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일기

36. 마흔 일기 / 암(2)

아픈 내가 다 큰 어른이라 우리 엄마는 덜 가슴 아플까

2024.04.12 | 조회 6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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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희정입니다.

저번 주말 벚꽃이 만개였는데 꽃구경은 잘 하셨나요? 저는 벚꽃 개화시기가 조금 늦어진 걸 속으로 좋아하며 천천히 몸을 움직였답니다. 토요일은 우암산으로, 일요일은 보강천으로 봄 소풍을 다녀왔어요. 다녀와서는 낮잠으로 체력을 보충해야 했지만 꽃 피는 계절 밖에 나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답니다.

제철 음식 먹고 계절마다 꽃 구경이며 물놀이든 다닐 수 있는 삶이 행복인 것 같아요. 아름다운 봄 잘 누리며 이 글을 보고 계시길.

오늘은 퇴원 전까지의 두 번째 암 일기를 보냅니다.

 


 

36. 마흔 일기 / 암(2)

아픈 내가 다 큰 어른이라 우리 엄마는 덜 가슴 아플까

 

 

📑24. 2. 8.

해마다 나갔던 제주북페어는 수술 날짜와 겹쳐서 올해 쉬어야겠다. 아이들과 함께 가기 좋은 페어라 사실은 북페어를 핑계로 봄날의 제주를 즐기러 발 도장을 찍었었는데 아쉽네.

수술 후 딱 한 달. 그때의 컨디션을 가늠할 수가 없다. 후기를 검색해 보니 퇴원하고 요양병원도 가던데 나도 가야 할까. 나를 우선으로 생각하고 쉬자고 마음먹었으면서 초등학생으로 겨우 한 달이 지났을 하나가 걱정이고, 과연 내가 아이들과 떨어져 일주일을 쉰다 한 들 행복할까 하는 고민도 발목을 잡는다. 미련 떨고 있네.

 

 

📑24. 2. 16

수술을 끝내고 한방병원이나 요양병원 같은 곳에서 일주일씩 쉬다 오는 사람들의 후기를 읽고 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체력이 떨어져서 병원에서 쉬며 도수 치료도 받고 남이 해주는 밥 먹으며 쉬다 온 것이 너무 좋았단다.

나도 좀 그래볼까. 호캉스는 못해도 하캉스라도 해볼까. 아픈 김에 쉬어가라니까 진짜로 푹 쉬어 볼까. 도저히 시작할 엄두가 안 났던 벽돌책을 두어 권 갖고 가 침대에 기대앉아 책이나 실컷 읽다 올까. 잠시 달콤한 상상을 하며 수술받는 병원 가까이 후기가 좋은 병원을 알본다. 하지만 예약하지 않을 것이다. 40년간 지켜본 문희정이라는 인간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수술을 위해 입원하는 4박 5일이 내가 집을 비울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일 것이다.

첫아이의 어린이집에서 알게 된 동갑내기 동네 엄마에게 내 수술 소식을 듣고 해준 말이 있다.

‘너 없어도 애들 안 굶어. 그리고 좀 굶어도 안 죽어. 너 없다고 애들 어떻게 안 되니까 걱정 마자 마.’

나는 그 말이 다 맞다는 걸 알면서도 이 손을 놓지 못한다.

 

 

📑24. 2. 18

갑상선 유두암 환자라거나 갑상선 유두암 투병 중이라는 사실은 아직도 먼 이야기 같다. 그냥 예전부터 알고 있던 목 안에 작은 결절이 아주 못된 놈이라 곧 떼어낼 거라는 것. 그 약간의 긴장감만 갖고 살고 있을 뿐이지 지내는 건 평소와 똑같다. 수술 후에는 미역이나 김 같은 걸 못 먹는다는 얘기도 있던데 좋아하는 미역국과  김부각을 줄여야 한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 또 한동안 술을 못 먹을 테니 보복 심리로 더 열심히 마시고 있는 술, 수술 후 회복에 대한 아주 약간의 두려움 정도만 갖고 있다.

