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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나고 고사리

#07. 이태, 남루(襤褸)하다

2025.02.17 | 조회 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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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

:두 해

 

  • 단어를 찾은 곳

그런 밤에는 아무런 이유 없이 그 바다가 떠오르기도 한다. 배가 너무 작아서 약간의 파도에도 세차게 흔들렸다. 아홉살 난 그녀는 겁이 나서 어깨를 웅크렸다. 머리와 가슴을 낮추다못해 바닥에 엎드리다시피 했다. 그러던 한순간, 수천의 은빛 점들이 먼 바다에서부터 밀려와 배 아래를 지나갔다. 단박에 그녀는 무서운 것도 잊어버리고, 압도하는 그 반짝임들이 세차게 움직여가는 쪽을 멍하게 바라봤다........멸치떼가 지나갔다야. 배 고물에 무심히 걸터앉아 있던 작은 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그을린 얼굴에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늘 헝클어져 있던, 이태 뒤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 그가.

한강, 흰, 85쪽

  • 나의 단어라면
고등학생이 된 그는 망각은 너무 배덕한 능력이라 생각한다. 어느 여름날 아파트 옆동에 사는 첫사랑과, 경사로 스테인리스 손잡이에 걸터 앉아 조금씩 조금씩 손을 움직이다 손 마디가 살짝 겹쳐 포개졌던, 그날의 기억이 그에게 어느 순간 조금은 흐릿한 연 노랑색 빛으로 혹은 그런 향기로 조용히 남아 있을 뿐인 것이다. 그저 싱그러웠던 일, 고작해야 이태 전의 그 일을 그는 이미 추상적인 형태로 바꿔 마음에 집어넣고 있었다. 마치 연기를 집어넣듯이, 그는 그 향을 향해 코를 들이대며 기억을 찾았지만 어느새 허공에 코를 훌쩍거리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남루(襤褸)하다

: 옷 따위가 낡아 해지고 차림새가 너저분하다.

 

  • 단어를 찾은 곳

저물기 전에 물기 많은 눈이 쏟아졌다. 보도에 닿자마자 녹는 눈, 소나기처럼 곧 지나갈 눈이었다. 잿빛 구시가지가 삽시간에 희끗하게 지워졌다. 갑자기 비현실적으로 변한 공간 속으로 행인들이 자신의 남루한 시간을 덧대며 걸어들어갔다. 그녀도 멈추지 않고 걸었다. 사라질 -사라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통과했다. 묵묵히.

한강, 흰, 99쪽

  • 나의 단어라면
언제부턴가 정성을 들인 야채요리가 좋다. 가운데는 아니더라도 늘 밥상 한구석에 있을 법한 요리들. 향긋한 간장에 절여져 조금 숨이 죽었지만 아삭한 채썬 양배추, 원래의 향을 잃지 않을 정도만 익은 하얀 무절임, 고소한 기름에 오밀조밀 무쳐 반들거리는 채로 동그랗게 모여있는 깻잎 무침. 살짝 데쳐 이빨이 줄기 사이로 파묻혀 들어가듯 씹히는 고사리나물. 손을 닿은 요리들은 어느새 손과 비슷한 온도가 된다. 어쩌면, 남루한 마음을 따듯하게 감싸주는 건 김이 나도록 뜨거운 고깃덩이보다 숨죽은 미지근한 야채 무침일지도 모르겠다.

추신

한식이 무지하게 땡기는 하루입니다. 나물 퍽퍽 넣어서 푹푹 비벼 먹고 싶어요. 음식이나 마음이나 너무 뜨거운 것보다 미지근한 쪽이 좋은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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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송

    0
    26 days 전

    육회비빔밥먹고싶다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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