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일기

4. 마흔 일기 / 생일

주로 행복의 목격자

2022.09.20 | 조회 7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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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저는 일 할 때 무척 진지한 발라드를 듣습니다. 사운드는 웅장할 수록 좋고 가수의 목소리를 처절할 수록 좋아요. 윤하의 '먹구름'이나 김필 '그때 그 아인' 같은 노래들이지요.

그런 음악을 듣고 있어면 저도 모르게 본격적인 자세가 됩니다. 클럽에서 빠른 비트의 노래를 듣고 자동으로 몸을 움직이게 되는 것과 같을지도 모르겠네요. 아주 가끔 가사가 귀에 들리기도 하지만 보통은 노래를 인식하지 못하고 일을 합니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혼신의 힘을 다해서, 덩달아 나도 그만큼 몰입하지요.

인사를 건내는 오늘은 토요일이고 저는 평일과 다름 없이 육아를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억울해졌습니다. 나에게도 주말은 주말이어야 하는데. 나는 낮에 3시간 일을 하러 나왔다는 것 때문에, 내일 친구를 만나러 서울에 올라가야 한다는 것 때문에, 주말에도 남편을 육아에서 제외시켜 주고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답답한 마음은 우선 뒤로 하고 글을 쓸꺼에요. 

 


 

4. 마흔 일기 / 생일

주로 행복의 목격자

 

한동안 친구들에게 삶의 즐거움에 대해 묻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나에게는 아이들이 즐거움이자 곧 괴로움이었으므로, 엄마가 된 다른 엄마들도 그런지 아이가 없는 친구는 또 어떤지 알고 싶었다. 내 또래의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하며 즐겁다 느끼며 살까.

내 유튜브 구독 목록을 봐도 얼마나 재미없는 삶을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웃고 떠들기 위한 채널은 없고 배우고 익힐 목적의 영상뿐이었다. 가끔 뜨는 웃기는 영상들을 보고 있으면 곧 쓸데없는 것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자괴감에 빠졌다.

가장 좋아하는 취미이자 일인 글쓰기와 독서 역시 지나치게 정적이었다. 속부터 차오르는 만족감은 있었지만 배가 찢어지게 웃으며 한바탕 떠드는 행복은 거기 없었다. 천천히 걷기를 좋아하는 내 스타일의 운동도 엔도르핀을 터뜨리는 격렬함은 아니었다. 그저 조용히 바람을 느끼고 아주 조금 숨이 가쁠 정도로 지루하게 걷고 걷는 산책일 뿐이었다. 건강을 위한 최소한의 움직임 정도.

나는 보통 행복의 목격자로 살길 자처해왔다. 아이들이 공원에 뛰어다니며 활짝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반짝이는 햇살에 다른 아이들의 깔깔 거리는 웃음소리까지 배경음악이 되어준다면 완벽했다. 꼭 아이들에 국한된 건 아니었다.

좋은 물건을 보면 갖고 싶은 마음보다 주고 싶은 마음이 항상 앞선다. 아름다운 비즈 목걸이를 보면 목이 긴 남동생의 여자 친구가 떠오르고, 초록색 카디건을 즐겨 입는 엄마가 들면 좋은 것 같은 자수 가방을 보면 '와 예쁘다' 다음 단계가 '갖고 싶다'가 아닌 '주고 싶다'가 돼버리고 만다. 좋은 것은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비루한 마음에서가 아니라 이미 나는 충분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욕심나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 주어도 아깝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선물 받은 물건을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경우도 많다. 서운해 할 수 있어서 나는 이런 사람이란 걸 미리 공공연히 얘기하는 편이다. 나를 생각하는 마음은 이미 충분히 나에게 남았으니 이 물건은 내가 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러다 보니 치약, 뜨개 컵받침, 커피콩처럼 다시 다른 사람에 주기에 소박하거나 유통기한이 있는, 그러면서 당장 내게 유용한 물건들만 내 곁에 남았다.

