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의 여름방학

2-2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연습

마흔의 여름방학 : 헬싱키에서 보낸 일주일

2025.06.13 | 조회 1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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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2-2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연습

 

 

한여름의 헬싱키는 해가 지지 않는 백야가 계속된다. 그 말이 마치 하루를 더 길게 써도 된다는 허락 같아서 잠시 즐거웠다가 아차차, 놀러 쉬러 가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글러먹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길어져 안도하다니. 차라리 누워 쉴 밤이 길길 바라야 하는 게 아닌가.

 

시차 적응이 실패한 김에, 새벽에 일어나 호텔 창밖을 확인했다. 새벽 두 시, 마치 이제 막 동이 트려는 것 같은 푸른 하늘이었다. 이렇게 푸르스름한 새벽 같다가 다시 해가 떠오르는구나. 내가 있던 곳과 전혀 다른 낮과 밤이라는 것이 새삼스럽다. 이렇게 밝은 데 모두 잠들어 있다니. 낯선 곳에 떨어진 앨리스라도 된 것처럼 어리둥절하다. 내가 시간을 착각해 벌써 하루가 시작된 건 아니려나 다른 객실의 창문과 1층 테라스를 내려다봤다. 역시 아무도 없는 고요한 새벽. 정말 지금은 모두가 잠든 시간이었다.

 

비행기로 반나절 날아오면 해가지지 않는 도시에 도착한다. 내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수많은 낮과 밤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목격할 수 있을까. 아마도 두어 번, 많으면 열 번쯤 되려나. 갑상선암 수술 후에는 아무것도 확신하지 않게 되었다. 섣불리 예측하지도 않는다. 살다가 마흔 살이 되면 암에 한 번쯤 걸릴 수도 있겠다 상상해 본 사람이 누가 있겠나. 아이들과 떨어지면 큰일 날 것처럼 젖먹이를 데리고 북페어 행사에 나갔던 사람이 아이들을 떼어놓고 혼자 헬싱키에서 일주일 동안 살 결심을 하게 될 줄이야. 바라던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삶은 절망과 희망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주지 않아 공평했다.

 

 

아침 일찍 조식을 먹으러 1층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다. 하루를 이렇게 일찍 시작할 계획은 아니었지만 헬싱키에서의 눈 뜨는 첫날을 좀처럼 가만히 누워 기다릴 수 없었다. 커피를 마실까 하다가 조식은 오렌지주스라는 이상한 공식이 있어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샐러드와 빵, 오렌지주스를 들고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창밖이 공원이라는 건 호텔을 예약했을 때는 고려하지 못했던 장점. 공원에는 개와 산책하는 사람들과 가볍게 뛰고 있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오갔다. 샐러드를 한 입 우물거리며 창밖 한 번, 빵을 뜯어 버터를 조금 발라 씹으며 또 한 번, 낯선 풍경 속 사람들을 구경했다.

직접 뷔페 음식을 뜨고 싶은 아이를 쫓아 다니며 손이 닿지 않는 것을 대신 접시에 담아줄 필요 없이 그저 나 하나만 잘 먹이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아이가 팔꿈치로 주스 컵을 치지 않을지, 의자를 뒤로 젖혀 넘어가지 않을지 신경 쓰느라 분주하지 않아도 된다. 저쪽에 소시지도 있는데 못 봤냐며 대신 가져다주지 않아도, 밥 먹을 때는 핸드폰 꺼내지 말자고 주의를 주지 않아도 되었다. 그 분주함을 싫어한 적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쩌지…. 2인용 테이블에 앉아 혼자만의 식사를 즐기고 있다는 것이 어색하기는커녕 만세를 부를 만큼 좋아서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헬싱키에서 일주일 동안 여행자로 살며 1인 여행자에게 딱 맞는 곳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가족과 연인, 친구들 어딜 가든 여럿이 많은 우리나라에 비해 여기는 혼자인 사람들이 많았다. 잔디밭에 삼삼오오 보여있는 사람들 사이 혼자인 사람들이 외롭지 않게 보일 정도로 흔했다. 식당에서도, 카페에서도 혼자인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나라도 혼자 카페에서 노트북을 하거나 혼밥을 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이곳은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혼자온 사람들은 대부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보거나 식사를 하면서 핸드폰을 보지 않았다. 커피를 마실 때는 커피를 마셨고, 밥을 먹을 때는 천천히 밥을 먹을 뿐이었다. 심지어 걸을 때도 음악을 듣거나 핸드폰을 손에 쥐고 걷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걸을 땐 그냥 걷는다. 

사람의 뇌는 멀티태스킹이 불가능한 존재라고 했던가, 그걸 알면서도 영상을 틀어놓고 밥을 먹지 않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 당연한 모습이 왜 이렇게 어색하던지. 나는 혼자라는 어색함을 쫒아내기 위해 자주 책이나 핸드폰을 꺼냈는데 여기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연습이 필요했다. 

조금씩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 익숙해지고 있다. 한 번에 한 가지씩만 한다. 커피를 마실 때는 커피만. 카페 안 풍경을 둘러보다가 창밖도 한 번 바라보고, 다음에는 어디에 갈까 내일은 뭘 할까 일단은 고민하지 않고 지금 카페에 앉아 있는 시간을 충분히 누린다. 행동을 줄이고 머리속도 비운다. 걸을 때도 되도록 지도를 확인하지 않고 걷는다. 어디로 가든 어차피 헬싱키는 나에게 모두 낯선 곳일 뿐. 애초에 가야 할 목적지 같은 것이 없으니 발길 닿은 대로 걷다가 보이는 것들을 충분히 눈에 담는 것으로 충분했다. 아주 오랜만에 되찾은 여유로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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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님 안녕하세요. 희정입니다. :)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된 느낌이에요.

저는 더위를 많이 타지 않는 편인데 우리 집 동거인 셋은 벌써부터 에어컨을 틀자며 성화네요. 저는 요즘 에어컨을 틀지 않고 창문을 열어두는 카페만 찾아다니고 있답니다. 

편지를 보내며 헬싱키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며 언제 다시 갈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이번에는 여럿이 떠나 숙소를 쉐어하며 따로 또 같이 지내보면 좋을 것 같기도 하고요. 너무 늦어지기 전에 꼭 한 번은 다시 가고 싶어요. 함께 헬싱키 여행을 꿈꾸며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이만.

6월이 가기 전에 다시 편지할게요.

 

25. 6. 13

희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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