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단어

움트는 카세트테이프

#08. 박명(薄明), 살풍경(殺風景)하다

2025.02.24 | 조회 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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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작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박명(薄明)

: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 얼마 동안 주위가 희미하게 밝은 상태.

: Aurora

 

  • 단어를 찾은 곳

그녀가 이곳을 떠날 날이 가까워질 때, 더이상 허락되지 않을 이 집의 어둑한 고요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있을 것이다. 끝나지 않을 것같던 밤이 지나가고 커튼 없는 북동쪽 창이 짙푸른 박명을 들여보낼 때, 군청색 하늘을 등진 미루나무들이 서서히 깨끗한 뼈대를 들어낼 때, 그녀가 세든 건물의 누구도 아직 집을 나서지 않은 일요일 새벽의 고요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있을 것이다. 조금 더 이대로 있어달라고. 아직 내가 다 씻기지 못했다고.

Sería cuando pasaran las noches que parecían interminables y la ventana, sin cortinas del noreste dejara pasar una aurora violácea.

한강, 흰, 101쪽

  • 나의 단어라면
느려지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느려지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여유가 있어야 느려질 수 있다고. 그러다 문득 길을 잃어 헤매던 어느 날, 길 모퉁이를 돌아 섰을 때, 길 끝에서부터 움트는 박명을 보았을 때, 느려져야 여유가 생긴다고 생각했다. 검색만 하면 전부 알려주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되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말만해도 글로 받아 적어주는 화면을 등지고 구태여 종이에 꾹꾹 글을 적어나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반듯이 닦인 길바닥에서 스치듯 지나가는 너무 많은 타인들과 같은 속도로 살아갈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너무 열심히 살아온 것은 아닌가. 빠르게 뛰는 것에 익숙한 두 다리가 천천히 리듬을 타며 제자리를 빙글 돌 때까지, 느려지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살풍경(殺風景)하다

: 풍경이 보잘것없이 메마르고 스산하다.

: 매몰차고 흥취가 없다.

: 광경이 살기를 띠고 있다.

:Desolación

 

  • 단어를 찾은 곳

밤사이 내린 눈에 덮인 갈대숲으로 그녀가 들어선다. 하나 하나의 희고 야윈, 눈의 무게를 견디며 비스듬히 휘어진 갈대들을 일별한다. 갈대숲으로 둘러싸인 작은 늪에 야생오리 한쌍이 살고 있다. 살얼음의 표면과 아직 얼지 않은 회청색 수면이 만나는 늪 가운데서 나란히 목을 수그려 물을 마시고 있다. 그것들에게서 돌아서기 전에 그녀는 묻는다. 더 나아가고 싶은가. 그럴 가치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라고 떨면서 스스로에게 답했던 때가 있었다. 이제 어떤 대답도 유보한 채 그녀는 걷는다. 살풍경함과 아름다움 사이에서 절반쯤 그어있는 그 늪가를 벗어난다.

Se aleja de la orilla de ese pantano que está a medio congelar entre la desolación y la belleza. 

 

한강, 흰, 105쪽

  • 나의 단어라면
기억이라는 것은 이상해서 가끔은 더한 자료없이 냄새나 소리같이 단순한 정보만 남는 것이 더 행복할 때도 있는 것 같다. 그것 말고는 전부 까먹도록. 힘들었던 날의 못견딜 듯한 고통도, 유난히 우울하던 날 본 아스팔트의 살풍경함도, 아플것 같이 내리쬐던 햇빛의 따가움도. 나는 오늘부터 카세트 테이프를 사려 한다. 그리고 그 안에 언젠가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의 음성이 들어 있을 때 내 눈에 얼마나 보이지 않는 행복들이 가득할지, 보이지 않는 그리움이 나를 감쌀지 설레고 두렵다. 앵앵거리는 모기 소리를 들으며 내가 사랑한 한여름의 날들을 떠올리기를, 물린 자리가 가려워 긁다 부어버린 팔뚝은 잊고.

추신

서점에서 스페인어로 적힌 <흰>을 샀습니다. 스페인어를 잘 몰라 퍼즐맞춰가듯 읽지만, 좋아하는 문장들이 다른 나라의 언어로 어떻게 전달되는지 아는 것이 즐겁습니다. 아 그리고 챗지피티가 똑똑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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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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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근

    0
    about 1 month 전

    살풍경이다 살풍경하다 차이가 있을까요 서씨의 말로 차이를 해석해주세요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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