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일상 너머의 미술관
마흔의 여름방학 : 헬싱키에서 보낸 일주일
헬싱키에서 지도를 보고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미술관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곳의 적막을 좋아했다.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 내거나 기존에 있던 것을 의외의 용도로 바꿔버리는 사람들의 전시장. 창작자와 관람객, 예술가와 애호가 사이의 어색한 기류가 싫지 않았다.
낯선 것들이 가득한 하얀 벽과 정의 내리기 힘든 것들 사이를 걷다 보면 시공간을 뛰어넘은 듯 다른 차원의 내가 됐다. 커다란 문 하나를 열고 들어왔을 뿐인데, 바깥세상과는 마치 다른 곳인 듯 고고한 이곳을 공기가 마음에 들었다. 내 마음대로 오해할 수 있는 차분한 환상 같아서, 바로 조금 전까지의 일상은 마치 까마득히 옛날 일이 되어버렸다.
공들여 해석하지 않으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설명 대신, 작품에만 집중하는 헬싱키의 미술관은 조금 더 직관적이다. 설명을 읽지 못하는 이 상황이 얼마나 홀가분한지.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저 즐긴다. 그러다 보면 마음으로 훅 들어오는 게 있는가 하면 느슨한 거름망도 통과하지 못하고 걸러지는 것들이 있다. 오로지 내 취향과 감각만으로 작품을 보는 시간. 미술관에는 그런 자유가 필요할 때 자주 찾았다.
혼자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하지만 특히 미술관은 꼭 혼자여야 한다. 함께 발맞춰 걸어야 할 상대가 있다면 각자 관람이 끝나고 만나자 약속 시간을 잡고 굳이 혼자가 되길 자청한다. 함께 온 친구에게는 미안하지만 작품과 작품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아무와도 이야기하지 않기를 즐긴다. 대신 머릿속에는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말이 맴돈다. 대부분 남에게 들려줄 수 없는 아주 우스운 것들이지만 어떠랴. 내가 미술관을 즐기는 방법은 오래전부터 오로지 내 취향과 직관에 솔직하기 였다.
오늘 아모스 렉스(Amos Rex)를 찾은 것은 아누 투오미넨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였다. 발걸음을 잡는 흥미로운 부분이 너무 많지만 우선은 아누 투오미넨의 작품 앞으로 직진한다. 그리 크지 않은 테이블 위 조용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던 그녀의 작품을 보는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가 이 작품을 보기 위해 멀리 떠나왔음을,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벅찬 마음을 겨우 진정시킨다. 헬싱키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대형 미술관에서 오로지 이 작품만이 나에게 의미가 있다. 이 작가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공부한 것은 더더욱 아니면서. 그저 ‘좋다’는 가볍고 순진한 마음은 어느 날 갑자기 비행기에 몸을 싣게 만들기도 한다. 서울에서 열렸던 우연한 전시 한 번의 끌림이 지금의 이 시간을 만들었다니, 우리 삶에는 얼마나 많은 예측 불허가 기다리고 있는 걸까.
비슷한 자리에서 같은 작품의 사진을 수십 장 찍고 나니 이제야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상상하던 것이 현실이 되었고 그 증거는 내 핸드폰 속에 여러 장의 이미지 파일로 저장되었다. 헬싱키에 와서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을 끝낸 홀가분함만 남았다. 이제 오늘부터의 돌아갈 때까지의 시간은 덤. 퇴근 후 마시는 맥주 한 캔처럼 기분 좋은 보상만 즐기면 된다.
천천히 미술관을 돌아보며 작품들을 하나하나 다시 관람했다. 오래 기다려야 하는 작품 앞에서는 지루함 없이 순서를 기다렸다. 어차피 나는 지금 혼자. 내가 돌봐야 하는 것도 나 하나. 얼마든지 한 작품 앞에 오래 머무르는 것이 허용되는 혼자만의 여름방학을 누린다.
전시장이었던 지하에서 올라오니 지상의 구불거리는 구조물에는 아이들이 가득하다. 헬싱키로 오기 전, 크고 작은 돔 형태의 이곳 사진을 보고 아이들과 오면 참 좋겠다 생각했었지. 기어오르고 구르도 뛰어내리는 아이들을 보며 메시지 창을 열었다. ‘엄마 오늘 너무 좋은 일이 있었어.’
안녕하세요. 희정입니다.
6월에 보냈어야 하는 메일을 이틀 늦게 보냅니다. 죄송해요. 6월에 지원 사업이 너무 많아 바빴어요라고 하기엔 아무것도 안 하는 날 침대와 한 몸이 되어 몇 시간씩 게으름을 피우기도 했네요. 저는 그럴 때면 뭔가 쓰레기 같은 기분이 되는데 남편이 아마도 소속과 퇴근이 없어 쉬는 것을 괴로워하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면도 있겠지만. 정확하게는 이 뉴스레터처럼 약속된 날짜에 하기로 한 것을 지키지 못하게 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인 것 같아요. 여러모로 프리랜서란 참. 자제력이 강해야 하는데 인스타에 릴스가 등장 한 후로 그것도 어렵네요. 유튜브는 보지 않아서 아예 들어가지 않는데 인스타는 그럴 수가 없단 말이죠.
뉴스레터를 무료 구독으로 바꾼 후에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dm으로 보내주셔서 글이 안 보인 다거나 이미 구독 중인데 다시 구독을 하라고 하는 등(그런데 할 수 없는 것 등등)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계속 메일리에서 해야 할지 개인적으로 메일을 발송해야 할지 고민 중에 있습니다. 지금은 모두 보실 수 있게 바뀌었으니 글은 잘 보이실 거예요. 불편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그래도 떠나지 말고 구독해 주세요. (응?)
헬싱키에서의 날들을 보내게 되어 기쁩니다. 작년 7월 말에 떠났으니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네요. 올해는 이 여행기를 마무리할 수 있을까요? 속도를 좀 내봐야겠습니다.
또 편지할게요. 건강한 여름 보내세요!
25.7.2
희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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