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모든 게 낯선, 오늘의 카페
공항에서 내려 헬싱키 역에 도착했을 때 시골쥐처럼 살짝 얼어버렸다. 캐리어 하나와 백팩을 메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서 있는, 그러면서도 설렘을 감추지 못하는 마흔 살의 시골쥐. 우리나라 서울역과 비슷한 헬싱키 역에서 빠져나와, 제 갈 길 바쁜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잠시 멍하니 지켜보았다.
헬싱키에 도착한 나의 첫 감상은 생각보다 너무 도시스럽다는 거였다. 아무리 별다른 사전 조사 없이 떠난 여행이라지만 헬싱키를 너무 시골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배우들이 떠난 핀란드의 어느 셋방처럼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집에서 숲으로 물을 길러 가는 모습까지는 아닐지라도 이렇게 번화한 모습일 줄이야. 물론 나홀로 첫 해외여행이라 움직이기 좋은 시내 한복판에 숙소를 잡아 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머릿속에 그려오던 핀란드의 이미지가 있지 않나. 숲과 호수, 나무로 된 별장과 사우나 같은 것들.
나는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아르데코 풍의 쇼핑몰과 땅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주워서 후후 불어 피는 젊은이를 보고도 짐짓 놀라지 않은 척 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겨야 했다. 빠르게 달리는 자전거를 피해서. 나홀로 해외여행이 처음인 시골쥐라는 걸 티내지 않으려는 듯 씩씩하게. 길을 찾으려고 두리번 거리느라 자전거 도로를 침범하지 않도록 이 거리와 사람들에 서둘러 적응하고 싶었다.
그렇게 헬싱키를 바라왔던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모를 수 있겠나 싶겠지만, 내가 이곳에서 바라는 것은 오직 혼자만의 시간과 좋아하는 예술가의 작품과 조우하는 것 두 가지뿐이었다. 한국에서 알아본 것이라고는 미리 예약한 숙소 두 곳, 헬싱키 중앙 도서관 Oodi, 현대 미술관 Amos Rex가 전부다. 마흔의 여름방학에 미술관과 도서관을 걸으며 하루를 보내는 것 외에 딱히 뭐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일주일 치 여행 짐도 떠나기 하루 전에야 주섬주섬 담기 시작했다. 잠옷으로 입을 수 있는 실내복 바지와 반팔 티셔츠 하나, 해외에 나가는 거니까 용기내서 집어든 검은색 민소매티, 흰색 반팔 셔츠, 외투처럼 입을 수 있는 도톰한 셔츠와 청바지 하나가 전부였다. 팬티와 속옷은 빨아 입을 생각으로 세 개씩. 화장은 하지 않으니 작은 로션 한 개와 헤어 오일이 내 캐리어 속 짐의 전부였다.
평소의 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가족들과 2박 3일 여행을 가도 한 달 살이는 거뜬하게 준비하는 사람이니까. 혹시 모를 날씨 변화를 대비해 얇은 옷부터 외투, 해열제와 안약, 알레르기약까지 당장 구급 대원을 부르지 않아도 괜찮을 정도로 챙긴다. 아마 내 여행 가방만 본다면 단단히 준비해야 할 지병이 있는 사람의 이민 가방이라 추측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아이들과 함께 여행 갈 때는 평점 좋은 식당부터 비 오는 날 가기 좋은 실내, 혹시 모를 비상사태를 대비해 주말에 여는 병원까지 저장해서 구글 지도에 빽빽이 깃발을 꽂아 두면서 이번 여행은 이상하리만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떠나기 전부터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까지 애쓰고 싶지 않았다. 설령 그게 나를 위한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며 즉흥적인 사람이 아이를 낳으면 어디까지 계획적으로 되는지 깨달았다. 결혼하기 전에는 바다가 보고 싶으면 아무 기차나 타고 내려가 찜질방 모텔이든 발길 닿는대서 자곤 했었는데 그런 기백은 나이가 들며 조금씩 사그라들더니 이제는 원래 내가 얼마나 무모하고 용감했었는지 전생처럼 아득하다. 이번 여행은 그때의 나를 슬쩍 들춰 불러보는 기회일지도. 돌보고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아진 만큼 두려운 것들이 많아진 40대의 내가, 잠시 겁 없이 홀홀 잘도 떠나던 20대의 나를 소환한다.
겁쟁이 시골쥐가 여행지에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구글맵뿐이었다. 우선은 지도를 켜고 한 손에는 핸드폰을 다른 한 손에는 캐리어를 끌고 숙소부터 찾아 나선다. 마음 같아서는 어서 여행자 티를 벗고 가벼운 몸으로 현지인처럼 걷고 싶었다. 하지만 숙소로 가는 길이 핸드폰 지도와 길만 보기엔 유혹이 너무 많았다. 모든 게 낯선 이 풍경은 어느 정도의 두려움을 품고도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아 나는 이런 것들을 보려고 여기까지 왔지. 매일 보던 풍경과 멀어져 새로운 길을 보고, 익숙하지 않은 가로수와 이국의 사람들과 짧은 눈 인사를 위해서.
13시간 비행의 고단함과 내 손에 들고 있는 짐스러운 것들의 무게를 알고도 도저히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들어가고 싶은 빈티지 숍을 발견하고는 참지 못해 잠시 들러 한눈을 팔았다. 한국에는 가져갈 수 없는 거대하고 멋진 조명과 두껍고 무거운 화병들을 보며 잠시 감탄하고 서둘러 인사를 하고 나온다.
보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지만 서두르지 말자. 지금 내 발아래에는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레드 카펫처럼 펼쳐져 있으니까. 남은 시간들이 크리스마스 아침에 트리 아래 기다리고 있는 선물상자처럼 얌전하게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주어진 선물을 하나하나 신중하게 열어 볼 충분한 시간이 있지.
아직 체크인 전까지 시간이 남아서 숙소 근처 카페부터 찾았다. 엘사처럼 머리를 옆으로 땋은 백금발의 직원에게 시나몬롤과 라테 한 잔을 주문하고는 테라스에 자리에 앉는다. 내 왼쪽에는 노트북을 하고 있는 남자가, 오른쪽에는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여자가 있었다. 당연하게도 모두가 외국인이라는 것이 새삼 이상하다. 반나절 전에는 아이들과 시외버스 터미널 앞 카페에서 도넛을 나눠 먹으며 ‘엄마 잘 다녀올게’ 인사했는데. 지금은 7,030km를 날아 헬싱키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니.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희정입니다.
5월의 마지막 뉴스레터는 드디어 헬싱키에 도착한 첫날 이야기 입니다. 이날의 설렘과 약간의 두려움, 잘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천천히 헬싱키에서 보낸 날들을 전해드릴게요. 이번 편지부터는 사진도 함께 보냅니다. 제가 본 풍경을 함께 나눠요.
그럼 건강하게 6월에 다시 만나요.
25.5.30
희정 드림
💌문화다방 소식
매주 목요일 광화문 책방연희에서 엄마들의 글쓰기 수업이 있었습니다. <일상과 에세이 :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글쓰기> 였는 데요 참 따뜻한 분들과 4주 동안 무척 행복했어요. 무엇보다 배우러 오는 분들과 가르치는 저까지 이 좋은 계절에 한 주에 한 번씩 광화문으로 나들이 오는 것 자체가 좋았던 것 같습니다.
6월 12일 2기 수업을 시작합니다. 글쓰기가 처음인 초보나 쓰는 방법을 배워본 적이 없는 분들을 위한 수업이에요. 관심 있는 분들은 책방연희로 연락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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