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의 여름방학

3-4 겁쟁이의 밤

여름방학 : 헬싱키에서 보낸 일주일

2025.10.18 | 조회 188 |
0
|
아주 사적인 마흔의 프로필 이미지

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겁쟁이의 밤

 

 

헬싱키에 도착하고 숙소에 짐을 푼 다음, 가장 먼저 한 일은 사실 뜨개 실을 파는 상점에 가는 거였다. 갑자기 많아진 여유 시간을 채울 소일거리가 필요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가까운 쉼을 위해 할 거리가 필요한 법이다.

 

구글 지도를 검색해 보니 다행히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실을 파는 곳이 있었다. 헬싱키 시내는 멀어봤자 걸어서 한 시간이면 어디든 갈 수 있어서 꽤 멀리 나갈 준비를 했으니 마침 속소 가까이에 있다니. 여행 중에는 이런 사소한 행운도 우주가 나를 돕는 좋은 신호 같다. 오늘도 마음껏 착각하며 즐겨야지.

걷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헬싱키는 최적의 도시다. 트램을 이용해도 좋지만 어디든 걸어서 갈 수 있는 도시라니 매력적일 수밖에. 또 산책로가 없는 숲에서는 자유로움보다 겁부터 집어먹는 나 같은 도시 산책자에게는 딱 이 정도의 호수와 공원을 통해 경험하는 자연이 안전하게 느껴진다.

 

숙소에서 나와 두 블록 거리 이름도 발음하기 어려운 손뜨개 실 상점 Lankakauppa Snurre에 도착했다(헬싱키에 다녀온 후 틈틈이 핀란드어를 배우고 있는데 그때는 외계어 같았던 상점의 이름을 비슷하게 발음해 보자면 랑카까우파 슈노레에 가깝다). 색색의 아름다운 뜨개 실은 보는 것만으로도 컬러테라피 효과가 있는지 구경을 하는 데 이미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아마도 코바늘 기초에 머무르는 실력임에도 굳이 헬싱키에까지 와서 뜨개를 하겠다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테지. 포근하고 보드라운 색색의 실을 조물조물 만져서 무언가 쓰임이 있는 걸 만들어 내는 뿌듯함. 그게 겨우 컵 받침이나 화분 받침 일뿐이라도 괜찮은 건 실의 색과 촉감 덕분일 거다.

 

굳이 직원에게 이 나라에서 만든 실이 맞는지 확인하고 뜨개실 몇 개를 선물용으로 구입했다. 내가 지금까지 선물 받은 뜨개 가방과 아이의 머리핀이 몇 개였던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여럿이다. 나를 위한 뜨개 실도 하나 샀다. 헬싱키라서 그런지 푸른색이 눈에 들어와 집어 들었는데 프롬 인디아. 나는 인도의 패브릭과 실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편인데 역시나 내 눈은 헬싱키에 와서도 인도의 염색실을 찾아내고 만다. 뭐 어떠랴. 나에게는 이 실이 두고두고 헬싱키를 떠올리게 할 텐데.

그날부터 집에서 챙겨온 코바늘과 푸른색 실은 내 밤 친구가 되어주었다. 낯선 곳에서의 밤은 백야의 여름이라도 어딘지 공포스러운 부분이 있었고, 특히나 겁 많은 나에게는 어둡지 않은 밤이라 해도 무섭긴 마찬가지였다. 대학시절 자취를 했던 1년 동안은 밤새 티브이를 틀어놓고 잤을 정도니까.

 

하루를 마감하고 돌아와 잘 시간이 되면 그 두려움을 이겨내려 뭐라도 해야 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책은 벌써 다 읽었고, 별수 없이 유튜브를 틀고 코바늘을 들었다. 실 한 덩이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침대에 앉아 잠이 찾아오길 기다리며 손을 움직인다.

사람들은 유튜브 참 많이도 보던데 다들 뭘 보며 그렇게 즐거워 하나. 친구 몇몇에게 좋아하는 채널을 물어봤지만 두어 번 찾아보고는 흥미가 생기지 않아 그만두었다. 무한도전을 보고 자란 탓에 하는 수 없이 좋아하던 연예인의 채널을 찾아 틀었다.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사람이 사건 사고에 휘말리지 않고 여전히 반듯한 사람으로 남아있는 건 참 다행인 일. 여전한 티브이 속 유재석 님을 보면 웃고 떠들던 내 과거의 시간들이 몰려온다. 눈물을 소매로 찍어내며 웃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함께 웃으며 잠시 대범한 사람인 양 흉내 내는 밤. 의식하지 않아도 익숙하게 움직이고 있는 코바늘과 실은 날마다 조금씩 원의 크기를 키워 나갔다.

 

혼자 떠나는 여행을 고민하고 있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고백하자면 나는 여행 기간 내내 현관문 앞에 의자를 괴어놓고 잤다. 의자 끝에는 떨어지면 쨍그랑 소리를 낼 포크나 수저를 아슬아슬하게 올려두고서. 의자의 용도는 누군가 방 문을 잡고 흔들거나 연다면 바로 알아채고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래봤자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 할 것 같았지만. 타고난 상상력을 더해 극단적으로 과장해 말하자면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자다 죽고 싶지는 않았다.

여행을 다녀와서 문 앞에 수저가 올려진 의자 사진을 본 친구들은 이런 겁보가 어떻게 혼자 여행을 다녀온 거냐며 놀리며 한 편으로는 놀라워했다. 그럼에도 이 얘기를 하는 건 나처럼 혼자 멀리 떠나는 여행이 두려운 사람들이 주저하고 있을까봐. 나같은 마흔의 쫄보 겁보도 밤마다 무서움에 떨면서, 막상 아침에는 개운하게 침대에서 일어났다고 말해주고 싶다. 겁이야 나겠지만 오길 잘했다 뿌듯한 순간들이 더 많을 거라고 등 떠밀어 주고 싶다.

 

첨부 이미지
첨부 이미지

 

첨부 이미지
첨부 이미지
첨부 이미지

 

첨부 이미지
첨부 이미지
첨부 이미지
첨부 이미지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희정입니다.

10월 중순인데 이제야 10월의 첫 편지를 보내네요. 헬싱키에서 저는 무척 행복한 날들을 보낸 것 같지만 사실은 밤마다 이렇게 두려움에 떨었답니다. 그러고는 아침이면 다시 씩씩하게 의자를 괴어놨던 문을 열고 나가 신나게 걸어 다녔지요. 여행이 아니더라도 하고 싶은 무언가를 망설이는 분들께 응원의 글이 되는 편지이길 바랍니다.

이 가을이 더 가기 전에 또 편지할게요. 건강하세요.

25. 10.18

희정 드림

 

 

 

 


💌문화다방 소식

9월에 집 근처에 작업실을 얻었습니다. 제 공간에 대한 욕심이 많은 편이라 이사를 오고 틈틈이 기회만 노리다 드디어 저질러 버렸어요. 평소에는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골방 같은 곳이고 저는 거기 앉아 정말 글만 쓰다 오지만 혹시나 이곳이 궁금한 분들이 계실까 싶어 일주일 동안 활짝 문을 엽니다. 

저를 만나러 오셔도 되고, 작업실을 한 시간 동안 온전히 누리며 가실 수도 있어요. 행궁동의 가을을 느끼러 오셔도 좋고요. 오픈하는 날과 마감하는 날 프로그램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관심 있는 분은 인스타그램 dm으로 신청해 주세요. 

 

첨부 이미지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아주 사적인 마흔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5 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메일리 로고

도움말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로10길 6, 11층 1109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