이번 주말은 책방 행사가 있어 삼척에 다녀왔다. 남편은 내 암 진단 이후로 먹는 것에 돈을 아끼지 않기로 했단다. 평소 같으면 여행지에서도 비싼 음식을 먹는 법이 없는 사람이 대게든 회든 당신 먹고 싶은 거 다 먹으란다. 그리고 카드값 결제하는 날 또 발을 동동 굴릴 거면서. 

이제는 나도 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무슨 주문처럼 되뇌면서 스스로를 세뇌시키고 있다. 이게 노력이 필요한 일이라니 아이러니하지만 좋은 것을 먹으면 아이를 떠올리고 부모를 떠올리고 남편에게 양보하는 것을 그만두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다. 

저 뒤에 있는 나를 자꾸 끌어올려 앞에 세운다. 좋은 것은 너 먹어라. 하고 싶은 대로 해라. 힘들면 쉬어라. 내 아이에게 하듯 나를 돌보는 흉내를 낸다. 어디까지나 흉내일 뿐 사실 진심은 아니다. 나는 나를 대여섯 번째 때쯤 세워두는 것이 가장 편한데 등 떠밀려 앞에 서있으려니 여간 어색하다. 그래도 내 자리같이 않은 불편함을 감수하고 맨 앞에 서 있는 시간을 늘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여행 둘째 날 아침 따뜻한 국을 먹으러 체인점 설렁탕집에 갔다. 설렁탕은 11,000원. 도가니탕은 2만 원 꼬리곰탕은 28,000원. 남편은 또 당신은 꼬리곰탕 먹으라 먹으라 치켜세우는데 정말 한 끼에 28,000원을 쓰는 사치를 부려볼까 하다 가까스로 참았다.  

 

 

📑24. 3. 2

수술 전에 왜 병원에 두 번이나 가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2일과 16일 두 번의 검진 예약이 잡혀있다. 아마도 하루 안에 다 끝내기에는 스케줄이 어려웠나 보다. 

CT 검사를 위해 8시간 금식하는 건 어차피 간헐적 단식을 하고 있어서 어렵지 않았다. 자다 깨서 물을 자주 마시는 편이라 새벽에 두 번 자동으로 눈이 떠졌을 때 목마름을 참는 것만 조금 어색할 뿐.

MRI는 한 자세로 움직이지 않고 40분 이랬던가 아무튼 오래 있어야 한다고 해서 어렵다고 들었는데 CT는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팔에 넣은 조영제가 빠르게 몸에 흡수되는 사이 천장에 만들어 놓은 벚꽃 핀 인공 하늘을 보며 잠시 침을 삼키지 않고 있다 끝났다. 왜 침을 삼키지 말라고 하면 침이 삼키고 싶어지는 걸까. 

 

 

📑24. 3. 5

마켓 컬리 9천 원 쿠폰이 들어와서 장 보는 김에 멍게를 담았다. 우리 가족 중 나밖에 먹지 않는 멍게. 이전 같으면 7천 원이 어디냐고 사지 않았겠지만 나는 이제 예전보다 꽤나 날 위하고 있다. 그게 오로지 먹을 것이 국한된다는 게 조금 아쉽지만 이거라도 시작한 게 어딘가. 

미나리 철이라고 엄마가 보내주신 미나리에 양배추나 깻잎 넣고 멍게 잔뜩 넣어 비벼 먹을 생각이다. 아이들은 학교 가고 남편은 회사 가서 아무도 없는 점심시간에 나를 위한 한 끼를 정성껏 차려서 먹어야지. 

2월은 보상심리로 너무 방탕하게 살았다. 술도 많이 먹었고. 덕분에 빠졌던 2킬로가 도로 구석구석 야무지게 붙었다. 3월에는 수술을 앞두고 다시 몸을 만들 생각이다. 그래봤자 하루 만 보는 걷고 물을 잘 챙겨 먹고 채소를 매일 챙겨 먹는 정도겠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다시 시작이다.

 

 

📑24. 3. 11

3월 달력이 매일 일정으로 빼곡하다. 수술 전에 해야 할 것들을 처리하고 수술 후에 해야 할 것들을 당겨서 해놓으려니 쉴 틈이 없다. 일단은 치과 진료를 끝내놓으려고 한다. 충치 치료와 잇몸치료까지 앞으로 2주가 더 남았다.

