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마흔 일기 / 어린이
한때 어린이였던 마음으로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일본의 책이나 영화를 보면 불편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들이 티 내지 않고 전하려는 것들을 눈치 없이 알아챌 때마다 복잡했다. 다른 나라의 좋은 것들을 가져오면서 자신들의 것을 스리슬쩍 심어두는데 아주 능숙해서, 딱히 마음에 드는 남자도 없는 술자리인데 계속 여우짓을 하는 속이 빤한 여자애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담백하게 살 순 없나. 별로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조용하게 흐르는 일본 영화에는 평화로운 시골 풍경과 순진한 사람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 누구에게도 악의는 없고, 심지어 돈을 주고받는 현실적인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동화 같은 판타지가 가득한 그들의 세계에서 일본은 마치 핵이나 전쟁, 경제나 정치 따위는 모르는 사람들 같다. 잘난체하는 똑똑이 캐릭터라면 영리를 넘은 영악도 그러려니 할 텐데 자꾸 아무것도 모르는 해맑은 얼굴로 판을 짜는 게 영 거슬렸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 지인이 무척이나 좋아하는 브랜드라 미나 페르호넨 전시를 보러 갔지만 발걸음이 가볍지는 않았다. 좋아하지도 않은 일본의 브랜드 전시에서 나는 뭘 남기고 싶은 걸까.
미나 페르호넨의 옷을 입은 사람들의 일상을 담은 영상이 전시되는 부분에는 끝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연하게도 미나 페르호넨의 옷을 입은 백인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럼 그렇지.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일본 화장실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 영화 ‘퍼펙트 데이즈’가 서양인의 시선으로 비추는 일본의 모습인 것처럼. 자신의 것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면서 다른 이의 시선, 특히나 푸른 눈의 인정이 꼭 필요해 보이는 건 어째서 일까 복잡했다.
브랜드 이름부터가 핀란드어인 미나(나) 페르호넨(나비)인 브랜드의 전시를 보면서 나는 일본이 보이지 않고 자꾸 핀란드를 발견했다. 핀란드의 울창한 나무숲과 호수와 눈은 멋진 패턴이 되어 다양한 상품으로 만들어졌다. 자신만의 고요한 평화가 중요한 북유럽의 가치와 생활방식 중 어떤 것이 일본의 것과 맞닿아 있을까. 더 알고 싶은 마음으로 창업자의 에세이를 한 권 사가지고 왔다.
일본의 미술과 영화, 문학, 음악 그 어떤 것도 즐기지 않는 사람으로, 후쿠오카에서의 7박 8일을 전부 아이들을 위한 일정으로 채운 것이 그다지 아쉽지 않았다. 아이들이 원해서 가는 것이기에 ‘좋아하지 않는 나라’에서 그 어떤 감흥도 받을 계획은 없었으니까.
아이들은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들떠있었다. 리무진버스를 기다리는 시간과 인천공항에서 점심을 먹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설레어했다. 일본 지하철을 타면 그것 대로, 숙소를 바꾸면 또 그것대로 좋아했다. 쾌활함을 넘어 호들갑을 떨며 기뻐하는 모습을 본 게 얼마 만이었더라.
일본 여행에 대한 반응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 몰라 미안할 정도였다. 사려 깊은 큰 아이는 다른 애들은 해외여행을 다 갔더라 사실은 자기도 부러웠다 뒤늦게 고백했다. 전혀 관심 없는 줄 알았던 집돌이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는 땡빚을 내서라고 진작 떠났어야 했다 후회스럽기까지 했다. 비행기 타고 한 시간, 어디 멀리 유럽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겨우 일본 그게 뭐라고.
우리는 사자에게 집게로 먹이를 주는 사파리 동물원에 가고, 시나모롤과 친구들이 나와 공연을 하는 산리오 랜드에 갔다. 바다에 갔고, 분수를 보고, 전망대에 올랐다. 나머지 일정은 매일 비슷했다. 인형을 사고, 카드를 사고, 피규어를 사고… 다음날 또 다른 매장에서 인형, 카드, 뽑기. 또 인형, 카드, 뽑기.... 내가 구경할 것은 없었지만 애초에 이러려고 온 것이라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이번 여행은 지켜보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 아이들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새롭게 발견한 것들을, 아이들이 있는 낯선 풍경을 오래 들여다봤다. 그러면서 보게 된 일본의 어른들까지도.
큰 아이가 푹 빠져있는 유희왕 카드를 사기 위해 알아둔 곳은 일본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도 잘 모르는 매니악한 곳이었다. 구글에 찾아도 나오지 않아 검색을 여러 번 해서 찾아간 곳도 있었다. 아이가 가고 싶다는 곳을 유튜브에서 보고 알려주면 나는 빠르게 화면을 캡처해서 사진과 간판을 검색해 위치를 알아두었다.
하지만 상점 안에 들어가면 세상에 이런 세계도 있구나 얼떨떨한 나와 달리 그게 일상인 어른들이 있었다. 아마도 우주가 거기서 가장 어린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초등학교 앞 문구점에서 천 원에 너 다섯 장이 든 카드만 판다면 여기는 본격적이었다. 유치한 애들 장난감으로 치부했던 카드들은 소중하게 비닐에 쌓여 유리장에 진열되어 있었다. 구입을 원하면 직원을 불러 열쇠로 쇼케이스를 열어야 꺼낼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규모가 있는 상점은 테이블도 여럿 있었다. 거기는 각자 가지고 온 카드로 대결을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곳에도 어른들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 사람들에게는 무슨 카드를 그렇게 많이 사냐 거나, 뭐 대단한 거라고 그렇게 열심히 모았느냐 같은 말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취미이자 즐거움으로 보였다.
