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일기

6. 마흔 일기 / 회식

부럽지가 않어

2022.10.25 | 조회 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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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구독자 님 안녕하세요. 

오늘은 뉴스레터를 보내야지 마음먹고 아침 공원을 산책하면서 찍은 사진이에요. 안 좋은 생각도 사라지게 만드는 계절이라는 생각을 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걸었습니다.

이번 주부터 본격적인 단풍철이 될 것 같아요. 아무리 바빠도 이 짧은 계절 마음껏 누리며 지내시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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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마흔 일기 / 회식

부럽지가 않어

 

남편이 회식을 하면 인스타그램에 분노의 피드를 올리곤 했다. 나에게 글쓰기는 곧 눈물 쏟기이자 털어내기였으므로, 싸우지 않는 대신 나는 나대로 찾은 살 길이었다. 시아버지가 보고 계신다는 걸 알기 때문에 옳다구나 더 열심히, 내가 당신 아들로 인해 얼마나 불행한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알고는 계시라 보란 듯이 썼다. 그렇게 쓰고 나면 좀 나아졌다. 지금까지 나에게 글이란 게 항상 그랬다. 아무런 무기도 없는 나에게 도망칠 곳이자 날카로운 가시. 

 

가끔씩 바쁠 때는 남편이 퇴근하고 들어오면 바통터치하고 바로 나가서 일했다. 보통 두세 시간 정도 걸리는데 매번 집에 돌아올 때는 아이들이 잠들까 봐 발걸음이 빨라졌다. 겨우 두 시간 떨어져 있었는데도 들어가는 길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초코송이와 고래밥을 사고, 봉다리를 흔들며 뛰듯이 걸었다. 아파트 입구에 들어가면 엘리베이터도 기다리고 싶지 않아 단숨에 계단을 걸어 올라가 도어록의 숫자를 빠르게 눌렀다. 띠띠띠띠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와 엄마다' 하고 달려오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일찌감치 이어폰도 미리 빼 두었다. 아이들은 이 잠깐의 밤 근무를 2박 3일 출장에라도 다녀온 것처럼 반겨줬다.

 

언젠가 사라질 호들갑이라는 걸 알아서 더 애틋했고 그럴수록 집안보다 밖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남편은 어떨까 궁금했다. 하루 종일 붙어있다가 겨우 몇 시간 떨어져도 이런데, 아이들 일어나기 전에 나간 사람이 아이들이 잠들고 나서 들어올 때, 남편은 어떤 마음으로 도어록을 열까. 아마도 나와 같은 마음은 아니리라.

 

내가 남편의 회식으로 분노하는 이유는 나 혼자서 아이를 돌보고 있는데 당신은 밖에서 놀고먹냐고, 왜 당신 몫의 육아는 하지 않느냐고 따지는 게 아니다. 그냥 그럴 수 있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되어서였다. 퇴근 후 가족보다 더 긴 시간 함께하고 있는 회사 사람들과의 저녁 자리 술자리가 정말 즐거울까. 차라리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밤새 이어지는 술자리였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살면서 종종 그런 즐거움도 필요하니까. 나도 가끔 친구들을 만나면 밤 12시가 우습게 넘어가니까. 그런데 매일 보는 회사 사람들과 하루 종일 같이 있다가 밤늦게까지 술을 곁들여 가며 웃고 떠드는 것이 과연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진심으로 궁금했고, 끝내 알 수 없을 것 같아서 화가 났다. 우리는 집에 돌아올 때 같은 마음이 아니겠구나 생각하니 남편의 존재가 더 멀게 느껴졌다. 