4월부터 시작될 수업 준비도 세이브 원고를 준비하는 웹툰 작가처럼 적어도 2주 치는 해두어야 한다. 수술 후에 한 달을 쉬어야지 했는데 나는 전생에 노비였던 게 틀림없다. 봄 학기 수업을 쉬어가면 올가을 책 제작비는 어디서 마련하나 걱정이 앞서 그냥 밀어붙이기로 했다. 그것도 수술 후 2주 뒤. 에라 모르겠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일하며 얻는 즐거움과 보람이 날 살게 하리라.

전 집 정리와 냉장고 정리도 해야 하고, 수술하기 전에 얼굴 한 번 보자는 친구들 약속까지 줄줄이 잡혔다. 주말에도 서울과 청주를 오가며 놀 예정이다. 무리해서라도 수술을 핑계로 친구들 얼굴을 보려고 한다. 점점 즐거울 일이 사라지기 쉬운 나이니까. 일부러 웃을 일을 만든다.

 

 

📑24. 3. 15

수술 전 두 번째 검사. 저번에는 CT만 찍고 돌아갔는데 이번에는 채혈 채뇨 심전도 검사를 하러 왔다. 초음파도 있는데 그건 안내지에 수술 전 날 한다고 쓰여있다. 간호사 선생님이 뽑아주신 종이 한 장에 의지해 이곳저곳 찾아다닌다. 친절하게도 색색깔 형광펜과 사인펜으로 헷갈리지 않게 체크해 주셨다. 그래도 혹시 몰라 두 번 세 번 확인하며 걷는다.

피를 뽑는데 납작하고 네모난 스테인리스에 담겨온 빈 통이 7개. 저게 다 내 피를 담아 갈 통인가 설마 했더니 진짜였다. 

“와. 7개 뽑은 건 처음이에요.” 

아무도 묻지 않아도 혼자 떠드는 아줌마가 되었구나 나. 수술 전 채혈은 그렇다며 12개를 뽑기도 한다고 친절한 선생님이 혼잣말이 되지 않게 대답해 주었다.

모든 검사를 끝내고 결과가 나오기까지 한 시간 정도가 필요했다. 1층 카페로 가서 커피와 딸기 타르트를 시켰다. 타르트 하나에 8,500원이라니 미친 물가다. 더 놀라운 것은 빨간 딸기 위에 올라가있던 초록 잎사귀가 플라스틱이라는 거다.

저번에 남편과 함께 왔을 때 남편은 가격을 보더니 차라리 기다리는 한 시간 동안 나가서 걷자고 했는데 난 이걸 버젓이 사 먹고 있네. 우리 집 짠돌이는 절대 안 먹을 타르트를 먹으며 이 글을 쓴다. 글이라도 쓰니까 그냥 먹는 것보다는 덜 아깝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결과를 듣는 건 4층 수술 전 평가실 이었다. 수술실 앞 대기 의자에는 나처럼 수술 전 검사 결과를 들으러 오는 사람과 수술 중인 사람의 보호자들이 있었다. 전광판에는 환자의 이름과 진료과목, 진행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다음번에는 내가 저 안에 들어가 있는 걸까. 여긴 남편이나 친정엄마가 앉아 계시겠지.

다행히 검진 결과는 문제없었고 이제 수술만 남았다.

 

 

📑24. 3. 18

그동안 수술 전 치과치료가 큰 숙제였다면 이번 주는 친구들 만나기에 주력하고 있다. 검사를 위해 금요일 아침에 서울로 올라가서 일요일 낮까지 매일 약속이 있다. 내 소식을 들은 친구들의 연락이 오면 ‘그래 수술 전에 얼굴 한 번 보자. 맛있는 거 먹고 힘내.’ 같은 이야기들이 단순한 텍스트가 아닌 진짜 만남으로 이어졌다. 암을 앞두고는 '언젠가'나 '나중에' 같은 막연한 약속은 하지 않았다.

밥은 꼭 친구들이 샀다. 메뉴는 몸에 좋은 것 혹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마치 생일처럼.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는 걸까 미안할 정도로 맛있는 것들을 먹었다. 문어와 낙지, 새우, 전복, 닭이 들어간 해천탕을 먹고 곱창이랑 막창을 먹고 떡볶이를 먹고 스테이크를 먹었다. 친구들이 커피도 사주고 술도 사줬다. 매일매일이 파티 같았다. 살도 1킬로가 더 쪘다.

