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단어

병아리와 점자

#16. 방기(放棄)하다, 추호(秋毫)

2025.04.22 | 조회 92 |
4
나의 단어의 프로필 이미지

나의 단어

매주 작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방기(放棄)하다

: 내버리고 아예 돌아보지 아니하다.

 

  • 단어를 찾은 곳

그랬다. 나는 흘러간 유행가의 제목처럼 참 바보처럼 살았던 것이었다. 그런 깨달음이 언제부터인가 아주 조금씩, 마치 실금이 간 항아리에서 물이 새듯 그렇게 조금씩 내. 마음을 적시기 시작했을 것이었다. 항아리의 균열은 점점 더 커지고, 물은 걷잡을 수 없이 새들어오고, 마침내 마음자리에 홍수가 나버려서 이 아침 절박한 부르짖음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이렇게.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홍수가 나버리도록 마음자리가 불편할 때까지 나를 참게 한 힘을 무엇이었을까. 인생을 방기(放棄)하고 있다는 자괴감에 시달리면서까지 무위한 삶을 견디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양귀자, 모순, 18쪽

  • 나의 단어라면
오래전에 시대가 방기한 큰 감성은 지금 우리가 오글거리다고 표현하는 것들이라 생각한다. 대체어도 찾지 못해 오글거린다고 표현하는 그 일들은 순수하고 따듯하고, 귀엽다. 동시에 부끄럽고 얼굴이 벌개지고 귀 끝이 간질거린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만을 생각하며 사랑 고백을 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 같다. 남의 고백을 화면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이 와 버려서인진 몰라도, 부끄럽게 꺼내는 마음이 누군가에게 쉽게 공격받을까 두려워 햇빛아래 한참 말려 가져오는 것 같다. 그래놓고 그 건乾마음도 마음과 같다고 들이대는 찌질함. 솜털가득한 채로 색색거리는 작은 병아리를 두 손에 소중하게 담던 아이의 마음으로, 누가 뭐래도 이 놈은 다치지 않게 데려가겠다는 눈빛으로, 나는 어른이 될 것이 아니라 먼저 아이가 되어야 겠다.

추호(秋毫)

: 가을철에 털갈이하여 새로 돋아난 짐승의 가는 털.

: 매우 적거나 조금인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단어를 찾은 곳

내 삶이 이토록 지리멸렬해진 것을 모두 다 어머니에게 떠넘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원인을 분석한다고 때로는 문제가 있는 가정에, 혹은 사회에, 아니면 제도에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나는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가끔 그런 분석들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자신의 방종을 정당화하려는 젊은 애들을 만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의 교활함을 참을 수 없어한다. 특히 열대여섯 되는 어린애들이 텅 빈 머리로 앵무새처럼 그런 핑계를 대고 있으면 뺨이라도 한 대 올려붙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야 한다. 영악함만 있고 자존심은 없는 인간들.

양귀자, 모순, 21쪽

  • 나의 단어라면
서로 다르게 떨어진 점들을 너는 읽을 수 있었고 나는 볼수 밖에 없었어. 그럼 너의 세상은 어떻게 생겼을까. 귀찮다고 대충 설거지해 얼룩이 남아있는 접시를 읽을 수 있을까. 이리 저리 깎인 혜화동의 벽돌길을 읽을 수 있을까. 걸음대로 닳은 내 신발 밑창엔 무슨 말이 적혀 있을까. 나의 삶이 너의 삶보다 불행하거나, 그 반대라는 생각은 추호도 없어. 나는 그저 죽어도 우리는 서로의 세상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묘할 뿐이야. 모든 것이 정확히 적혀있는 이 시대 속에, 너는 더듬거리며 무엇을 읽고 있을까.

추신

이번주부턴 양귀자 작가님의 <모순>으로 이어갑니다. 책을 선정하는 기준은 우선은 제 마음이지만, 많이 읽힌 책일수록 글을 다시 읽고 반가워 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제가 좋게 읽었던 베스트셀러 중 하나를 선정하였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세요!
두번째 글은 시각 장애인 애인에게 점자로 프로포즈하는 영상을 보고 썼습니다. 그들이 너무 행복해 보여 글을 썼지만, 자칫하면 장애에 대한 지나친 낙관으로 이어지는 글이 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며 씁니다.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댓글 4개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 모서리의 프로필 이미지

    모서리

    0
    6 days 전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ㄴ 답글 (3)
© 2025 나의 단어

매주 작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뉴스레터 문의JH1047.2001@maily.so

메일리 로고

도움말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뉴스레터 광고 문의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