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의 여름방학

1-4 차선의 행복

마흔의 여름방학 : 헬싱키에서 보낸 일주일

2025.03.26 | 조회 2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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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1-4 차선의 행복

 

 

요즘은 초등학교에서는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해야 한다고 배운다. 둘째가 1학년이 되었을 때 가방을 현관에 던져놓고는 엄마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다. 같은 걸 배워온 첫째에게 이미 들어 정답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날 가장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첫눈 같은 눈빛으로 묻는 네가 내 입술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고, 무엇보다 진심이 아니었으니까.

“엄마는 하나를 제일 사랑하지.”

자기를 가장 사랑한다는 나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선생님이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해야 하는 거라고 딸아이는 단호하게 말한다. 하지만 하나의 다그침은 물컹한 젤리 같았다. 말소리 끝에서는 달달한 사탕 냄새가 났다. 그럼에도 엄마는 날 가장 사랑하는구나 안심하고 돌아서는 뒤통수가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네가 이렇게나 예뻐서 엄마는 어쩔 수 없으나, 너만은 꼭 너를 가장 사랑하길 바라는 모순은 어찌 설명할 길이 없다.

 

분명 내가 누리는 가장 커다란 행복은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찾아왔다. 그것도 살을 맞대고 붙어서 서로의 체온을 느낄 때가 끔찍히도 좋았다. 온 우주가 내 옆구리에 있었다. 그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안기면 이 아이들에게 양팔을 내어주려고 태어난 것 같았다.

내 육아는 대부분 침대에서 이루어졌다.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퀸 사이즈 침대에서 서로의 팔을 포개고 붙어 누워 자는 것에 익숙했다. 내 침대에서 셋이 눕기 어려울 정도로 큰 후에도 아이들은 자주 내 품을 파고들었다. 책을 읽어도,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봐도 내 몸에 팔 하나, 다리 하나는 꼭 닿아있었다. 떨어지기 싫은 우리는 푹푹 꺼지는 침대에 앉아 보드게임을 하고, 왜 꼭 여기여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공놀이까지 침대를 벗어나지 않는 불편을 감수했다.

그럴 때마다 혹여나 우리가 지금 보다 더 큰 풍파를 겪어 단칸방에 살아야 한들 문제 될 것 같지 않았다. 베개 두 개와 포근한 이불 하나면 충분했으니까. 거실과 다른 방 하나는 사이좋은 우리에게 주어진 보상 같았다.

 

그러던 내가 과연 아이들 없이 행복할 수 있을까. 비싼 돈을 들여 멀리 헬싱키까지 가서 아이들이 보고 싶어 눈물을 찔끔 거리고 싶지 않다. 다른 집 아이들이라도 끌어안고 비에 젖은 강아지 냄새가 그리운 듯 킁킁대고 싶지 않았다. 마음껏 즐기지 못하고 핸드폰 사진을 들여다보며 울적한 기분을 느끼지 않으려 노력하는 건 정말 싫었다. '일주일을, 멀리서, 혼자 보내도 행복할 수 있을까?' 20대의 나라면 질문 자체가 이해되지 않을 물음을 40대의 나에게 물었다. 아이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10년이었다. 그 사이 나는 이 아이들과 함께 번거롭고 피곤한 행복을 함께 하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다.

 

이번 여행에 ‘차선의 행복’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여행자의 집 소로 님의 지난번 일본 여행 ‘만두 먹으러 후쿠오카’를 보고 슬쩍 따라 해 본 거다. 소로 님의 인스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엔 나만의 제목들을 붙여둔다. 혼자 하는 여행이 혹 지루해지거나 가라 않지 않도록 정해준 작은 즐거움이랄까. 기차 타고 독일 크리스마스 마켓 한 바퀴. 지리산티아고. 5일 동안 태국 음식 50가지 먹어보기. 만두 먹으러 후쿠오카까지. 이렇게 붙여두면 짧은 여행들이 조금 특별해진다.

 

간장에 교자를 콕 찍듯, 짧은 일정이지만 좋아하는 것에 푹 담겨 있다 오는 여행이 무척 좋아 보였다. 간결하고 산뜻했다.

내 여행에도 이름을 붙여주니 꽤 많은 것이 명확해지는듯했다. 봐야 할 것 즐겨야 할 것 남겨야 할 것이 분명해졌다. 이번 헬싱키 여행에서 내가 보고 즐기고 남겨서 돌아와야 할 것은 최고 최대 최선의 행복이 아니다.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에서 멀어지는 경험을 하려고 한다. 거기에도 분명 행복이 있었으나 오래 묵혀두어서 이제는 형체가 흐릿했다. 먼지를 털고 닦아내 실체를 확인할 때다. 중년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해줄, 앞으로 또 언제 손에 쥐게 될 줄 모르는 고독을 누리러 간다.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산수유와 목련이 피었어요'라고 인사하고 싶은데. 산불이 번져 마음이 무겁습니다. 개인의 실수가 이렇게까지 커다란 아픔이 될 수 있다니, 마음 편히 봄을 맞이하기 어려운 날이네요.

그럼에도 아이들은 배가 고프고, 준비했던 책은 나오고, 학원비는 나가야 하고, 주말은 돌아오니까 저는 또 해야 할 일을 합니다. 다음 주는 제주에 가요. 4월 5,6일 작년에 갑상선암 수술로 참가하지 못했던 제주북페어에 참여합니다. 신간 <갑상선암에 걸리면 스카프 쇼핑부터 하는 게 좋다>를 들고 갈게요.

그러고 보니 오늘이 꼭 수술한 지 1년이 되는 날이네요. 오늘의 다행을 조용히 기념하고 지나가야겠습니다.

구독자님 우리 건강해요. 그것밖에 없네요.

 

2025. 3. 26. 

희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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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란한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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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month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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