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의 여름방학

2-5 마리메꼬 가방을 멘 사람들

마흔의 여름방학 : 헬싱키에서 보낸 일주일

2025.07.31 | 조회 189 |
0
|
아주 사적인 마흔의 프로필 이미지

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마리메꼬 가방을 멘 사람들

 

 

헬싱키 거리를 걷다 보면 마리메꼬를 입거나 멘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노인부터 젊은 층까지 컬러풀한 마리메코 특유의 패턴과 커다란 폰트의 에코백이 유독 눈에 띄었다. 패션부터 자동차까지 흰색과 검은색이 대부분인 우리나라에 있다 여기 오니, 사용할 수 있는 팔레트의 색이 늘어난 기분이랄까. 조금 다른 내가 되어도 괜찮을 것 같고, 화려하거나 촌스러워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여기는 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내 나이나 평소의 스타일 같은 것을 따지며 왈가왈부할 사람은 없다는 점은 작은 용기를 불러들였다. 평소라면 잘 입지 않는 민소매를 입고 사자 갈기처럼 부푼 곱슬머리를 질끈 묶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큰 보폭으로 걸을 때마다 겨드랑이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었다. 머리 좀 어떻게 하라며 꼭 한 소리 듣던 숱 많은 곱슬머리도 제멋대로 나부꼈다. 소심한 자유가 이렇게나 기분을 바꿀 줄이야.

팔뚝이 날씬하지 않아도, 머리칼이 찰랑거리지 않아도 괜찮았다. 걷다가 유리창에 비치는 낯선 나를 보면 흠칫 놀라긴 했지만,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어깨와 등을 스치며 리듬 있게 움직이는 것도 그것 나름대로 괜찮아 보였다. 겨우 그 정도의 변화로 나는 마치 아주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홀가분 해졌다. 이것 또한 낯선 곳에 나를 던져 알게 된 새로운 모습이었다.

 

 

길거리에서 마리메꼬 가방을 멘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치며, 핀란드에 왔으니 한 번쯤은 마리메꼬를 구경해야 하지 않을까 의무감이 들었다. 매장이 많아서 따로 지도를 보고 찾을 필요도 없었다. 꾸미는 데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나만 몰랐던 사실인지 처음 들어간 마리메꼬 매장에서 했던 생각은 ‘생각보다 비싸다’와 ‘생각보다 예쁘다’였다. 특히 지금 내 나이에 입기 좋은 옷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리를 조이지 않은 원피스 형태와 과감한 패턴과 컬러가 편안하면서도 경쾌했다. 

헬싱키에 왔으니 기념으로 원피스를 한 번 사면 어떨까. 마음에 드는 옷 몇 개를 들고 거울 앞에 한 번 섰다가 가격표를 확인하고 다시 걸어두기를 몇 번 반복하다 끝내 빈손으로 나왔다. 평소에도 잘하지 않는 쇼핑을 해외에서 하려니 역시.

 

핀란드 하면 떠오르는 패브릭 브랜드가 하나 더 있다면 요한나 글릭센일 것이다. 떠나기 전에는 아름답게 직조된 요한나 글릭센 쿠션을 사 오자 마음먹기도 했었다. 이사 오며 새로 구입한 초록색 소파에 올려두면 쓰는 내내 이곳을 떠올릴 수 있겠지. 하지만 이곳에서도 내 지갑은 열리지 않았다.

매장에 들어간 나는 가격표를 보고 깜짝 놀라 목표를 더 작은 크기로 줄였다. 그렇다면 작은 토트백? 다시 가격표를 보고 목표를 더 작게 수정했다. 테이블 매트라면 어떨까? 다시 수정해서 그렇다면 파우치? 겨우 구입할 수 있는 가격까지 내려왔을 때는 평소에 쓰지도 않고 살 생각도 없었던 동전지갑뿐이라 하는 수없이 매장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대신 눈으로 많이 봐 두었다. 헬싱키에서 내가 다시 마리메꼬나 요한나 글릭센 매장을 구경하는 일은 쉽게 다시 찾아오지 않을테니까. 이렇게 아름다운 물건을 매일 보는 사람들의 미감은 어떨까, 어릴 때는 루브르 같은 곳으로 소풍을 다니는 프랑스의 초등학생들은 커서 어떤 사람이 되려나 궁금했던 때가 있다. 미술대학에 진하가고 나서는 더욱더 내가 소원하던 곳을 동네 마실 삼아 갈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떨까 자주 부러웠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그곳에 있다. 아름다운 곳에. 소원하던 곳에.

 

우선은 눈에 많이 담아 두 자. 일주일 동안은 여기가 내 동네니까. 내가 지금 이곳에 있는 것 자체를 누리자. 소장하지 않아도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믿는다. 그 후로 길에서 만나는 컬라플한 헬싱키의 사람들을 자주 사진에 담았다. 무채색이었던 내 세계에 색감을 더해주던 사람들을 기억하고 싶다. 결국 일상으로 돌아간 후에 나는 매장에서 본 반짝이는 새 옷이나 물건보다 이 거리의 풍경과 사람들을 그리워할 테니.  

 

첨부 이미지
첨부 이미지
첨부 이미지
첨부 이미지
첨부 이미지
첨부 이미지
첨부 이미지

 


 

안녕하세요. 희정입니다.

저번 메일에 뒤늦게 찾아온 장마가 반가워 경거망동 해놓고 수해 소식이 들릴 때마다 얼마나 후회했는지요. 역시 말조심, 글 조심을 해야 하는데 어쩐지 뉴스레터는 조금 친근한 마음에 가볍게 써버렸어요. 혹시나 장마로 피해를 입으셨거나 힘든 일을 당하셨다면 제 마지막 인사에 마음 상하셨을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저는 지금 공주에 있어요. 관광지와는 조금 떨어진 유구읍이라는 농촌인데 여기도 비 피해가 많았는지 곳곳에 길과 담이 무너져 마음이 따끔하답니다.

 

여행지에서 7월의 마지막 날 마감을 하게 되었네요. 8월에는 가장 마음에 들었던 숙소 이야기를 써볼게요. 무더운 여름 건강히 보내시길.

 

2025. 7. 31.

희정 드림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아주 사적인 마흔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5 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메일리 로고

도움말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로10길 6, 11층 1109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