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여행자의 편지 헬싱키
어릴 적 우편물에서 독특한 엽서 한 장을 발견했다. 엄마에게 온 엽서였다. 멕시코에 사는 수녀님이 보낸 거라고 했던 것 같은데 워낙 오래전 일이라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그때의 기억이 어린 나에게 남긴 건 필기체로 쓴 읽을 수 없는 문장과(아마도 주소였을) 낯선 곳의 풍경이 담긴 엽서 앞면의 사진, 그리고 우표와 스탬프 같은 이국적인 분위기였이.
모든 게 근사했다. 엄마에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는 수녀님 친구가 있다는 것과, 그 친구에게 엽서가 왔다는 사실도. 이 엽서가 비행기를 타고 아주 멀리서부터 날아와 우리 집에 도착했을 긴 여정까지. 모든 게 어린 나에게는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때의 사소한 기억이 어른이 된 나의 몸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까. 6년 전인 2019년에 ‘여행자의 편지 프로젝트’라는 것을 즉흥적으로 기획했다. 글 쓰는 것도(정확하게는 팔리지 않는 글을 계속 쓰는 것이) 싫고, 처음으로 책을 만드는 것에 허무를 느꼈을 때였다. 둘째가 태어나 육아에도 많이 지켜있었다. 일이 힘들면 아이에게 기대어 기운을 얻고, 육아가 힘들면 일에 도망치며 살았는데 하필이면 동시에 다 못 견디겠으니 막막했다.
그때 치앙마이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여행이 최상의 보상이었나 보다.
여행을 떠나며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엽서였다. 치앙마이로 도망치듯 떠나야겠다 결심한 것도, 거기서 엽서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모두 마음이 시키는 대로 머리가 뒤늦게 따라가 결정한 일이었다.
분명 나는 거기서도 글이 쓰고 싶겠지. 쓰지 않으면 못 배기겠지. 그럴 거면 뛰어난 재능이라도 주시던가, 글에 대한 마르지 않는 애정만 가득 주셔서 왜 나는 도망치면서도 글을 데려가려고 할까. 원망스러운 마음에 노트북을 가지고 가지 않았다. 노트북을 열고 키보드를 두드리면 나는 또 생산적인 글을 쓰고 싶을 것 테니까. 나를 증명해야 하는, 잘 팔려야 하는, 궁극적으로는 돈이 되는 글. 대신 이번에는 말 잘 듣는 펜 여러 자루를 챙겼다. 거기서도 매일 글은 쓰겠지만 그건 그냥 엽서나 편지 따위의 쉬운 글 일 것이다. 좋은 글로 다듬으려 노력하지 않는 퇴고 없는 글. 기획도 없고, 연습도 없이 편하게 써 내려가는 엽서 한 장.
떠나기 전에 치앙마이에서 보내는 엽서를 받아 볼 사람들을 모았다. 몇몇의 친구가 아마도 의리와 우정의 뜻으로 신청해 주었고 대부분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여행 가방에는 그들의 닉네임과 주소를 적은 작은 종이 꾸러미를 챙겨 넣었다. 혹시나 분실을 대비해 메일로도 보내놓았다. 이렇게 가벼운 여행이라니.
매일 편지를 보내겠다 약속하고 나는 정말 종일 글을 쓰러 온 것처럼 치앙마이에서 글만 썼다. 세어보니 하루에 열 통 정도는 된 것 같다. 떠나는 비행기에서는 여행의 설렘을, 숙소에서는 창 밖 풍경을, 카페에서는 이곳의 커피에 대해 떠오르는 대로 썼다. 이 글을 받는 것이 익명의 수신인이라 오히려 더 막힘없이 쓸 수 있었다. 떠나오기 전까지의 괴로움에 대해서, 막상 떠났더니 생각나는 아이들에 대해서, 치열했던 일상과 지금의 믿기지 않는 여유로움에 대해서 자유롭게 써서 매일 아침 전 날 쓴 엽서를 모아 우체국으로 가져갔다. 이 엽서들은 오래전 멕시코에서 한국으로 왔던 수녀님의 엽서처럼 태국에서 한국으로 멀리 여행을 떠날 것이다.
