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헌책방의 산타
집으로 돌아올 때는 매번 다른 길을 택했다. 가장 빠른 길 보다 매일 새로운 길로 모험하듯 부러 더 멀리 걸었다. 숙소에 다다르는 가장 느리고 낭만적인 길을 발견하는 것이 여행자의 기쁨이니까.
오늘은 여행자 아파트 근처 유리와 도자기들이 아름답게 전시되어 있는 편집숍을 발견하며 길을 나선 참이다. 아직 문 열지 않은 이른 시간. 여행이 끝나기 전 분명 한 번은 저기 들러 무엇이라도 살 거라는 미래가 당연한 듯 그려졌다. 때로는 카페에 들어가 보지 않아도 맛을 알 수 있는 법이다. 간판의 폰트나 가게 앞 화분에 심어진 식물의 종류, 창밖으로 언뜻 보이는 조명의 온도 같은 것들이 은밀한 힌트. 여기는 당신 취향이 맞다고. 후회하지 않을 테니 들어오라고. 그 편집숍은 분명 갖고 싶거나 주고 싶은 물건 하나쯤 있을 게 분명해 보였다.
오늘도 바다와 카페, 공원과 산책으로 가득 채운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침대에 벌러덩 누워 오는 길에 발견한 책방을 검색했다. 고서적과 희귀서적을 취급하는 곳이었구나. 구하기 어려운 책을 여기서 발견했다며 이 책방에 대한 찬사가 적힌 리뷰들은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헌책방이지만 아카이빙이 잘 되어있는지 온라인에서도 검색이 가능했다.
혹시... 나를 헬싱키로 이끈 그녀의 책도 있을까. 미술관에서 아누 투오미넨의 작품을 본 것만으로 여기 온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한국으로 들고 갈 추억할 거리가 있다면 더 기쁠 거다. 사실은 전시를 본 후 헬싱키의 규모가 큰 책방마다 들러 그녀의 책을 물어보았으나 세 번 다 실패했었다. 아카테미넨 서점(Akateeminen Kirjakauppa)에서는 어느 친절한 직원이 약도를 그려가며 다른 책방을 추천해 주었으나 거기서도 찾을 수 없었다.
책방 사이트에 들어가 anu tuo... 한 글자씩 떨리는 마음으로 알파벳을 눌렀다. 두근두근 이렇게 가슴 졸이며 검색 결과를 기다린 건 대학입시 이후 아마도 처음이었으리라. 조금 후에 기적처럼 뜨는 두 권의 책. 전시 카탈로그인지, 잡지인지 알 수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녀의 이름으로 된 종이라면 엽서 한 장이라도 반가울 것 같으니까.
우연히 발견한 헌책방에서 그렇게 찾아도 보이지 않던 그녀의 책을 발견하다니. 이건 운명이야! 책방이 문을 닫는 시간은 앞으로 30분 뒤. 지도를 보니 빠른 걸음으로 20분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헬싱키에서 보내는 이 현실감 없는 일주일에 조금 더 마법 같은 순간을 욕심내도 될까? 책방은 내일 가도 그 책이 사라질 가능성은 없을 텐데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가방을 멨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흔하게 나오는, 등교하는 여학생처럼 날렵하게 발을 굴러 반쯤 날 듯 걸었다. 오늘 하루의 고단함 같은 건 벌써 싹 사라진 후였다.
책방 주인으로 보이는 분에게 사이트에서 발견한 책 표지를 보여드렸더니 잠시만 기다리라며 겹겹이 쌓인 책장 속으로 들어가신다. 조금 후에 사장님은 책 한 권 가지고 나와 나에게 안겨주고는 또다시 책 숲을 탐험하러 떠났다. 그리고 또 조금 후, 수많은 책 더미 사이에서 그녀의 다른 책 한 권을 찾아 꺼내주셨다. 너무 기뻐 사장님을 끌어안고 뛰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흰머리의 인상 좋은 사장님이 그때만큼은 산타처럼 보였다. 한여름 헬싱키에서 만난 산타. 이곳에서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을 받은 셈이다.
책방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기념사진을 찍고 다시 고이 가방 안에 넣었다. 내 평생 보물처럼 아끼는 책이 되리라.
집으로 돌아와 나는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구글을 검색해 아누 투오미넨의 이메일 주소를 알아냈다. 한국에서도 종종 들어갔던 그녀의 사이트에는 친절하게도 이메일 주소가 나와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문희정입니다.
한국에서 왔고 나이는 40살이에요.
구글에서 당신의 이메일 주소를 찾았습니다.
저는 오래전에 한국에서 당신의 전시를 보고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아모렉스에서 당신의 작품을 보았어요.
우리 집 거실에도 당신의 작품이 걸려있습니다.
이번 휴가에 저는 헬싱키에 있습니다.
저는 이번 주 토요일에 이곳을 떠나요.
한국에서 온 팬을 만나고 싶다면 연락 부탁드려요.
그러면 저는 무척 기쁠 겁니다.
당신의 건강과 행복을 빌며.
최대한 오역이 없도록 하고 싶은 말을 짧게 적어 영어로 보냈다. 메일에는 우리 집 티브이 뒤 거실에 걸린 그녀의 작품 사진도 함께 첨부했다. 이렇게 하면 내 간절함이 전달될까 싶어서. 이 메일 주소가 지금도 사용하는 것일지, 그녀가 지금 헬싱키에 있을지, 내 메일에 답장을 해줄지 알 수 없었지만 오늘 같은 날이라면 세상의 모든 우연과 운명이 날 도와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주일을 완성시켜 줄지도 모를 일이다.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희정입니다.
드디어 이 얘기를 글로 옮길 수 있어 기뻐요. 그래서 저는 답장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답장 이상의 것을 받았다면요? 저는 답장을 받았고 헬싱키를 떠나기 하루 전에 그녀를 만났답니다.
여전히 생생한 헬싱키에서의 일주일을 이렇게 오래 곱씹게 되다니요. ㅎㅎ 제발 지겨워하지 말아주세요.
그럼 이만.
2025. 9. 5.
희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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