산리오 랜드에 갔을 때는 나도 모르게 울컥해 버렸다. 시나모롤과 쿠로미 탈을 쓰고 있는 것도 어른, 그들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도 대부분 어른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온 사람들은 많지 않았고 그마저도 대부분 한국인 같았다. 인형보다 더 화려하게 입고 온 어른들은 맨 앞줄에 앉아있었다. 캐릭터가 노래를 부를 때면 마치 자식의 장기자랑 보듯 알겠다는 표정으로 끄덕이며 흐뭇해 했다. 삼각대 까지 가지고 와 열심히 영상도 찍었다. 뭐지, 이 진심은.
나는 행복하게 웃고 있는 내 아이와, 그 아이를 둘러쌓고 있는 어른들이 모두 같은 표정이라는 것에 놀랐다. 쑥스러워하거나, 머뭇거리는 것 없이 온전히 빠져있는 그녀들이 만들어낸 벅찬 분위기에 감동해버렸다.
또 한 번은 산리오 캐릭터를 파는 상점에서 스크린을 보며 게임하는 체험장이 있었는데 큰 아이가 하기에는 너무 유치할까 고민하는 사이 어른들이 줄을 서는 장면을 목격했다. 3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 뒤에는 성인 여자 둘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놀라운 건 체험을 돕는 직원의 태도였다. 노래가 나올 때마다 탬버린을 쳐주면서 응원했는데 어른들이 차례가 와도 변함없이 카와이! 카와이!라고 외쳤다. 나는 어린아이들과 함께 줄을 서서 게임을 하는 어른과, 그 어른을 응원하는 또 다른 어른의 진지함에 또다시 울컥하고 말았다.
헬싱키에 갔을 때 나는 자유로워 좋았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고, 혼자인 사람들이 많아 좋았다. 혼자 밥을 먹고, 공원에 앉아있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다. 이미 그런 핀란드 사람이 곁에 여럿 있었기 때문에. 내 여행에 부제를 달아준다면 '혼자여도 좋은 도시 산책'일 것이다. 이번에 일본을 여행하며 어렴풋이나마 일본 사람들이 왜 그렇게 핀란드를 좋아하는지, 또 핀란드에는 왜 그렇게 많은 스시집이 있는지 유추해 보자면 혼자여도 괜찮은 나라라는 공통점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겨우 8일 씩 양쪽 나라를 다녀온 여행자의 시선으로 내린 섣부른 결론은 그렇다.
여행에 돌아와서 1인 가구의 가장으로 살고 있는 친구에게 오랜만에 연락했다. 20대 때 우리가 갔던 도쿄에서는 몰랐는데, 지금 와 보니 일본은 어른들이 즐겁게 살기 참 쉽겠더라 얘기하고 싶었다. 특히 혼자 사는 사람이라면 일본은 꽤 괜찮은 선택지겠더라고. 우리 나중에 더 나이 들어서 다시 한번 가보자고 했다. 혹여라도 네가 삶의 의미를 못 찾겠거나 재미난 게 없어 우울할 때는 비행기로 한 시간만 가면 유희왕 카드를 사 모으고, 놀이동산에 혼자 오는 어른들이 있더라 얘기해주고 싶었다.
우리가 더 나이 들어서도 한때 어린이였던 마음으로 주저없이 무언가에 푹 빠져있길.
구독자님 잘 지내셨나요? 벌써 2월 21일이 되었다니 믿기지 않네요.
8일간의 후쿠오카 여행의 짧은 감상을 적어 보냅니다. 그리고 제가 머물렀던 숙소 세 곳 중 두 곳을 추천할게요.
25. 2. 21
희정 드림
Common de -Hostel & Bar-
관광객이 그렇게 많지 않은 한적한 동네 코몬도마치에 있는 숙소에요. 하카타 포트타워와 가깝고 배를 타고 마린월드에 갈 수 있지요. 저는 여기서 4일을 지냈는데 조금 춥고 와이파이가 잘 안터졌다는 엄청난 단점에도 불구하고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었어요. 일단은 일본에서 테이블이 두 개나 있는 곳은 많지 않아서 좋았고요. 노트북 꺼내서 일 할 수도 있었고, 편의점에 산 것들 펼쳐놓고 먹기도 좋았답니다.
지내보니 또 하타카나 텐진처럼 번화한 곳보다는 여기 동네 주변을 걸으며 산책하는 게 더 제 여행스타일과 맞더라고요. 근처 맛집들도 현지인들의 식당 분위기라 좋았어요. 참! 테라스가 있어 밖에 날씨도 보고 환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좋았습니다.
분쇼도 호텔
하타카 역과 가까우면서 아이들이 2층 침대를 좋아해서 선택한 곳인데 책을 주제로 만들어진 곳이었어요. 위치가 좋아서 버스 지하철 편의점 쇼핑몰 모두 쉽게 이용할 수 있었고 맛집도 많고요. 한국 젊은 친구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경비 절감 차원으로 욕실 없는 방을 선택해서 조금 걱정했는데 세면대와 화장실은 포함되어 있었고 공동욕실 시설도 생각보다 좋았어요. 마지막 날은 욕실이 포함된 방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다음에 온다면 욕실 포함된 방에서 쭉 있을 것 같아요. 아이들과 저까지 모두 대만족! 벗! 유일한 단점이 창문이 열리지 않는 곳이에요.
두 곳 모두 1인 부터 4인 이상까지 숙박 가능한 곳이었어요. 무척 친절하고 소통도 잘 되고 수건 인심까지 넉넉한 곳이었답니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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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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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마흔
남편 없이 처음 떠난 아이들 첫 해외여행이라 조금 긴장했는데 후쿠오카는 확실히 여행 난이도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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