 

 

마흔 즈음의 사람들은 다들 무슨 재미로 살까. 뭘 하며 웃고 행복해할까. 그들도 나처럼 목격자의 삶에 만족할까. 친구 K는 아이가 할머니집에서 자는 날이면 게임 폐인 같은 밤을 보내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푼다고 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새벽까지 게임을 하며 컵라면이나 핫바처럼 몸에 안 좋은 것을 잔뜩 먹는다고. DIY 미니어처 만들기가 하고 싶어서 일주일에 한 번 친구와 함께 인형의 집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그 친구가 게임을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된 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미니어처 집이라니! 그건 것에 관심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무척 놀랐다.

나는 누군가의 의외성을 발견하면 사랑에 빠지는 편인데, 그 사람의 의외에 모습이 곧 매력이라 믿기 때문이다. 고무줄놀이하던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K에게 이런 새로운 모습이 있었다니. 착하고 순한 K가 컴퓨터 앞에 앉아 헤드폰을 쓰고 눈을 부라리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모습을 상상하니 짜릿했다. 그리고 또 어느 날은 손톱만큼 작은 것을 자르고 붙이며 낑낑거리고 있는 모습이라니. 너무 사랑스럽지 않은가. 번 아웃으로 힘들어하던 그 친구에게 돌파구가 되어주겠구나 안심했다.

나에게도 의외성이 있을까. 놀고먹는 걸 좋아했던 내가 게으름과 거리가 멀어진 일상을 보내고, 혼자 여행 다니길 좋아하던 내가 지방 출장에도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걸 보고 내가 알던 문희정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은 들은 적은 있다. 작가라는 직업도 안 어울리는 것 같다고 했었지. 그건 정체성이지 의외성은 아닌 것 같다.

종종 내 타투를 보고 놀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거 전혀 관심 없으실 것 같았는데부터 안 어울려요 까지 별의별 말을 다 들었다. 그다지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편이라 타격감은 없었고 반대로 오호라 나도 의외성이 있는 사람이구나 싶어서 좋았다. 그렇다고 시간 날 때마다 타투를 받아서 온 몸을 도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내 즐거움은 어디 있을까. 여전히 의문이다.

 

 

주말에는 친구 집에 다녀왔다(인사말을 쓰던 토요일 집중 육아도 일요일에 친구네 집에 가기 위한 것이었다). 친구H는 자기 생일 파티를 할 테니 놀러 오라고 했다. 생일이라 함은 갖고 싶은 것 링크를 보내 주거나 그것도 귀찮으면 송금으로 축하를 대신하는 거 아니었나? 생일 '파티'라는 단어도 너무 오랜만이었다. H는 어릴 적 생일파티처럼 레트로 콘셉트를 잡아 초코파이로 케이크를 만들고 김밥을 성처럼 쌓을 거라고 했다. 꿀떡이랑 잡채도 직접 할 테니 고깔모자 쓰고 축하해달라고, 형편이 어려워 어릴 때 생일파티를 못해본 한을 풀겠다고 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케이크 모양 천으로 된 모자를 쓰고 핑크색 불이 반짝이는 안경을 쓴 친구가 어깨에는 HAPPY BIRHTDAY라고 쓰여있는 미스코리아 같은 띠를 두르고 있었다. 식탁 뒤로는 생일 축하 가랜드가 달려 있었고,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린 상 위에는 얘기했던 메뉴 외에도 갈비찜과 떡볶이, 돈가스가 더 올라와 있었다.

 

"야야. 모자 써. 모자부터 써야 돼. 오늘 벗지 마."

"뭐야 뭐야 생일파티한다더니 이렇게 까지?"

"미쳤나 봐. 노래 뭐야(술집 생일파티처럼 큰 소리로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모자 고무줄 너무 쫄려. 턱 아파."

"사진 찍어 사진, 동영상은 누가 찍을 거야."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더니. 이 정도였냐."

