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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 엄마

#21. 낙망(落望), 조붓하다

2025.05.26 | 조회 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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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작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낙망(落望)

: 희망을 잃음.

 

  • 단어를 찾은 곳

"그럼 두 시간 후에 만날까?"

아무것도 모르는 김장우는 단지 시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마음속으로 끙, 한숨을 쉰다.

"그게 아니구요. 지금 막 약속이 있어서 나가려던 참이었거든요. 전화를 좀 빨리 하지…"

나도 모르게 마음속의 말이 나와버리고 말았다. 김장우는 잠시 낙망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김장우의 낙망에 가슴이 찌르르 아프다고 느끼는 순간 나는 스스로에 대해 놀란다. 아니, 이러면 안 돼.이럴 것 같았으면 운명에 맡기지 말았어야지. 나는 얼른 고개를 흔든다. 어쩌면, 아니 틀림없이, 김장우와 먼저 약속을 정한 뒤 나영규한테 전화가 왔더라도 이런 기분일 것이다.

양귀자, 모순, 69쪽

  • 나의 단어라면
두근두근이란 말을 쓰면서도 그것이 정말 박동으로 느껴지는 수준이라고 생각해본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게 진짜 가슴이 그렇게 뛰어서 하는 말이었다니, 너무 뛰어대는 마음때문에 괜히 숨도 벅찬 것 같았다. 진짜 너무한 단어구나 이거. 이렇게 가고 싶으면서도 가기 싫은 일은 처음이었다. 들고 있는 장미가 가시도 없이 나를 찌르는 것 같았다. 그 애가 좋아한다는 초콜릿은 하필 아무데서나 팔지 않는 것이어서 때아닌 옆동네 구경을 했다. 내가 이렇게 달달한 사람이었나 쓴 웃음을 지었다. 거절당할 일도 생각했다. 거절당해 느낄 낙망의 비용과 옅어지는 희망을 쥐어들고 살아가는 효용을 수도없이 고민했다. 계속되는 저울질은 어느새 발걸음이 되어 나는 밖을 나가고 있었다. 햇살은 차가웠다. 아니, 뜨거웠다. 그렇지 햇살은 원래 뜨거운 건데, 정신이 하나도 없다. 아무튼 나는 도착했다. 너는 다행히 늘 있던 자리에 있었다. 그것부터 고마워하는 찌질한 나는 결국 그애 앞으로 갔다. 그 가벼운 것을 그렇게 무겁게 주면서, 그렇게 너무 힘을 줘 툭 내려놔버린 한마디는 사랑해.

조붓하다

: 조금 좁은 듯하다.

 

  • 단어를 찾은 곳

스케줄 발표를 마친 나영규는 그제서야 내 얼굴을 돌아다보며 활짝 웃는다. 자신의 발표가 너무나 흡족해서 견딜 수 없다는 웃음이다. 나영규라는 사람의 웃음은 전염성이 아주 강하다. 지금도 그렇다. 마음속으로는 나영규라는 남자의 일방통행에 불만을 품고 있었으면서도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웃음을 따라 화들짝 웃어버린다. 웃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무엇이 이 남자에게 있다.

동그란 눈, 아마 저 동그란 눈 때문인지도 모른다. 장난기 같기도 하고 초롱초롱 총명기 같기도 한 반짝이는 눈빛, 동그란 쌍꺼풀을 따라 낙천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둥그런 곡선. 그 밑의 조붓한 코도 전혀 세상살이에 시달린 흔적 없이 또렷하고 맑다. 푸르스름한 면도 자국만 아니라면 거기 수염이 있다고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이 남자의 입술선 또한 깨끗하다.

양귀자, 모순, 71쪽

  • 나의 단어라면
조붓한 골목길, 한쪽으로 가지런히 쌓인 연탄을 발로 차며 돌아오던 아버지는 10년 전엔 아버지가 아니었다. 엄만인데도 아빠다리로 앉아 기대 누워있는 아들의 귀를 파주는 엄마는 10년 전엔 아가씨였다. 그때까지 우리 엄마 아빠는 엄마 아빠라는 말을 듣지는 않고 쓰기만 주구장창 썼었다. 우리 엄마가 뱉은 엄마보다 들은 엄마가 많아질때쯤, 내가 처음 엄마 소리를 들었다. 애기일 적 엄마 부른소리가 내 귀에 다시 들어오기까지 그렇게나 오래 걸렸다. 나는 엄마를, 엄마는 엄마의 엄마를, 엄마의 엄마는 엄마의 엄마의 엄마를. 강산이 세번 바뀔 시간동안 엄마는 산이 되어 나에게 나타나 있었다. 멀리서 보면 찰나같은 짧은시간 우리는 우리보다 조금 더 앞선 사람에 기대어 곧이어 나에게 기댈 누군가를 위해 굳어가고 있었다.

추신

저는 무언가 쓸거리가 떠오르면 음성인식으로 와다다 말해놓고 나중에 고치곤 합니다. 그런데 가끔, 까먹고 고치지 않은 글을 보면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 작은 이야기 하나가 사라지는 듯해 아쉽고, 그렇게 사라졌을 수많은 나의 모습들은 어땠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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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비의 프로필 이미지

    은비

    0
    10 day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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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답글 (1)
  • 모서리의 프로필 이미지

    모서리

    0
    9 day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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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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