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의 여름방학

1-6 기내식부터 시작하는 여행

마흔의 여름방학 : 헬싱키에서 보낸 일주일

2025.04.24 | 조회 2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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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1-6 기내식부터 시작하는 여행

 

 

떠나지 못할 때 더 자주 여행기를 집어 든다. 자유롭지 못한 몸이 가만히 앉아 글로 대신하시는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여행기를 쓴 사람의 등에 살짝 업혀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도 하고, 베를린의 한 맥줏집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섞여 건배를 외치기도 하면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원하는 모든 곳에 도착할 수 있는 시간여행자가 된 기분을 만끽한다.

여행기로 떠나는 간접 여행의 단점은 대리여행자들이 여행을 지루해하는 경우에 찾아온다. 파리는 벌써 네 번째 라든가, 시간이 허락하는 한 수시로 일본으로 떠났다던가. 영국에 머물면서 관광지 대신 숙소에만 머물렀다는 문장을 읽으면 이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여행이었지 아차 싶다. 그때부터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낯설어졌다가 어느새 저 뒤로 물러나 책 속의 사람과 나의 거리를 가늠한다.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있는 듯 그들의 여행에 한껏 몰입했다가  한 발짝 물러나 꼼짝없이 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조금은 허탈한 순간.     

 

왜 대부분의 여행기에는 떠나기 어려운 이의 간절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는 걸까. 그 나라 언어를 못해 식당에서 주문하는 데 애를 먹는 가던가, 새벽같이 일어나 구글맵을 손에서 놓지 않고 1분도 허투루 쓰지 않는 참된 관광객의 열정 투어는 왜 없는 거지.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젊은이들에게 잔소리를 퍼붓는 심술궂은 노인이 되어버린다. 삼면이 바다고 위로는 북이 가로막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해외여행이 그렇게 빈번하고 심심한 일이었다고? 다들 매달 생활비가 빠져나가고도 통장에 여윳돈이 아주 넉넉한 가봐? 대부분 직업이 여행인 사람들의 이야기라 그렇겠지만 나에게는 낯설기만 한(그래서 그 책을 고르게 만들었을) ‘해마다 이맘때면 찾아오는 아이슬란드’ 따위의 글을 읽으면 마치 마음만 먹으면 떠날 수 있는 세상에서 나만 외롭게 한국을 지키고 있는 기분이다.     

 

나에게 해외여행은 여전히 호들갑 떨며 손꼽아 기다리는 큰 이벤트다. 오래 계획하고 준비해야 하는 가계를 휘청이게 만드는 소비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내 여행은 여행지에 도착하기 전 공항과 기내에서 이미 시작된다. 아니, 여권을 갱신하고, 짐을 쌀 때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특별한 순간에 감히 건너뛰기를 할 수는 법. 비행기를 탈 때면 아직도 기내 반입 금지 물품과, 공항 정보를 검색하는 나 같은 사람은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길까 무려 세 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해 출국 전의 설렘을 만끽한다. 탑승 게이트를 확인하고, 가까운 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다가도 수시로 시간을 확인한다. 작은 실수로 일생일대의 이벤트를 놓치게 될까 봐. 조금 느긋하게 있다가 허둥지둥 오래 꿈꿔왔던 것을 조급하게 해치워야 할까 봐.     

 

여행기의 시작은 대부분 그 나라에 도착한 후에 첫 페이지가 시작된다. 떠나게 된 사연과 경제적 여건 따위는 가볍게 건너뛰고서. 허둥지둥하지 않고 마치 현지인처럼 익숙하게 산책을 하고, 꽃과 빵을 사며 하루를 시작한다. 여행이 모두 그런 것 아니냐는 듯 새초롬하게. 그러면 이번에는 어리둥절한 다혈질 사내가 되어 혼자 펄쩍 뛴다. ‘기내식은! 비행기에서 먹는 식사는 중요하지 않은 거야?’ 살면서 비행기에서 밥 먹는 날이 몇 번이나 된다고. 왜 다들 기내식 따위는 쿨하게 넘겨버리고 마는지 그들이 쓰지 않고 넘긴 부분이 궁금하다. 여행 작가로 여러 나라를 자주 다니다 보면 이런 것쯤은 글감이 안 되는 걸까라는 의문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숙소를 검색할 때의 기준이나 여행 경비를 얼마나 모았다던가, 기내식에서는 생선을 선택했는지 고기를 선택했는지 알려줄 수 없나요. 나는 당신의 여행에 모든 면면이 궁금하단 말이에요.)     

 

나는 언제쯤 떠났었나... 헤아려 보니 5년 전 치앙마이가 마지막이었고 그전의 해외여행은 더 까마득했다. 캐리어를 끌고 나온 순간부터 집 밖에 처음 나온 집고양이처럼 매 순간 촉각을 곤두세운다. 여행의 모든 순간을 정면으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응시할 생각이다. 어느 것 하나 흘려보내지 않고 착실하게 저장하고 싶다. 게다가 이번에는 무려 프리미엄 이코노미를 예약하지 않았나!

이번 헬싱키 여행은 나에게 주는 보상이었으므로 이코노미 앞에 프리미엄을 붙여 주었다. 암에 걸리고 나면 많은 것에 허용적이 된다. 특히 내가 암에 걸렸는데 그까짓 프리미엄 이코노미도 못 타냐고 물으면 맥을 못 추린다. 그래서 이건 내가 나에게 하는 아주 작은 셀프 효도. 조금 넓고, 의자에 충전기도 있는 자리에 앉아 12시간을 보내는 것.

미리 블로그로 핀에어를 검색해 보니 프리미엄 이코노미 좌석은 일회용 용기대신 도자기로 된 접시에 기내식이 나온다고 했다. 내 마음 그릇이 작아 차마 비즈니스는 탈 수 없었지만 도자기 식기에 나오는 기내식이 어딘가. 그동안의 기내식은 은색 포일이 덮어져 나오거나 투명한 플라스틱 뚜껑이 덮인 일회용 용기뿐이었다. 사실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기내식이라는 특별함이 먹먹한 귀와 반쯤은 막힌 콧구멍으로 맛을 느낄 수 없는 상황에서도 입으로 쏙쏙 무사히 들어가게 했으니까. 무릇 기내식이란 맛보다 기분이지 않나. 하지만 이왕 먹는 것 제대로 된 접시에 나오는 기내식도 한 번 먹어보고 싶었다. 역시나 내가 암에 걸렸는데 접시에 나온 기내식도 못 먹어?라고 자문하면 무사통과였다.     

 

헬싱키에 머문 일주일 동안 아이들이 가장 많이 생각났던 순간도 이때였다. 비행기는 아직 제주도행 밖에 타보지 않았던 아이들은 비행기에서 주는 밥을 무척이나 궁금해했었다. 멀리 갈 때는 비행기에서 밥을 주기도 하고 메뉴를 고를 수도 있다고 얘기해 주었더니 저들끼리 쳐다보며 눈이 휘둥그레진다.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에서 음료 서비스를 받았을 때 뭘 고르면 좋을까 즐거워하던 둘째가 생각났다. 스튜어디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소중히 오렌지주스를 받아 들던 꽃잎 같던 두 손도.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기내식 사진을 찍었다. 언젠간 우리 식구 모두, 멀리 아주 멀리 떠나보자. 그때는 점심이 소화되기도 전에 저녁을 주는 기내식을 아주 배부르게 먹어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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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24.

희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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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란한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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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month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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