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안진진이라면 이런 도박쯤은 충분히 할 수 있을 만큼 교활하니까. 나는 마치 마지막 도박판에서 전 재산을 다 건 노름꾼처럼 굴고 있는 것이었다. 전부를 잃느냐, 아니면 전부를 얻느냐의 게임, 그러나 다 잃더라도 다음날이면 어딘가에서 다시 도박판을 벌이고 있을 노회한 노름꾼
양귀자, 모순, 158쪽
나의 단어라면
원석으로 된 반지만큼 고르기 어려운게 없다. 원석 반지를 살 생각이 없는 사람은 있을 수 있어도, 살 생각이 있는 사람 중에 빠르게 원하는 반지를 구매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난 여행, 지나가던 골동품 가게에서 원석 반지를 팔고 있었다. 원석의 종류별로 구분된 매대에는 수도 없이 많은 반지들이 쌓여 있었다. 사이즈도 다르고, 모양도 조금 달랐으며, 궁극적으로 같은 원석이라도 전부 색이나 모양이 달랐다. 나는 정말 큰일났다고 생각했다. 괜히 판매원이 노회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로, 너가 한번 골라봐라 하는 게 괜히 괘씸할 정도로. 손가락은 열개, 원석의 종류도 열몇가지, 같은 원석도 천차만별....몇개의 조합을 고민해야 하는가. 5유로 짜리에 목숨을 거는 스스로가 웃기면서도 평생 내 손가락에 들어있을 놈이라 생각하니 안고를 수는 없었다. 그렇게 정말 한참을 반지를 껴보다, 여유있게 앉아있는 사장님과 눈이 마주쳐 웃기를 몇번을 반복했다. 원석 반지는 여기서 졸업한다는 마음으로.
그날, 나영규의 키스를 순순히 받아들인 것은 모두 그가 무렴해 할 것을 염려한 나의 배려가 시킨 일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이 착한 남자를 면구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고 나는 생각했다. 잠시만 참으면 될 일이었고 그리 참기 힘든 일도 아니었다.
내가 참지 못했던 것은 키스가 아니었다. 그때 이후 시시때때로 눈 앞에서 나부끼는 나영규의 인생계획서, 그것이 문제였다.
양귀자, 모순,161쪽
나의 단어라면
세상 모든 일이 대단한 운명처럼 보이는 순간들이 있어요. 비행기 경유중, 혼자 앉아 있는 푸드코트, 앞 테이블에 한 동양인 커플이 서로 빵을 먹여주고 있었어요. 저 두사람은 어쩌다 서로 만나서, 사랑을 해서, 같은 비행기를 타고 여기 내 앞에서 밥을 먹게 되었을까. 눈앞에 보이는 일을 역산하듯 거꾸로 짚어나가다 보면 도무지 그 일이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요. 하지만 분명히 일어나고 있죠. 삶은 그렇기 때문에 즐거운 것 같아요. 거꾸로 세면 가늠도 되지 않는 경우의 수들이 어떻게든 얽혀 시간을 채워나가고 있다는 것이요. 그러니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사랑을 말할 때에나 쓰는 운명이라는 단어가 사실 모든 순간 일어나고 있고, 그것들에 전부 감격하긴 벅차서 사랑과 연결짓는 운명들만 감격하기로 한 듯 해요. 그러다 가끔 사랑 너머의 운명들을 봐 버리고, 감탄해 버리고, 다시 그것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죠. 앞에서 빵을 먹던 저 커플은 지금 키스를 하네요. 저를 면구하게 만드는 일은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추신
지난주는 비가 많이 왔습니다. 비가 어찌나 오는지, 문을 여니 물비린내가 나구요. 그래도 비가 온 덕에 더위가 조금은 꺾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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