친정에 갔더니 외할머니가 봉투를 주셨다. 일하다 맛있는 거 사 먹어라 하고 주셨지만 암에 걸린 손녀가 짠해 주신 거다. 효율적이고 실질적인 방법으로 말과 마음을 대신하고 싶으셨던 거겠지. 한 달에 한 번 정도 외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오시는 작은 외삼촌도 봉투를 주셨다. 잠바까지 입고 소파에 앉아계셨던 걸 보니 아마 내가 들어오는 걸 기다리셨던 것 같다. 젊은 애가 왜 그런 게 걸리냐며 건네주신 봉투는 열어보기 죄송할 정도로 두껍다. 그 봉투에는 나에 대한 걱정과 더불어 외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엄마의 새로운 근심거리를 위로하는 두툼한 마음이 들어있을 것이다.

아프니까 미안할 정도로 고마울 일이 많다.

사노 요코가 쓴 <사는 게 뭐라고>에 암에 걸리면 사람들이 잘해준다는 대목이 나온다. 암 진단을 받은 후에 읽기 시작한 책이라 무척 공감했다. 그녀가 했던 말처럼 우울증 보다 암에 걸리는 편이 나은지는 우울증을 앓아본 적이 없어 모르겠지만,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우울증은 공감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외상은 없지만 이만큼 힘들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지점이 있었을 거다. 하지만 암은 앞뒤로 아무 설명을 달지 않아도 그 한 글자가 주는 무서운 힘이 있다. 암이라니. 내 친구가 암이라니. 내 딸이 암이라니. 내 가족이 암이라니. 그 한 마디로 사람들은 태도를 바꾼다. 상냥해진다. 

 

 

📑24. 3. 23

수술 전 주말 어디라도 가야 했다. 마침 날씨도 좋았고 수술 후에 컨디션이 어떨지는 장담할 수 없으니. 남편이 그런 내 마음을 알고 먼저 어디라도 가자 이야기를 꺼냈다. 대구를 갈까. 그러기엔 좀 멀고. 당일치기로 가까운 곳을 생각하다 자주 가는 공주를 택했다. 마음이 편해지는 동네. 여러 번 갔지만 갈 때마다 참 좋은 동네.

공산성을 걷고 이런 봄 풍경을 상상하며 강 바람을 맞았다. 아직 꽃이 피기 전이었지만 충분히 아름다웠다. 길 건너 카페에서 밤 파이를 먹으며 다음에는 공산성의 야경을 보러 저녁에 오자고 했다. 우리 가족이 모두 좋아하는 제민천을 따라 걷는 구도심 여행도 다시 오자 약속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탓에 전국 곳곳에 마음 둘 곳이 있어 다행이다.

 

 

📑24. 3. 25

입원 하루 전은 양심상 건너 뛰더라도 오늘은 제대로 마실 작정이다. 요즘 나는 술에 진심이다. 언제든 금지되어도 ‘아, 그때 조금만 더’라는 아쉬움이 들지 않도록. 

오늘은 동네 엄마들과 횟집에 갔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그녀들은 내 옆에 바짝 붙어 완전한 내 편이 된다.

“보험으로 나오는 돈 다 빚 갚는데 쓰지 마.”

“어떻게든 사수해. 그게 어떤 돈인데.”

“절반이라도 희정 씨를 위해 써야지.”

나는 애들이랑 일본 여행이라도 가고 싶다 했더니 마침 잘 됐다고 일본 특산품을 알려주겠단다.

“일본 특산품이 셀린느래요.”

모찌 라던가 말차 같은 건 들어봤어도 일본 특산품이 명품이었다니.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옆에서 듣고 있던 은진 언니는 셀린느 가지고 되겠냐고 샤넬이라도 사라고 거들었다. 이때 아니면 언제 사냐고 어차피 없었던 돈이라고. 그런 이야기로 웃고 떠드느라 어느새 밤 12시가 지나고. 다음날 단톡방에 올라온 우리 사진에는 2차로 간 맥줏집에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는 내가 있었다.