떠나기 전에는 몰랐지만 막상 치앙마이에 도착하니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마음에 드는 엽서를 찾는 게 쉽지 않다는 거다. 관광엽서는 촌스러울수록 좋다는 신념으로 우체국에서 몇 장을 고를 때는 괜찮았는데 세련되게 디자인된 감각적인 엽서는 도통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편집샵을 발견하면 잘 인쇄된 엽서나 프레스 판화 카드 같은 것을 쓸어 담기 바빴다.
반면에 헬싱키에서의 엽서 찾기는 난이도 최하의 미션이었다. 이곳의 엽서는 부러 찾지 않아도 훌륭한 것들이 제 발로 걸어와 손에 잡혔다. 우체국, 미술관, 기념품 샵, 편집샵 등등 모든 곳에서 발견한 엽서들이 하나같이 마음에 쏙 들게 아름다웠다.
편지할게요. 헬싱키에서. 치앙마이 때와는 또 다른 마음으로.
헬싱키로 떠나기 전 이번에도 편지를 써 보내겠다고 약속하고 사람을 모았다. 순식간에 40명이 넘는 사람들이 신청했고 나는 보내달라는 사람을 매정하게 막고 싶지 않아 44명의 신청자를 모두 받았다.
헬싱키 역에 도착하면 바로 옆에 중앙 우체국이 있다. 숙소를 찾기 전 가장 먼저 들린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보기 좋게 진열된 수십 장의 엽서를 보자마자 이번 ‘여행자의 편지 프로젝트’는 수월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여긴 무민과 마리메꼬의 나라 아닌가. 색색의 패턴과 귀여운 디자인이 소장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엽서 종이 질과 인쇄 퀄리티도 훌륭했다. 그 외에도 눈 내린 자작나무의 풍경 사진과 헬싱키 주요 관광지가 담겨있는 사진엽서 등 선택지도 다양했다.
마음껏 고른 엽서를 계산하며 우표를 함께 사고 싶다고 말하자 직원은 두툼한 스크랩 북을 꺼냈다. 다양한 우표가 종류별로 스크랩되어있는 책을 받아 들고 천천히 구경해도 되겠냐고 양해를 구하고 보물 지도를 받아든 듯 샅샅이 살폈다. 세상에나, 거기에는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멋진 우표들이 가득한 게 아닌가. 우표만 사서 기념품으로 간직해도 좋을 것 같았다. 고풍스러운 것부터 헬싱키의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까지 다양하게 골라 담았다. 이때만큼은 마음에 드는 옷을 색깔별로 쓸어 담는 멋쟁이처럼 욕심부렸다. 차라리 아무 글도 쓰지 않고 빈 엽서를 보내는 게 더 좋지 않을까 고민될 정도로 예뻤으니까. 그 정도로 헬싱키의 엽서와 우표는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웠다.
이번 여행에서도 틈나는 대로 엽서를 꺼내 편지를 썼다. 치앙마이 때처럼 절박한 마음은 아니었다. 몇 해 만에 많은 게 바뀌었다. 나는 계속 글을 쓰기로 했고, 책 만드는 일도 그만두지 않았다. 그 사이 아이들은 꽤 컸고, 나는 병을 얻었으나 운 좋게 이겨냈다. 손바닥 뒤집듯 좋았다 절망했다 반복하던 날들이 쌓여 지금은 다시 고요하게 순항 중이다. 이번 여행자의 편지에서는 지금의 이 행복을 전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다.
몇 해 전 치앙마이에서와는 전혀 다른 마음으로 여행을 왔습니다. 그때는 다 싫었거든요. 애쓰며 사는 저를 스스로 대견해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힘들어 보인다고 할 때마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떠난 여행이 많은 것을 회복시켜 줬고 이번 여행은 회복할 필요 없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시간이랍니다. 그동안은 사치라고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꼭 필요했다는 걸 알았어요. 내가 원하는 것들을 보고, 먹고, 즐기는 하루를 만드는 거요.
- 헬싱키에서 썼던 엽서 글 중에서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희정입니다.
7월의 첫 번째 뉴스레서를 보냅니다. 장마가 시작도 안 하고 일찍 끝났다는 소식에 저 혼자 속상해하고 있었는데, 요 며칠 계속 비가 내리지 뭐예요. 매일 행복하게 우중산책을 즐기고 있어요. 한동안 꽤 열심히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 오는 날을 싫어하는 분들께는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며칠만 참아주세요.
2025. 7. 16.
희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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