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창밖의 동그란 호수들
딱 한 권의 책만 가져온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는 중이다. 최대한 짐을 가볍게 하려고 두께가 있는 에세이 한 권만 가져왔는데, 일찍 도착한 공한에서 절반을 이미 잃어버렸다. 비행기에서 남은 절반을 아껴가며 시집 읽듯 천천히 곱씹었음에도 일찌감치 끝나버렸다. 10시간이 넘게 한자리에 앉아 있으려니 영 좀이 쑤신다.
평소대로라면 인천공항에서 핀란드의 반타공항까지 8시간이면 갈 것을 지금은 러시아 항공을 우회해 북극항로를 이용해 13시간에서 17시간이 걸린다. 뉴스를 통해 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내가 사는 곳과 별개의 사건처럼 한 발짝 물러나 있던 것이 사실인데, 멀리 있는 나에게도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보니 이 지구 어딘가에 정말 위험하고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뒤늦게 피부로 느껴졌다.
잠은 자도 자도 끝이 없고 시간을 때우기 위해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던 영화를 두 편이나 봤다. 화장실에 가려면 옆에 매너 좋은 외국인 청년 얼굴에 엉덩이가 닿지 않게 의자에 최대한 밀착해서 나가야 하는데 그것도 벌써 두 번 째였다. 더 이상은 그런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물도 참아가며 내 자리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중이다.
잠시 내 여행 짝꿍이 된 낯선 옆자리 남자에 대해 얘기하자면 이 사람은 비행기가 익숙한 듯보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가장 먼저 앞 자석 등받이에 수납 칸 윗부분에는 핸드폰을, 아랫부분에는 패드를 넣고 그 위에는 커다란 젤리 봉지를 척척 놓았다. 그것도 두 개나! 그 동작은 마치 들키면 안 된다는 듯 무척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아마도 그가 13시간을 버티기 위해 세운 작전은 저 패드 안에 영상과 비밀스런 달콤한 곰 젤리일 것이다.
딱히 할 것이 없던 나는 티 나지 않게 그 사람을 관찰하며 시간을 보냈다. 예의가 아닌 줄 알았지만 더이상 잠도 안 오고 달리할 게 없었다. 그 사람은 기내에서 제공하는 헤드폰이 아닌 자신의 것을 썼다. 패드에서는 흑백 영상이 재생됐는데 언뜻 보니 푸틴 같아 보였다. 그도 8시간에서 13시간이 되어버린 긴 비행 시간의 주범 다큐멘터리를 보며 전쟁을 탓하려는 것일까. 시간이 지나자 그의 가방에서는 이클립스와 멘토스가 나왔고 그건 핸드폰을 넣은 윗부분에 자리 잡았다. 내가 헤드폰 끼는 곳을 헤매자 자신의 의자를 보여주며 손짓으로 알려주던 것만 보아도 배려심 있는 사람이구나 했는데, 깔끔하기까지 하다니! 아주 훌륭한 여행 짝꿍을 만난 것 같아 안심이었다.
살짝 독특하다고 생각한 건 이 사람이 젤리 곰을 먹는 모습이었다. 다소 근육질의 덩치가 좋았던 남자는 앞좌석 등받이 안으로 손을 넣고 어렵게 뜯더니 한 움큼 꺼내 빠르게 입안으로 넣었다. 주먹 안에 있는 것이 보이지 않도록 손에 꼬옥 쥔 채로. 편하게 먹어도 되는 걸 왜 그랬을까? 곰 젤리를 집어먹는 우람한 팔 근육의 어른이라는 것이 조금 쑥스러웠을까? 아니면 내가 하나 달라고 할까 봐 그랬나.
만약 영어를 할 줄 알았다면 ‘당신 내 7살짜리 딸과 여행할 때 필요한 간식이 똑같은데?’라며 웃으며 한마디 건넸을 것이다. 나이가 들고 나서는 모르는 사람에게 자꾸 말을 걸고 싶어져서 큰일이다. 조용히 모른 척 있는 것보다 눈 한번 마주치고 말 한 번 섞으며 주변의 공기를 덥히는 편이 더 사람 사는 맛 같달까.