마흔 넘어 얻은 암 보험비로 마흔 넘어 첫 명품 가방을 살지는 아직 모르겠다. 

 

 

📑24. 3. 26

입원 하루 전. 4박 5일 동안 집을 비우기 전에 해야 할 것들을 하나씩 처리하다 보니 수술을 준비하는 게 아니라 어디 여행을 가는 것 같다. 빨대와 텀블러, 물티슈 같은 평범한 입원 준비물 보다 어째 내 가방에는 노트북과 책, 종이 꾸러미 같은 것들이 먼저 자리 잡았다. 

가장 고민스러운 건 어떤 책을 가지고 갈 것인지 선택하는 일이었다. 우선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뺐다. 필사를 하고 싶어도 어려울 테니 마음에 드는 페이지를 접을 수 있게 내가 갖고 있는 책들로 꾸리자. 두께는 되도록 두꺼운 것으로 했다. 흐름이 끊기지 않게 오래 책을 읽을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니까. 어떤 게 당길지 모르니 카테고리는 다양하게 고르고 싶었다. 되도록이면 양장본으로 된 두꺼운 걸 가져가야지. 한자리에 오래 앉아 읽을 기회는 많지 않으니까. <침묵의 봄>, <라면을 끓이며>, <몸의 일기>를 꺼내 놓고 아니지, 재미있는 책도 좀 가져가야지 안 그래도 아플 텐데 좀 웃어야 하지 않겠어 싶어 <전국축제자랑>을 꺼냈다. 내가 사랑하는 에세이도 하나 꺼내자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한 권, 요즘 읽고 있던 책도 마저 읽으면 좋잖아? <도둑맞은 집중력>까지 넣으니 6권이다. 지금 어디 북스테이로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이거 너무 욕심이잖아. 다시 덜어서 세 권만 챙긴다. 그러고도 혹시 몰라 나머지는 선반 위 잘 모이는 곳에 놓고 남편에게 당부해 두었다. 주말에 병원 오거든 내가 책 좀 가지고 와달라고 하면 이거 챙겨오면 된다고. 사실 세 권을 다 읽어도 괜찮다. 나에겐 노트북이 있으니. 읽지 않을 땐 쓰면 되겠지.

냉장고는 말끔히 비웠다. 흔한 대파나 당근 한 조각 없어서 오늘 저녁 계란말이는 색종이처럼 샛노랗다. 채소를 먹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쳐서 나는 아쉬울 따름이었지만 아이들은 좋아했다. 남편에게 동네에 괜찮은 반찬가게를 알려주었다. 해주는 남편도 먹는 아이들도 그게 낫겠지.

진짜 여행 가는 것 같다. 수술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걱정은 없다. 괜찮을 거고 다  잘될 거다.

 

 

📑24. 3. 27

아직 아이들이 잠들어있는 이른 아침, 새벽에 출근한 남편도 없고, 어른 없는 집에 두 녀석들만 놓고 현관문을 열고 나오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아침밥은 뚜껑 덮어 식탁 위에 차려놨고. 학교에 가지고 갈 물통도 옆에 꺼내 두었다. 옷도 입는 순서대로 꺼내놓고 오늘 날씨에 적당한 외투도 꺼내 놓았다. 이제 정말 준비 끝.

입원 수속은 2시부터인데 하필이면 초음파가 오전 9시. 아이들 학교는 보내놓고 가고 싶어 조금 늦출 수 있나 물었더니 조정이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 우주야 걱정 없지만 이제 막 1학년이 된 하나가 걱정되어 며칠 전부터 신신당부했다.

“엄마가 없으면 우주가 보호자야. 그냥 학교 앞에서 헤어지면 안 되고 하나 신발 갈아 신고 들어가는 것까지 봐야 해. 알았지? 만약에 하나가 준비가 늦어서 지각하는 상황이야. 그럼 우주 먼저 출발해야 할까. 늦어도 하나를 데려가야 할까?”

이런저런 시뮬레이션을 모두 끝내도 걱정이 한가득이다. 아이들은 내가 없을 때 더 잘 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이런다.

하나의 가방에 달아놓은 키즈콜 알림이 울린다. 8시 30분 정문 통과. 늦지 않고 잘 갔구나.