 

우리는 누가 누구에게 얘기하는지 모르고 한껏 들떠서 떠들었다. 어릴 적 그때처럼 찰지게 욕도 했다(나는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나면 욕쟁이 할머니가 된다). 의외로 즐거웠다. 나 왜 이런 거에 즐거운 거야? 스스로 놀랍고 어색할 정도로 재미있었다. 스스로 생일 음식을 만들고 친구들을 집으로 부르고 야단법석으로 장식을 한 친구의 호들갑이 반가웠다. 39살 생일을 축하하는 친구들이 모여 고깔모자를 쓰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연신 사진을 찍어대며 놀다니, 아주 웃기고 또라이 같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이런 자리를 만든 또라이에게 말도 못하게 고마웠다(실제로는 또라이 새끼라는 말 밖에 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 친구의 생일 바로 며칠 전이 내 생일이었다. 나는 그날도 케이크를 앞에 두고 촛불을 끄는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핸드폰에는 내 생일날 찍은 아이들의 사진만 가득하다. 엄마에게 낳아주셔서 감사하다고 꽃을 선물하고, 아이들이 먹고 싶은 케이크를 고르고, 고사리 손으로 그린 엄마 얼굴이 그려진 생일카드를 받는 것. 저녁에는 술 한 잔 하며 하루를 보내는 게 나의 행복이었다. 좋아하는 바다에서 노을을 봤지만 그 풍경을 배경으로 웃고 있는건 아이들이었고 나는 그걸 보는게 좋았다. 그런 행복도 좋았다. 그리고 목격자가 아닌 주인공으로 생일을 자축하는 H의 행복도 좋아 보였다. 겉으로는 생일에 뭐 이렇게까지 진심이냐며 놀렸지만 속으로는 나도 생일날 만큼은 주인공으로 살아봐야겠구나 배웠다.

내가 사는 청주에서 친구가 있는 인천까지 시외버스로 2시간이 걸린다. 버스가 많지 않고 터미널까지 가는 시간이 있어서 보통은 약속시간 4시간 전에 출발한다. 새벽같이 일어나 몇 시간 얼굴을 보고 그만큼의 시간을 들여 다시 돌아오는 길, 친구가 싸준 반찬을 바리바리 들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오늘 찍은 사진을 주고받았다. 비 오는 날 같은 교복을 입고 우산도 없이 뛰어다니던 그때처럼 우리는 아무 걱정없이 웃고 있었다.

 

맨 오른쪽이 저에요. 생일에 진심인 친구H는 왼쪽. 가운데는 게임과 미니어처에 빠진 친구K 입니다.
맨 오른쪽이 저에요. 생일에 진심인 친구H는 왼쪽. 가운데는 게임과 미니어처에 빠진 친구K 입니다.

 


 

추석이 지나고 이맘때가 되면 벌써 한 해가 다 가는 기분이에요. 남은 시간을 그대로 보내기 아까워 조금 조급해지기도 하고요.

여러분은 어떨 때 즐거움을 느끼나요? 의외의 취미생활이 있으신가요? 저는 이번 뉴스레터를 쓰다 말고 칵테일 책을 주문했어요. 습관처럼 마시던 맥주도 지겹고, 와인도 한 병을 다 비우기에는 부담스러워서 매일 밤 자기 전 한 잔씩 마시는 것을 칵테일로 바꿔볼까 해서요. 배움의 시작은 책이니까, 칵테일을 책으로 배워보려고 합니다. 제 삶에 즐거움을 찾기 위한 시도이지만 혹시 또 아나요. 요즘 유행하는 위스키 바라도 열게 될지.

다음 편지까지 즐거운 날 가득하시길 바랄게요.

22.9.20. 희정.

 


 

💌문화다방 소식

이번 주 금,토,일은 원주에 있습니다. 가까운 곳에 계시다면 독서대전에 놀러오세요. 저는 댄싱공연장 내 치악예술관에 있을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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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무링

    0
    about 3 year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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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답글 (1)
  • 정블리의 프로필 이미지

    정블리

    0
    about 3 year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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