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의 여름방학

1-5 나를 잘 아는 나이

마흔의 여름방학 : 헬싱키에서 보낸 일주일

2025.04.14 | 조회 250 |
0
|
아주 사적인 마흔의 프로필 이미지

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1-5 나를 잘 아는 나이

 

 

제주에 사는 지인이 기념할 것도 없던 어느 날 립스틱 하나를 선물했다. ‘왜 할머니들이 입술만 빨갛게 하고 다니는지 알겠더라.’ 나이 드니까 입술이라도 찍어 바르지 않으면 너무 초라해 보인다고 했다. 화장은 하지 않지만 이왕 선물 받은 것이니 고맙게 받아 가방에 넣어왔다.

그 후로 나는 선크림은 바르지 않으면서 립스틱은 다섯 개나 갖고 있는 사람으로 진화했다. 정확하게는 아주 옅게 색이 들어간 립밤인데 무색부터 코랄과 로즈핑크 피치에 레드까지 아주 욕심쟁이가 되어버렸다. 립밤은 꼭 있어야 할 곳에 한 개씩 두었다. 화장실에 하나, 파우치에 하나, 자주 쓰는 가방 앞주머니에 하나, 주방 옆 자동차 키를 두는 곳, 비염 스프레이 옆에도 하나. 입술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고는 밖에 나가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엿보일 정도로 색색의 립밤은 내가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틀림없이 있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눈썹도 안 그리고 다니는 사람이 립밤은 열심히 바르는 부조화가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제 생일선물로 갖고 싶은 게 있냐고 물으면 고민하지 않고 립밤 아니면 핸드크림을 외치는 사람이다. 핸드크림이나 립밤이나 쓰임은 같다. 내가 이걸 발랐다는 것을 나만 아는 만족감이 좋다. 예뻐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입술과 내 손을 위해서 향긋하고 부드러운 것을 바르는 행위 자체에 빠져버린 것이다.

 

곱슬머리를 좋아하게 된 것도 마흔이 되어서부터다. 스트레이트 펌이라는 것이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나는 기꺼이 삼각김밥과 최양락이라는 별명을 감수하고도 곱슬머리로 지내길 거부했다. 차라리 놀림받는 편이 나았다. 매직이 나온 후에는 뻗뻗한 생머리가 그나마 봐줄만 해졌지만 한 번 미용실에 가면 허리가 아플 정도로 앉아있어야 했던 시간이 꽤 길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왜 곱슬로 태어나 미용실 의자에서 인생에 반을 보내고 있어야 하나 한탄스러웠다. 미용실에 갈 때마다 죄지은 것도 없으면서 심한 곱슬에 숱까지 많은 내 머리털을 미안해하는 것도 지겨웠다.

어느 날 갑자기 시술했던 머리를 뎅강 잘라버리고 짧게 새로 시작했다. 그냥 살자. 예쁘면 예쁜 대로 아니면 아닌 대로. 아마도 중년의 마법이었으리라. 어느 정도는 놓아버리게 되는 편안함. 놀라운 것은 그래도 생각만큼 거지 같지는 않았다는 거다. 물론 친정엄마는 나를 만날 때마다 그 머리 좀 어떻게 하라고 하시고, 친구들은 너 생머리일 때가 훨씬 어려 보인다고 직언을 해주지만. 어찌 됐든 나는 이 사자 같은 머리를 받아들이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예전에는 해외여행을 갈 때 면세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딱히 뭘 사고 싶은 것은 없었다. 정확히는 없었다기 보다 다 사고 싶었다는 말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 평소에는 언감생심 엄두도 못내는 명품들을 이럴 때라도 사야 할 것 같아 조바심이 들었으니까.

이번 여행에서 나는 면세점을 통과해 바로 게이트 앞 카페로 향했다. 커피 한 잔을 사서 책이나 읽으며 남은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다. 20대 초반에 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잘 몰랐다. 많은 걸 욕망하고 꿈꾸면서도 그게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인지 헷갈렸다. 그렇게 버린 돈이 꽤 될 것이다. 젊었을 땐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기 위해 가짜 소비를 한다. 그리고 한 살 두 살 나이가 들면서 나에 대해 잘 알게 되고나서야 진짜 가치 있는 소비를 시작한다. 

나는 이제 면세점에서 파는 것들이 나의 욕망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잘 안다. 뜻밖의 큰돈이 생겼을 때, 나는 명품 가방 대신 비행기 티켓을 사는 사람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을 사고 싶어 돈을 모은 적은 있어도 명품을 사기 위해 모은 적은 없었다. 이제 이 아름답고 우아한 것들은 그것대로 어울리는 사람들을 위해 반짝이게 두고 나는 내가 바라보는 방향에 집중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명확히 알고 나서 떠나는 여행은 복잡하지 않다. 여행을 마치고 주변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뿌리기 위해 기념품을 사는 소비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돌아오는 날 반타공항에서도 핀란드에 오면 다 산다는 Fazer 초콜릿도 사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야 조금 서운할 수 있지만, 정말 가까운 사람들은 내가 그들에게 바랬듯 최대한 즐기다 가볍게 돌아오길 바라므로 이해해 줄 것이다.

프리마켓과 디자인 가구, 빈티지 물건들의 천국인 헬싱키에서 여행 중에도 내 지갑은 정확히 나의 취향과 꼭 들어맞을 때만 열렸고 그건 내 여행을 아주 심플하게 만들었다. 물건을 앞에 두고 살까 말까 우왕좌왕할 필요가 없으니 불필요한 시간을 줄일 수 있었고, 무거운 짐을 들고 걸어 다닐 필요도 없었다. 기분 좋은 변화였다.

 

 


📣문화다방 소식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불행에도 내 순서가 찾아왔습니다.

상처가 두렵지 않을 스카프를 두르고서 모두 잘 지내요.

<갑상선암에 걸리면 스카프 쇼핑부터 하는 게 좋다> 中

 


 

올해처럼 벚꽃을 열심히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벚꽃이 피기 전부터 꽃비가 내리는 오늘까지 거의 매일 의식처럼 걸어 다녔어요. 비록 해가 쨍쨍하지 않더라도, 멀리 나가지 못하더라도요. 올해의 풍경을 이듬해도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비관적이지 않은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감사히 여기며 요란한 날씨의 봄날을 즐기시길 바랄게요.​

그리고 제 책이 나왔답니다. 여전히 제 책이 나왔다는 건 홍보하기가 어려워요. 마음이 동하다면 읽어주셔요. 대부분 마흔일기에 썼던 글이지만요. 책 제목으로 태그를 달아주시면 인스타도 놀러 가고, 블로그도 놀러 갈게요. 지금 태그에 제가 올린 것 밖에 없어서 좀 민망해 하고 있다는 인사를 드리며...ㅎㅎ

아무튼 우리, 남은 봄을 악착같이 즐겨요.

 

25. 4. 14

희정 드림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아주 사적인 마흔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5 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메일리 로고

도움말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로10길 6, 11층 1109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