그 시간 나는 기차에서 내려 병원으로 향했다. 남편이 일본 여행 갔을 때 사 왔던 작은 사이즈 캐리어를 달달달 끌고 노트북 가방을 메고 걷는다. 남편이 이걸 사 왔을 때는 장난감도 아니고 이렇게 작은 걸 어디에 쓰냐고 코웃음을 쳤는데 미안하게도 내가 허구한 날 아주 잘 쓰고 있다.

캐리어를 끌고 KTX를 나서는 사람이 나 말고도 여럿이다. 캐리어를 끌고 기차역에서 나온다고 해서 다 여행을 가는 건 아니구나.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걸 알면서도 진짜로는 알지는 못했다.

캐리어를 끌고 병원까지 10여 분을 걸으면서 콧노래가 났다. 아무리 큰 걱정은 안 한다지만 콧노래는 아니지 자중하자. 수능을 볼 때도 그랬다. 평소처럼 하던 대로 하자 주문을 외우다가 지나치게 긴장을 풀어서 모의고사 보다 더 설렁설렁 풀어버렸다. 그게 그게 아니었는데. 그런 평소처럼 늘 말한 게 아니었는데. 이번에도 어쩌면 그런 것일지 모른다. 지나치게 즐거워하고 있다.

초음파 검사를 끝내고 입원 수속까지 시간이 남아서 병원 밖 카페에 들렀다. 이 휴가 같은 한 조각의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우선은 카페의 풍경을 눈에 많이 담아두려고 한다. 겨우 며칠이지만 앞으로 병원 풍경만 보게 될 테니 아름다운 것들을 많이 봐두자. 마침 카페에는 햇살이 잘 들고 꽃도 많다. 남은 시간을 계산해 보니 영화 한 편을 봐도 될 정도다. 영화관 바로 옆 건물 영화관에서 통신사 혜택으로 공짜 영화 한 편을 보는 것으로 입원 전 마지막 일정을 보내려고 한다. 전 좌석 리클라이너라니. 세상 좋아졌네.

 

 

📑24. 3. 27

침대는 아쉽게도 창가 자리가 아니었다. 그래도 가져온 책과 텀블러, 휴지와 충전기 따위를 침대 옆 선반에 두고 세팅을 끝내니 내 공간이라 애정이 생긴다. 서랍에는 세면도구와 수건, 자잘한 것들이 들어있는 파우치가 자리 잡았다. 입원 준비를 위해 작은 파우치에 면봉을 넣으면서 내가 왜 캠핑을 다니지 않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깨끗이 씻고 면봉으로 귓속 물기를 없애는 루틴을 병원에서도 유지하겠다는 사람은 영원히 캠핑은 다닐 수 없을 것이다.

저녁에 손등에 바늘을 꽂는다길래 서둘러 샤워부터 했다. 벌써부터 내일 머리는 어떻게 감아야 하나 고민이다. 아니 병원에 머리만 감아주는 미용실 같은 건 왜 없지 진심으로 의문이다. 내가 해야 하는 건가. 내 사주에 사업을 하라더니만 그걸로 대박 나는 건가.

하나를 낳을 때, 밤늦게 시작한 진통이 새벽이 되자 강해지기 시작했다. 첫째의 경험상 이제 진짜 출발선에 선 것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때다. 씻어야 해. 더 늦으면 나는 떡진 머리로 찝찝하게 아기를 낳아야 해. 남편의 부축을 받아 끙끙거리며 사워를 했다. 한 팔에 링거를 꽂고 수축하는 배를 잡아가면서. 나는 말끔한 두피와 번들거리지 않는 얼굴로 출산을 하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한 피곤한 사람이었다. 물론 지금도 수술 후에도 기름기 없는 머리카락과 냄새나지 않는 몸으로 누워있고 싶다.

 

 

📑24. 3. 27

입원 첫날에 쓰는 벌써 세 번째 일기. 내가 콧노래를 부르며 캐리어를 끌었던 이유를 알았다. 입원 가방을 싸면서 왜 이게 입원이 아니라 여행같이 느껴지는지 드디어 알았다. 저녁밥을 누가 해서 내 침대로 가져다주다니. 오늘은 뭘 먹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백반 한 상이 매 끼마다 제공된다니. 나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내가 만들지 않은 오징어 뭇국, 도라지나물, 청경채 김치, 두부 김치를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다 받아먹을 먹는 순간을.

