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단어

잔 받침과 까슬거리는 수염

#01. 성글다, 무람없다

2025.01.06 | 조회 398 |
1

성글다

: 물건의 사이가 뜨다 = 성기다

 

  • 단어를 찾은 곳

어떻게 되었는지 보려고 다시 한 시간 뒤 슬리퍼를 끌고 나오자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느 사이 골목이 어둑해져 있었다. 아직 가로등은 켜지지 않았다. 두 손에 페인트 통과 붓을 들고 엉거주춤 서서, 수백개의 깃털을 펼친 것처럼 천천히 낙하하는 눈송이들의 움직임을 나는 멍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한강, 흰, 15쪽

  • 나의 단어라면

겨울 동안 나를 위해 목도리를 짜 주겠다는 그 사람의 다짐은 그다지 촘촘하게 지켜지진 못해 작은 잔받침이 되어 나에게 왔다. 초록색 붉은 색 실을 섞어가며 만든, 겨울이 물씬 느껴지는 손바닥만한 작은 잔받침은 손이 많이 닿았던 것이라 그런지 따뜻했다. 처음이라 어설프다는 그 사람의 말대로 잔받침은 군데군데 구멍이 있었지만, 때론 성근 다짐과 잔 받침으로도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남은 네이비 색 실은 내가 넘겨 받았다.


무람없다

: 예의를 지키지 않으며 삼가고 조심하는 것이 없다.

 

  • 단어를 찾은 곳

자신을 버린 적 있는 사람을 무람없이 다시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그녀가 삶을 다시 사랑하는 일은 그때마다 길고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했다. 왜냐하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 테니까. 내가 가장 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돌이킬 수 없이 서늘하게 등을 돌릴 테니까. 그걸 나는 투명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걸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한강, 흰, 97쪽

  • 나의 단어라면

사랑은 침입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와 친해지는 일에 대해, 우리는 보고 느끼는 것이 많아질 수록 더욱 견고해 진다. 선을 넘지 않는 것이 높은 수준의 미덕이 되는 요즘, 나는 가끔 그 견고해진 마음의 겉면을 무람없이 침입해줄 사람을 찾는지도 모른다. 예의와 체면차리기를 이겨낸, 친해지고 싶다는 그 이기가 만든 나를 향한 무례가 속편하게도 좋다. 불편하지만 또 친근한 어린날 아버지의 까슬거리는 수염같이.


추신

나의 단어를 시작합니다. 제가 단어를 고르는 기준은 제가 백지에 써낼 수 있는지 입니다. 바나나를 테이프로 벽에 붙인 작품을 아시는지요. 너무 단순한 작품에 나도 하겠다 생각하면서도, 흰 벽만 주어진 내가 그것을 생각할 수 있을까 가끔 생각합니다. 백지에 문장을 적어나가며, 제가 제 손으로 써 내려가고 싶은 단어들을 열심히 찾아보려 합니다. 가끔은 공부중인 스페인어도...할수도 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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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밥왕의 프로필 이미지

    김밥왕

    0
    1년 이상 전

    너무 재밌어요..🤤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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