 

회식을 하는 남편에게 원하는 건 딱 하나였다. 그 회식이 어떤 성격의 것이라는 걸 알려주는 것. 예를 들어 이런 카톡 두어 개면 충분했다. '오늘은 새로 팀장님이 오셔서 축하 자리라 회장님까지 오시는 저녁 식사.' 혹은 '팀에 문제가 있어서 오늘은 팀원들이랑 심각하게 얘기를 좀 해야 하는 무거운 자리.' 그러면 나도 대강의 분위기를 알 수 있으니 마음이 놓였다. 기분 좋게 마시고 있겠구나 혹은 오늘은 들어오면 이야기 좀 들어줘야지 나름의 준비를 하고 싶었다. 거기다 '저녁 먹으러 옴. 2차로 맥주 마시러 옴. 12시쯤 들어갈 것 같아 대리 불렀어.' 중간중간 이런 카톡까지 보내온다면 더욱 바랄 게 없다. 하지만 나의 이 하나뿐인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른 집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남편이 회식을 하고 있을 때 전화를 한 통도 하지 않는다. 원래 전화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기도 하지만, 회식이라면 더더욱 수취 불가 지역에 간 사람이라 생각하고 잊는다. 못마땅해서 잠시 내 삶에서 지우고 없는 사람 취급했다. 그랬더니 오히려 전화가 오면 성가셨다. 혼자서 아이들 저녁먹이고 잘 준비하는 지금이 제일 바쁜 거 알면서 왜 자꾸 전화를 하는지. 겨우 잠든 아이들이 술 취한 아빠의 눈치 없는 벨소리에 깨면 안 되니까 핸드폰은 무음으로 해놓고 잠들어버렸다. 혹시나 술 마시고 생길 수 있는 불상사를 걱정하는 것도 그만두었다. 지워진 사람의 사건 사고나 생사 따위 알 바 아니었다.

 

한 번은 남편과 크게 싸웠는데 더이상 회식을 주제로 싸우고 싶지 않아서 나도 끝까지 물고 늘어질 작정이었다. 서로 온갖 상처되는 말들을 주고받았다. 앞으로의 미래와 결혼 전 과거까지 끄집어낸 난장판 싸움 끝에 속내를 드러낸 남편의 입장은 기가 막혔다.

 

"당신이 회식하는 걸 싫어하잖아."

"싫지. 못하게 하는 건 아니잖아. 내가 가지 말라고 안 된다고 한 적 있어?"

"당신이 싫어할 게 뻔하니까 나도 횟수를 줄인 거야. 안 가는 회식이 얼마나 많은데."

"일주일에 한 번은 꼬박 가는데 그럼 일주일에 두세 번씩 가려고?"

"이번 주는 안 했어."

"자랑이다 아주."

"회식에서 얘기하면 더 잘 풀리는 일들이 있어. 내가 팀장인데 밑에 직원들이랑 술 한잔하면서 얘기해야 할 것도 있고. 나는... 당신이 내가 회식하는 걸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다 하게 해주는 데. 싫어하는 티도 내지 말라고? 사람들한테 길을 막고 물어봐. 남편 회식하는 거 좋아하는 와이프가 있나."

 

납작 엎드려서 미안하다 해도 부족할 판에 기가 막혔다. 내가 수십 통 전화해서 빨리 오라 재촉하는 것도 아니고, 잔소리를 하거나 싸우는 것도 아니고 그저 기분이 좋지 않은 것뿐인데, 그것마저 싫다니. 너무 황당해서 전의를 상실했다. 최대한 배려하고 맞추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더 디딜 곳 없는 벼랑 끝에 서 있는 나를 아주 밀어버리는구나. 싫어하지 말라니... 생각할수록 말문이 막혔다.