손등에 바늘을 꽂으러 오셨다. 간호사 선생님 표현으로는 주사를 잡는다고 하더라. 왼손 오른손 어디가 좋으시겠냐고 하셔서 왼손에 맞겠다고 했다. 나는 양손잡이라 이럴 때 무척 고민스럽다. 양손잡이라 함은 양손을 모두 잘 쓴다는 게 아니라 왼손이 하는 일과 오른손이 하는 일이 극명히 나누어 있다는 뜻이기 때문에다.

왼손 - 오줌 닦기, 물통 뚜껑 돌리기, 그림 그리기, 이 닦기

오른손 - 똥 닦기, 물통 쥐고 마시기, 글쓰기, 핸드폰 하기

다른 건 다 알고 있었지만 화장실 뒤처리에도 왼손 오른손의 영역이 있다는 건 이번에 처음 깨달았다.

 

 

📑24. 3. 28

바퀴 달린 침대에 누워서 수술실로 이동하면서 살면서 수술받았던 경험들을 떠올렸다. 우주를 낳고 하나가 태어나기 전, 심장이 뛰지 않았던 9주의 아이를 보내던 날. 우주와 놀다 새끼발가락이 부러졌을 때. 그리고 지금이 세 번째구나.

울 것 같은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 걱정하지 말라고 태연하게 수술실로 들어갔다. 수술실에 들어가서도 여기 너무 추운데 선생님들은 반팔 입고 괜찮냐고 오지랖을 떨었다. 자신들은 움직여서 괜찮다고 친절히 대답해 주셨는데 마취 가스를 들이마실 때 마취 가스에서 초콜릿 냄새가 난다고 하는 말에는 대답이 없었다. 엔간히 할 걸. 너무 아줌마 같았나 후회하던 것이 수술 전 마지막 기억이다.

두 시간 반의 수술이 끝나고 회복실에서 너무 추워 턱이 덜덜 떨렸다. 춥다고 얘기하고 싶었는데 누굴 부를 정도로 크게 소리를 낼 수 없어서 계속 내 옆에 누군가 오길 기다려야 했다. 내 옆에는 아마도 러시아어를 쓰는 외국인이 있었는데 그 나라말을 하는 담당 간호사가 있는지 옆에서 계속 말을 걸어주실래 너무 부러웠다. 저기요... 여기 도움이 필요한 한국인이 있거든요.

계속 잠이 왔다. 그런데 자면 안 된다고. 폐가 펴져야 하니까 호흡을 해야 한다고 한다. 회복실에서 병실로 돌아와서도 엄마에게 너무 졸리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던 것 같다. 그렇게 4시간이 지옥이었다. 잠을 자지 않아야 한다는 데 몸은 움직일 수 없고, 뭘 해야 시간이 빨리 갈까 고민하다 한 손으로 겨우 핸드폰을 꺼내 하나가 내 핸드폰에 깔아놓은 게임을 했다. 엄마 핸드폰에 언제 이런 걸 깔아 놓았는지. 꼭 저처럼 귀엽기도 하지. 아픈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날은 계속 공복으로 하루를 보냈다. 네 시간 동안 ‘너무 졸려. 배고파. 자고 싶어.’라는 말만 반복했다. 엄마는 아플 땐 밥 생각 안 나는 건데 수술이 잘 됐나 보다고 안심했다. 처음에는 생각보다 아팠고 시간이 흐를수록 회복은 빨랐다. 

참, 회진을 온 선생님께 술은 언제부터 먹을 수 있냐고 물어보고 후회했다. 날 뭐라고 생각하실까.

 

 

📑24. 3. 29

수술 다음 날부터 커피도 괜찮다길래 병원 1층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병실 아래 커피와 빵을 파는 카페가 있다는 게 입원해 있는 내내 위안이 되었다. 어제는 꼼짝을 못 하겠더니 하루 지났다고 훨씬 낫다.

