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는 말들

11. 산책하는 말들 / 겁쟁이

아프고 싶지 않아 지워버리는 사람

2024.10.29 | 조회 3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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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11. 산책하는 말들 / 겁쟁이

아프고 싶지 않아 지워버리는 사람

 

 

인터넷에 아무리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일을 당해본 적이 있는지. 나는 있다.

삼성생명에서 보험금이 과지급 되었으니 천사백만 원을 회수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내가 갖고 있는 보험 중 하나가 5년 부담보인데 계약 후 4년이 조금 지난 시점이라 지급되지 않았어야 할 돈이 나갔다는 거다. 보험 설계사에게 설명을 듣기로 직원의 실수가 감사팀에서 뒤늦게 발견된 모양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이런 적은 처음이라고 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보험금 지급 다음 날이나, 하다못해 한 달 후도 아니고 지금은 무려 6개월이 지난 시점이 아닌가. 전세 계약금으로 한 뭉텅이, 대출을 갚는데 한 뭉텅이가 나가고 남아있는 알량한 보험금은 다음 달 이사 잔금에 보탤 계획이었다. 

 

가장 황당한 것은 지금 이 현실보다 믿기지 않는 담당자의 고압적인 자세였다. 회수하는 것이 맞고 의사를 얘기하면 자기는 보고하면 끝이라는 말이 반 협박처럼 들렸다. 좀처럼 목소리가 커진 적 없는데 당황해서 저절로 소리가 높아졌다.

누가 그 큰돈을 바로 돌려줄 수 있냐 물었더니 돈 많은 사람은 그렇다는 비아냥이 돌아왔다. 당장 다음 달이 이사라 어렵다는 얘기를 했더니 이사 비용을 왜 자기한테 얘기하냐고 되묻는다. 중간중간 말문이 막혀 입을 꼭 다물다가도 너무 억울해서 아무 말이나 튀어나왔다. 

 ‘이 사람… 지금 나한테 미안해야 되는 거 아닌가?’ 말을 하는 내내 자신의 실수로 곤란을 겪게된 환자의 황망함을 헤아리려는 노력은 조금도 없는 그의 태도가 믿기지 않아 현실감 없는 첫 통화였다.

아주 솔직하게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을 때보다 더 심장이 두근거렸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돈이야 원래 내가 받아야 했던 것이 아니라니 절차대로 돌려주면 될 것이다. 그런데 직원의 실수로 회사에 끼친 손해를 왜 고객에게 전가하는 느낌일까. 줄 때는 그렇게 깐깐하게 하면서 받아 갈 때는 또 뭐가 이렇게 쉽고 당당한가. 아무 잘 못도 없는 내가 왜 이 사람과 언성을 높이며 통화를 하고 있는 걸까. 달라고 하지도 않은 돈을 줘놓고 졸지에 천사백만 원 빚쟁이가 되었다.

 

수술 후 스트레스받지 않으려 노력했던 내 모든 지난날은 가장 큰 위기를 맞았다. 전화 통화를 한 그날부터 두통이 생겼다. 억울한 마음이 들어 약은 먹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보낼 것 어서 보내고 편해지자 생각하다가도 사과를 받아야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주변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어차피 줘야 하는 거라면 별 수 있냐는 사람들과 그걸 왜 돌려주냐고 소송 걸라고 하라고 나보다 더 열을 올려주는 이도 있었다. 소송이라니 끔찍했다. 

내가 얼마나 유약하고 겁이 많은 사람인지는 스스로 잘 알고 있다. 나는 소송 같은 것을 하면 이긴다 한들 무너질 것이다. 나는 아프고 싶지 않아 지워버리는 사람이다. 싸우고 싶지 않아 사과하는 사람이다. 화내고 싶지 않아 친절한 사람이다. 그런 내가 이 무례한 사람과 또 몇 번의 통화를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비자 보호원에서는 이미 지급한 보험금을 보험사에서 강제로 가져갈 수는 없으며 고객이 돌려주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포기를 할 수도, 소송을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정답은 없고 선택의 문제처럼 들려 혼란스러웠다.

손해사정사와의 상담에서는 우선은 보험회사에 보험금 지급 오류에 대한 내용을 공문으로 발송해 달라고 해서 정확한 내막을 확인해 보고, 그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라고 했다. 그리고 그 후 보험금 지급, 부지급 여부를 금감원에 물어보거나 민원 제기하면 된다고.

분명 이해가 어려운 문장은 아닌데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다 오류, 공문, 내막, 금감원, 민원 낯선 이 단어들과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세 번째 인가 네 번째 통화해서 나는 그 직원의 싱거운 사과를 받고 돈을 돌려주겠다고 했다. 당장은 어려우니 11월 초에 다시 연락하라고 말하고 드디어 두통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다시 내 지인들은 빨리 끝내고 마음 편하게 지내라는 쪽과 미쳤냐고 날뛰는 쪽으로 나뉘었다. 천사백 대출 이자라도 받아내거나 아니면 무슨 선물 같은 거라도 받아야 한다고 길길이 화를 냈다. 

언제부턴가 내 꿈은 일희일비하는 사람이 되었는데 지금부터 극대노 할 줄 아는 인간이 되는 것을 추가한다. 한 번 폭발해 보고 싶다. 그러면 나 암 같은 건 안 걸리고 마음속에 응어리 진 것 없이 속 편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구독자님 잘 지내셨어요?

한동안 제 마음을 시끄럽게 했던 일에 대해 썼습니다. 바보같고 한심한 이야기죠. 소리 한 번 꽥! 지르고 당장 사과하세요! 뭐가 그렇게 당당해 당신! 하고 싶지만 저는 마지막 통화에서도 당황하지 않으려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종이에 적고 읽었답니다. 불안을 줄이려 밖에서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서요. 

다음 편지는 11월이 되겠네요. 구독자님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4. 10. 29

살면서 별 일 없기를 바라는 겁쟁이. 희정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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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함의 프로필 이미지

    다함

    0
    about 1 year 전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ㄴ 답글 (1)
  • woody의 프로필 이미지

    woody

    0
    12 months 전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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