 

남편과 나는 회식이라는 주제 안에 전혀 다른 카테고리로 싸우고 있었다. 나는 집 밖에서 쏟고 있는 에너지와 정성을 가정으로 돌려주길 바라고 있었고, 남편은 회사 생활에서 회식의 필요성과 고단함을 인정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남편의 마음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자기도 애쓰고 있음을 알아달라는 거겠지. 그렇다면 나의 애씀은, 나의 마음은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그 후로 남편이 회식을 하면 보상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편의점에서 술과 음료수를 사서 아이들과 집구석 회식을 했다. 평소에는 엄두도 못 내는 갈빗살이나 살치살 같은 구이용 한우를 사서 정성스러운 저녁 식탁을 차려 아주 맛있게 먹었다. 남편이 없을 때 더 성실하게 끼니를 챙겼다. '남자들은 밖에서 좋은 거 많이 먹으니까 너나 잘 챙겨 먹어라.' 그럴 때마다 엄마가 하셨던 말이 생각났다. 남편의 회식 날마다 우리는 더 맛있고 좋은 걸 악착같이 열심히 챙겨 먹었다. 회식을 싫어하지 말라니 나도 좋아할 거리가 필요하지 않은가.

 

이왕 배려하는 거 살아있는 부처가 되어보자 결심했다. 남편이 회식 소식을 알릴 때마다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회식을 술자리로 보지 말고 이 사람이 회사에서 열심히 하려는 노력으로 봐줘야지. 열심히 일시켜서 임원 달게 해 줘야지. 우리 가족 잘 먹고 잘 살라고 가장이 고생을 하는구나. 우쭈쭈 우쭈쭈. 아마도 내가 죽으면 원인은 화병일 테고 화장터에서는 분명 사리가 나올 거다.

 

역시 마음먹기에 달린 건지, 남편이 회식을 할 때마다 인스타그램에 분노의 피드를 올리던 것도 그만두었다. 회식 날짜마다 한 달에 몇 번이나 하는지 두고 보자는 심정으로 핸드폰 캘린더에 개 이모티콘을 넣던 것도 이제 안 한다. 마음을 비웠더니 남편의 회식이 반가워지기까지 했다. 유튜브 보면서 설거지하느라 이어폰 끼고 있는 사람도 없고, 밤에 나를 귀찮게 구는 사람도 없다. 오히려 회식 소식을 들으면 빨리 아이들 재우고 혼자 볼 영화를 고르며 설레기까지 했다. 주말부부가 된 후에는 카톡으로 알리는 것도 귀찮아서 회식에 회만 나와도 오케이 사인을 주고 있다. 늦게는 안 들어갈 거라는 말에 당신 혼자 사는 집인데 무슨 상관이냐며 늦게까지 마시라고, 주말부부의 장점을 마음껏 누리길 진심으로 응원해 주고 있다.

 

혹시라도 오해하지 말길. 그것 봐라 당신이 바라던 것이 이거냐. 나는 이제 당신 없이도 잘 지내는 아내를 넘어 당신이 없어야 더 잘 지내는 아내가 되었다고 따지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것도 어느 정도의 과도기 때의 마음가짐이다. 장기하의 노래처럼 부러움이란 게 없는 놈이 되었다. 회식을 즐겨 하지 않는 남편을 부러워하지 않고, 내 처지를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결혼 11년 만에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시간을 쏟으며 사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제는 내 마음에 평화 뿐이다. 내게 강 같은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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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편지에 남겨준 댓글을 보며 혼자 웃었어요. 역시나 모두 비슷하게 살고 있구나 안심했답니다. 

11월에 또 편지하겠습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세요

22.10.25

희정.

 


💌문화다방 소식

이번 주 금요일 북서울 시립 미술관에서 열리는 '언리미티드에디션'에 참가합니다. 국내 최대규모라고 할 수 있는 아트북페어에요. 문화다방은 독립출판물 2종과 엽서, 패브릭 포스터 등 다양한 굿즈를 들고 참가합니다. 

문화다방의 자리는 1층 B-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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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14 (unlimited-edition.org)

제14회 언리미티드 에디션 - 서울아트북페어 2022

  • 2022년 10월 28일(금)~30일(일), 3일간
  • 28일(금) 오후 1~7시, 29~30일(토~일) 오전 10시~오후 7시
  •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서울특별시 노원구 동일로 1238)
  • *무료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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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흔네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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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out 3 year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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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ellowndot

    0
    about 3 year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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