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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의 매생이국

#22. 짐짓, 촌평(寸評)

2025.06.03 | 조회 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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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작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짐짓

: 마음으로는 그렇지 않으나 일부러 그렇게.

: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주로 생각과 실제가 같음을 확인할 때에 쓴다.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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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감각기관이 확실히 남자들보다 발달한 것 같아요.오늘 아침에 동생이 내 팔뚝을 꽉 잡더니, 오빠, 요새 연애하지? 누구야? 나한테 소개해주지 않으면 재미없을걸? 이러는 거예요.와, 아주 족집게예요.”

"그래서 뭐랬어요?"

"족집게 도사한테 당할 수 있나요. 맞습니다, 맞아요, 하고 술술 다 불었지요. 지금쯤은 아마 엄마도 알고 있을걸요. 고것이 가만히 입 다물고 있을 리가 없어요."

나는 이 발언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하게 대처하자고 마음을 먹는다. 주위 사람을 동원해서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이런 대화의 기술도 어김없이 내가 정한 유치함의 범위에 속해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유치함이 문제가 아니다. 그는 마음을 정했을지 몰라도 나는 아직 아닌 것이다.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경솔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꾸한다.

"여동생들은 오빠한테 늘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요? 나한테 오빠가 있었다고 해도 나 역시 매주 일요일마다 그런 말을 했을 걸요."

"예? 아, 예…”

내 말을 얼른 이해하지 못해서 잠시 곤혹해하는 나영규. 모르는 척 짐짓 바깥에 한눈을 파는 안진진. 운전에 열심인 척하면서 내가 한 말을 곰곰 따져보는 나영규. 잠시 후 어떤 해석을 내릴지 몹시 궁금하다고 생각하는 안진진. 그 사이 자동차는 구파발을 지 나고 있었다.

양귀자, 모순, 72쪽

  • 나의 단어라면
유월이면 부쩍 해가 뜨거워진다. 문을 열고 나설 때마다 느껴지는 더위에 놀라지만, 매년 느끼는 햇살이니 짐짓 모른체한다. 지난 겨울, 얼어 붙진 않을까 살아있지 않은 것들이 지켜주던 시간을 지나, 기다렸다는 듯 살아있는 것들이 요동치는 계절이 온다. 이 계절에 펜촉은 다른 때보다 조금 더 가볍다. 싱그러움은 자랑처럼 번쩍거리고, 밤은 무심한듯 평소보다 긴 낮잠을 잔다. 부시럭거려도 땀이 흐르고, 땀은 가만히 앉아 흘리던 눈물보다 훨씬 짜다. 내려 쬐는 것은 사랑, 뜨거운 모래밭에 촐싹거리던 여름은 새빨갛고 새파란 계절. 가만히 앉아 쉴새없이 꿈틀거리는 글을 쓴다. 계절에 맞추어 움트는 글은 갓잡은 듯 신선하다. 짐짓 좋은 계절이다.

촌평(寸評)

: 매우 짧게 비평함. 또는 그런 비평.

 

  • 단어를 찾은 곳

"그렇군요. 진진씨한테는 오빠가 없군요. 걱정 마세요. 내가 오빠 하면 되잖아요? 그렇죠?"

마침내 엉뚱한 해석을 내리고 활짝 웃는 나영규. 나도 그만 그 웃음에 전염되고 말기로 작정을 한다. 그러다 문득, 운전하는 남자의 자신만만한 옆얼굴을 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흔든다. 엉뚱한 답변이 아니었다. 아주 적절한 수비가 아닌가 말이다.

흠, 절대 만만치가 않아. 조심해야지.

5월의 화창한 어느 일요일, 나는 몸을 사리고 한 남자와 본격적으로 데이트를 하기 시작한다. 동그란 눈을 가진 남자는 운전을 하는 틈틈이 테이프박스를 뒤져서 열심히 음악을 공급했고, 스쳐 가는 풍경들에 대해 일일이 촌평을 하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양귀자, 모순, 73쪽

  • 나의 단어라면
중학교 국어시간, 서로의 인상에 대한 촌평을 적어 교환하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내가 짝사랑하는 그 애에게 줄 짧은 말을 찾고 있었다. 좋은 생각이 났다. 킥킥웃으며 나무냄새 나는 연필로 네글자를 적어 그 애에게 주었다. 곧 이어 그애는 또 시작이네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네 글자는 매생이국. 그 애는 매생이국 같은 사람이었다. 웃기는 소리같지만 정말 그렇다. 바다를 그대로 퍼온 것 같은 국은 기름이 떠 반짝거린다. 나는 그 반짝거리는 놈의 속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매생이국 처럼, 번듯하고 조용해보이는 그 국안에 끓을듯 뜨거운 속내가 있을 것이라곤 아무도 예상 못하듯이, 나는 그애의 매력에 매번 당하고 말았다. 귀여워만 보이는 얼굴 뒤엔 불같은 성격이 있었다. 그 애는 마음에 드는 것은 뜨겁게 사랑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더 뜨겁게 싫어했다. 누구 하나 앞에서도 잘 보일 이유 없듯이 구는 그 당당함이 부러웠다. 여기저기 휘둘리기 좋아하던 나는 그런 불같은 확실함이 좋았다. 매생이국은 당하는 맛이다. 그 뜨거운 속내가 궁금해 여념없이 숟가락을 집어넣는 것이야 말로 매생이국의 매력이다. 그 애와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바보같이 찔러보는 것이 사랑이라고 나는 그때 알았다. 너 이거 무슨 뜻이야 하고 그 애가 물었다. 나는 너가 매생이같이 못생겼다고 말해버렸다.

추신 1

오늘 소개한 소설의 두부분은 이어지는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자신있지만 어딘가 투박한 나영규는 김장우보다 조금은 더 보편적인 남성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점에 지루함을 느끼다가도 매력을 느끼는 안진진의 알수 없는 마음을 잘 풀어낸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추신 2

지각해서 죄송합니다. 늦게 글을 완성하며 제 글을 읽는 것이 루틴이 된 분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문득 했습니다. 지각은 여러 핑계가 있겠지만 그중 말하고 싶은 것은 '짐짓'이라는 단어입니다. 짐짓의 두가지 뜻이 상충되는 부분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첫번째 뜻은 '괜히'에, 두번째 뜻은 '과연'에 가깝다면, 모두 담아낼 수 있는 글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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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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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day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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