로도 벅차니까. 나는 그저 내 아이에게 하듯 나에게 잔소리를 한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된 아들이 계단을 내려갈 때도 여전히 계단 조심해, 천천히, 뛰지 말고, 잔소리를 하는 것처럼. 희정아, 무리하지 말아. 기운이 없을 때는 쉬어. 배고픈 상태로 밖에 나가지 말고 뭐라도 좀 먹자.

 

혼자서 떠난 헬싱키에서는 더욱 조심스러웠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14시간 떨어진 곳에 혼자, 나는 내 보호자가 되었다. 평소처럼 채소를 챙겨 먹고, 아침 일찍 하루를 시작하고, 오후 2시면 잠시 숙소에 들어와 쉬었다 저녁 일정을 시작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하나라도 더 보려던 호기로운 마음가짐은 중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겨우 4년 전 공항에서 산 마시는 링거를 아침마다 때려 붓고 걸었던 치앙마이 여행때와는 전혀 달랐다.

늦은 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어도 욕심부리지 않고 작은 맥주 한 캔, 팩에 들은 화이트 와인 한 잔으로 만족했다. 냉장고 문을 열면 오늘 밤의 맥주가 내일의 화이트 와인, 내일 모래의 레드와인 옆에 나란히 줄지어 차례를 기다렸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지금을 즐기자.

많아야 하루 두 잔을 마시던 커피도 최근에는 한 잔으로 줄였다. 카페에 가면 커피가 들어있지 않은 메뉴는 쳐다보지 않았던, 진한 커피를 서너 잔 먹어도 심장은 고요하고 밤에는 꾸벅꾸벅 졸음이 쏟아지던 것은 과거의 얘기일 뿐이다. 나는 이제 매일 겨우 한 잔의 커피를 아주 소중하게 즐긴다. 제때 잠들어 한 번도 깨지 않고 아침을 맞이하는 건 차라리 축복이다.

내가 언제 이렇게 되었나 한탄할 세가 없다. 언젠가 이 한잔의 커피도 불허명령이 떨어질지 모른다. 다시 병원에서 처방받은 수면제를 먹고 잠들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니 내 몸이 허락해 줄 때 적당량의 카페인을, 숙면의 밤을 감사한 마음으로 누리자. 

 

갑상선 암 수술을 한 뒤로는 내 마음을 잘 돌보는 것을 첫째로 하고 있다. 암의 정확한 원인이 수면 시간인지, 스트레이스인지, 먹는 것 때문인지 알 길이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는 것이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라 믿는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유일하고 쉬운 것이기도 했다. 

예전처럼 전전긍긍하지 않으려고 한다. 망해도 어쩔 수 없다. 내 실수는 어차피 나 밖에 알아채지 못한다. 실패해도 세상 끝나는 거 아니야. 살아있는 한 언제든 즐거운 순간은 다시 찾아오고 괴로움은 옅어진다. 다 괜찮아.  

내 몸이, 내 마음이 언제 어떻게 망가져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바꿔놓을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을 즐기며 후회와 원망을 줄이려고 한다. 마치 연애하던 고3의 심정과 비슷하다. 몇 년  가게 될 좋은 대학 간판만 바라보며 영화도 보지 않고, 벚꽃구경도 하지 않고 내 십 대를 보내지 않겠다 선언했을 때 엄마는 기가 막혀했다. 도무지 딸내미를 말릴 수 없겠다는 것을 알고 그러라 해서, 나는 마음 놓고 연애하는 무모한 고3이었다. 

덕분에 내 생에 지난 모든 시간들은 후회가 없다. 대체로 열심히 살았지만 그 사이 사랑을 했고, 우정을 나눴고, 나이가 들어서는 아이를 낳았고, 돌봤다. 아주 좋은 대학에 가지는 못했지만. 작가나 출판사로 성공하지 못했지만. 부족한 재능을 채우려는 노력이 한참 못 미쳤다는 것을 태연히 인정한다. 덕분에 나는 내일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어도 쓰지 못하고 쌓아둔 돈이 안타까울 것도 없고, 하지 못한 말이 있어 후회할 것도 없다. 나중으로 미루는 것 없이 있는 한 즐기고, 할 수 있는 한 매 순간 사랑한다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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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려고 노트북을 열고 매일 습관처럼 pc 카톡 로그인을 하는데 비밀 번호가 계속 다르다고 나온다. 문제는 이번에 제대로 알아도 다음에 또 틀릴 것 같은 불안이 틀리지 않을 거라는 것. 그러면 잠시 어두운 미래를 상상했다가 급하게 돌아온다.

많으면 하루 두 번씩 밥을 짓는 압력솥에 추를 1번에 두었던가 2번에 두었던가. 갑자기 까맣게 기억이 안 나 설익은 밥을 먹게 될 때. 내 책장에 빼곡히 꽂혀 있는 치매와 노년, 건강에 대한 책 한 권을 빼들어 안정을 되찾으려 노력한다. 

<살아가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에서 노화를 대하는 긍정적인 태도는 실제로 기대 수명을 7년까지 연장한다고 했다. 나는 걱정 인형 같은 소심한 사람이지만 최선을 다해 지금을 즐기는 것에 익숙하다.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걱정보다는 설렘으로 노년을 기대하자. 진하게 내린 한 잔의 커피를 귀하게 마시고 저녁에는 밤 산책을 나가리라 계획하면서. 비밀번호를 적어 핸드폰 메모장에 적어둔다.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여름휴가는 다녀오셨어요? 저는 헬싱키에서 무사히 돌아왔답니다. 거기서 얻은 뜻밖의 수확이라면 다양한 장소와 직업으로 만난 시니어들의 모습이었어요. 여행 내내 노년에 대한 생각을 참 많이 했네요.

구독자는 어떤 노년의 모습을 그리고 계신가요? 저는 멋쟁이 할머니가 될 자신은 없지만 활발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거나 병들어 누워있더라도 후회 없이 받아들이는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그곳에 있는 동안 간간히 올림픽 기사를 읽었는데요 파리 올림픽 사격에서 0점을 쏜 김예지 선수 인터뷰를 보고 얼마나 부럽던지요. 저는 저런 방탄 멘탈을 갖고 있지 않지만 보고 배울 순 있으니까요. 요즘은 자주 저 인터뷰를 떠올리며 저를 달래고 있어요. 괜찮아. 이게 내 세상의 전부는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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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편지할게요.

24.8.14.

희정 드림

 


💌문화다방 소식

원주 코이노니아에서 진진의 책방을 운영하시는 순진님께서 좋은 자리를 만들어 주셨어요. 헬싱키 여행이야기를 들려드릴 시간을 준비했습니다. 북유럽이 궁금하시거나 좋아하시는 분, 혼자서 첫 해외여행을 떠난 겁보의 도전기 들으러 와주세요. 예쁜 공간 서촌 '윗층에서 생긴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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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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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뽕의 프로필 이미지

    배뽕

    0
    over 1 year 전

    저는 내 노년을 상상하기보다, 노년을 준비한다는 마음이 맞겠네요 뭐든 지 천천히. 생각도 행동도 그리고 마음도^^

    ㄴ 답글 (1)
  • kaei의 프로필 이미지

    kaei

    0
    over 1 year 전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ㄴ 답글 (1)
  • 꿈꾸는제이의 프로필 이미지

    꿈꾸는제이

    0
    over 1 year 전

    내일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어도 후회없이 살자는게 제 인생목표인데 생각처럼 쉽지 않네요. 그런 삶을 살고 계시는 작가님 너무 멋지고 응원합니다. 노년이 와도 후회없도록 지금을 즐겨야겠지요.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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