처음 보는 이웃이 꽃을 한 움큼 사서 엘리베이터를 타면 어디서 사셨냐며 괜찮은 꽃집 좀 알려달라 말을 걸기도 하고, 빵집에서 저쪽에도 출구가 있나 혼잣말을 하는 할머니께 ‘네 저쪽에도 있어요. 자동문이라서 더 편하실 거예요.’ 입을 꾹 닫고 있는 점원 대신 나서는 오지랖 넓은 손님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내 영어실력으로 농담이라니 가당치 않아서 가만히 있다가 아쉽지만 이렇게 그때의 마음을 뒤늦게 글로 대신한다.
식사할 때 보니 옆자리 여행 짝꿍은 배려심 많은 사람인 게 확실했다. 손잡이에서 테이블을 꺼내며 혹시나 내 자리를 침범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신중을 넘어 불편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나 역시 별다르지 않은 속도와 자세로 조심히 테이블을 꺼내며 생각했다. 아마도 이 사람 역시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이 자리를 고른 게 아닐까. 뒷사람이 불편할까 봐 등받이를 젖히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리를 뻗는 편리보다 차리라 편안한 마음이길 선호하는 사람 말이다. 우리 자리는 프리미엄 이코노미 가장 뒷자리였는데 앞에는 승객이 있었지만 맨 뒤는 벽이라 의자를 눈치 보지 않고 뒤로 젖힐 수 있었다. 다리를 쭉 펼 수 있는 앞자리와 이 자리를 놓고 고민하다 나는 지금의 자리를 선택했는데 아마도 이 사람도 그런 성향이 아닐까 상상해 봤다.
궁금하지 않았던 영화를 어쩔 수 없는 마음으로 한 편 더 보고, 노트에 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담긴 짧은 글을 여러 편 쓰고, 5분에 한 번씩 깼지만 잠들려고 노력했던 시간이 드디어 끝나간다. 창문을 열어보니 눈이 부시게 맑은 날씨.
핀란드에 가서 알게 되었는데 핀란드 사람들은 자국을 Suomi 수오미라고 불렀다. 의미를 찾아보면 그 어원은 명확하게 밝혀있지 않으나 핀란드어로 suo는 숲 mi는 호수라는 뜻이라고 했다. 그러니 숲과 호수의 나라라는 의미 정도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핀란드에는 18만 개가 넘는 호수가 있고 국토의 75%가 숲이라니 썩 잘 어울리는 이름 같았다. 창밖을 보니 호수의 나라답게 초록색 땅과 동그란 호수들이 눈에 띄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초록색 종이 위에 콕콕 빛나는 도장을 찍어 놓은 것 같다.
떠날 때와 전혀 다른 창밖 풍경을 보니 그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정말 도착했단 말이지, 헬싱키에.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희정입니다.
가정의 달 잘 보내셨나요? 아이들의 즐거움과 부모님의 기쁨 사이에서 자식도 되었다 부모도 되느라 힘드셨으리라 짐작합니다. 저도 연휴 끝에는 몸살 감기를 앓았어요. 이제 조금 회복이 되어 다시 산책을 즐기고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5월부터는 유료 구독이었던 뉴스레터를 무료로 전환했습니다. 마음 편히 읽어주시고 여기저기 알려주세요. 다음 편은 드디어 헬싱키에서의 첫 날 입니다!
또 편지할게요.
25.5.14.
희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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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inwi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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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마흔
이제야 겨우 도착했습니다. 시간 순으로 쓰려다 보니. ㅎㅎㅎ 저도 쓰면서 검색해 봤는데 그 이야기도 있더라고요. 정확한 뜻은 모르지만 어떤 어원이어도 다 핀란드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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