어째서인지 커피를 마셨는데도 터무니없이 이른 시간에 잠이 솔솔 온다. 병원에서는 낮에 자고, 밤에는 뜬 눈으로 지내고 있다. 병실은 너무 조용하다. 예전에는 티브이도 있고 보호자도 여럿 들락날락하며 소란스러웠는데. 그 안에 선을 넘는 간섭과 무례가 있었지만 지금보다는 덜 외로웠던 것 같다. 깎아서 나누는 과일과 병문안 오는 사람마다 들고 오는 주스는 넘치고 넘쳐서 병문안을 오는 다른 사람의 손에 들려 보내기도 했는데…. 요즘의 병실은 배려가 넘친다. 선을 넘는 법 없이 서로 존재감을 감춘다. 침대 커튼 안에서 다들 뭘 하고 있을까. 

다른 병실에 아이 우는소리가 들린다. 입원실 전체가 조용하니 더 잘 들린다. 다양한 병명을 갖고 있는 8층 외과 병실. 누구는 귀에 붕대를, 누구는 머리를, 누구는 허리를 칭칭 감고 한 층에 모여 있다. 내가 있는 4인실만 해도 유방암 2기, 뇌혈관, 목 디스크 병명도 담당의도 다 다르다. 내 맞은편 어머니는 딸과 함께 항암을 하러 왔다고 한다. 다른 병실에 있는 딸이 자주 엄마를 보러 온다. 둘 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다. 따님은 아마도 나와 비슷한 나이. 수술 잘 될 거라는 어머니의 덕담에 나는 뭐라 대답해야 어찌할 바를 몰라 그냥 웃었다. 

휴게실 정수기에 물을 받으러 갔더니 젖병에 약을 넣고 있는 젊은 엄마가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핸드폰에는 병원복을 입고 있는 갓난쟁이가 모빌이 달린 아기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어른들 사이에서 마음껏 울지도 못하려나. 아이를 두고 화장실도 못 갈 저 엄마는 힘들고 외롭겠지. 이제는 내가 다 큰 어른이라 매일 병실로 찾아오고 있는 우리 엄마는 덜 가슴 아플까. 그랬으면 좋겠다.

“혼자 있으려니 너무 무서워.”

환자복을 입은 어느 아주머니가 복도에서 전화를 하면서 운다.

 

 

📑24. 3. 30

영업시간이 끝난 병원 1층은 아이들이 돌아간 학교처럼 스산하다. 아무도 없는 놀이동산처럼 생경하다. 너무 누워만 있어서 저녁을 먹은 후 좀 걸어볼까 1층으로 내려왔다. 바깥공기를 좀 쐬고 싶지만 갑자기 차가운 공기를 쐬면 재채기라도 할까 걱정돼 나가지는 못했다. 수술 후 안내사항에 굵은 고딕체로 기침 금지라고 쓰여있었다. 비염 환자라 그게 인력으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1층에는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을 듯한 사람들이 서양 좀비처럼 천천히 걷고 있었다. 어딘가 불편한 사람들이니 걷기가 목적이어도 파워워킹을 하는 사람은 없다. 환자보다 더 아파 보이는 보호자들은 병동 출입이 가능한 출입증 목걸이를 하고 의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병원이 어둡고 무서워도 여기 있는 사람의 현실보다 밝으리라 않으리라 감히 예상해 본다.

 

 


 

암이라고 하면 주변 사람들은 얼굴이 새파래져서 눈을 끔뻑거리며 친절하게 굴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셋 중 하나는 암으로 죽는다. 당신들도 시간문제야. 나는 암보다 우울증이 몇 배나 더 힘들었다. 주위 사람들은 몇 배나 더 차가웠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점점 없어져갔다. 

사람들이 없어지게끔 내가 변하는 것이다. (중략)

암은 덤 같은 것이다.

p.111 사는 게 뭐라고 중에서

 

오늘처럼 맑은 날, 암 일기 같은 것을 보내게 되어 조금 미안한 감이 있어요. 하지만 암에 걸리고 난 후 저는 감사한 것들이 많아졌어요. 결국은 그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것 같아요.

또 편지할게요.

 

24. 4. 12

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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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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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뽕의 프로필 이미지

    배뽕

    0
    over 1 year 전

    병원가기전 그 즐거움,,,,저도 조금 알겠어요^^ 암이라니 암이지만 잘 지나갈 것 같은 작가님,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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