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단어

풀 비린내와 붉은 하늘

#02. 물큰, 번민하다

2025.01.13 | 조회 66 |
0
나의 단어의 프로필 이미지

나의 단어

매주 작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물큰

: 냄새 따위가 한꺼번에 확 풍기는 모양

-하다 : 연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날 정도로 물렁하다. [북한어]

 

  • 단어를 찾은 곳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이마를, 눈썹을, 뺨을 물큰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걸을 때,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리란 걸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것. 눈을 감아도, 떠도, 걸음을 멈춰도 더. 빨리해도 눈썹을 적시는, 물큰하게 이마를 적시는 진눈깨비.

한강, 흰, 59쪽

  • 나의 단어라면
봄이 되어 풀 비린내가 물큰 올라오면 나는 그 사람을 생각한다. 나는 그 사람이 떠오르는 것이 싫어 풀이 자라지 않는 나라로 왔다. 새하얀 눈은 냄새가 나지 않아. 나는 더 이상 그 사람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그러다 그만 그 문장 속에도 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 버렸다. 떠오르는 것과 떠오르지 않는 것은 때론 같다. 눈은 냄새가 나지 않았지만 나를 파묻어 버렸다. 나는 파묻힌 채로 그 사람을 생각했다.

번민(煩悶)하다

: 마음이 번거롭고 답답하여 괴로워하다.≒번만하다, 번원하다

 

  • 단어를 찾은 곳

만일 삶의 직선으로 뻗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느 사이 그녀는 굽이진 모퉁이를 돌아간 자신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문득 뒤돌아 본다 해도 그동안 자신이 겪은 어떤 것도 한 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 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지도 모른다. 그 길은 눈이나 서리 대신 연하고 끈덕진 연두빛 봄풀들로 덮여 있을지도 모른다. 문득 팔락이며 날아가는 흰 나비가 그녀의 눈길을 잡아채고, 떨며 번민하는 혼 같은 그 날갯짓을 따라 그녀가 몇 걸음 더 나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제야 주변의 모든 나무들이 무엇인가에 사로잡힌 듯 되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숨막히는 낯선 향기를 뿜고 있다는 사실을, 더 무성해지기 위해 위로, 허공으로, 밝은 쪽으로 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한강, 흰, 107쪽

  • 나의 단어라면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나는 지금 내 고향에서 늘 해를 넘겨 받는다. 매일같이 밝아졌다 붉어지는 하늘을 8시간 늦은 사람들과 본다. 나는 조금 멀리서 내 고향과 내 사람들과 그리고 나를 보며, 내가 무슨 일에 왜 아파하고 있는지 생각한다. 멀리선 그들, 아니 우리의 번민이 조금 더 잘 진찰될까 하고 말이다. 모두가 현재를 살아가고 같은 해와 달을 보지만 다른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은 마땅하지만 신비로운 일이다.

추신

저는 지금 낯선 나라에 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원래 하던 고민들과는 조금 멀어지고, 새로운 고민들이 생겨납니다. 고민들도 현지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가 봅니다.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5 나의 단어

매주 작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뉴스레터 문의JH1047.2001@maily.so

메일리 로고

자주 묻는 질문 서비스 소개서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