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단어

흥얼거리며 핏줄

#17. 스러지다, 무에

2025.04.28 | 조회 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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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작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스러지다

: 형체나 현상 따위가 차차 희미해지면서 없어지다. ≒슬다.

: 불기운이 약해져서 꺼지다.

 

  • 단어를 찾은 곳

우리 집에선 그랬다. 그런 일은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장미꽃을 주고받는 식의, 삶의 화려한 포즈는 우리에게는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가난한 삶이란 말하자면 우리들 생활에 절박한 포즈 외엔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는 삶이란 뜻이었다. 이모는 집에 있었다. 그러나 완벽한 외출 채비가 오 분 뒤 이모 가 대문 밖으로 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세상에. 너한테 오늘 같은 날 이처럼 아름다운 꽃다발을 받다니. 이 꽃, 먼지가 되어 스러질 때까지, 나, 영원히 간직할 거야. 정말이다. 두고 봐라."

양귀자, 모순, 28쪽

  • 나의 단어라면
그의 머리는 쉴틈이 없었다. 매일 온갖 생각으로 가득했고 생각이 멈출 때는 노래라도 불러야 허전하지 않았다. 허전한 것을 즐기지 못하는 그는 그녀를 만났고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지금은 없는 그녀를 습관처럼 부를 때면 왜 자꾸 그 이름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지 고민하곤 했다. 그다지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닌데, 부른다고 올 것도 아닌데. 그러다 알았다. 그는 그녀의 이름으로 머리의 허전함을 채우고 있었다. 그 이름 석자는 아주 짧은 노래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멜로디가 있는 것은 강력하다. 어느새 그녀 이름은 그에게 가사가 되었다. 대사보단 가사가 외우기 쉽고, 중얼거리기보단 흥얼거리는 쪽이 훨씬 흔했다. 그렇게 그녀는 도무지 스러지지 않는 기억이 되었다.

무에

: ‘무엇이’가 줄어든 말.

 

  • 단어를 찾은 곳

아버지의 술주정이 시작되면 어머니는 전화부터 했고 우리는 곧장 대문간에 나와 서서 이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곤 했었는데. 그때의 일들을 이모는 기억 하고 있을까?

"그러엄. 사실은 말야, 내 운전 실력이 바로 너희들 때문에 부쩍부쩍 늘었다는 것 아니니. 속도위반, 신호위반하는 것도 다 그 때 배웠단다. 너희 집 아니면 내가 무에 그리 급하게 달려갈 일이 있었겠니? 그때는 말야, 삐오삐오 하는 구급등 있잖아? 그걸 하나 살까도 생각했었는데 너희 이모부가 반대해서 못 샀지. 그걸 자동차 지붕 위에 얹고 달려보면 되게 재미있을 것 같았는데 말야."

이모는 아직도 구급등을 얹어놓고 달려보지 못한 것이 못내 섭섭하다는 표정이다. 어머니나 나에게는 수치스러운 기억이 이모 에게는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아있다는 것, 그러나 그것만이 다였을까. 그걸 모를 이모가 아니었다.

 

양귀자, 모순, 28쪽

  • 나의 단어라면
일주일에 한번 집으로 오던 우리 선생님은 역사를 가르쳐 주셨다. 선생님은 지도 위에 펜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오래전 이야기를 해 주셨다. 펜을 잡느라 꽃봉오리 모양이 된 손은 유난히 도톰한 편이던 나의 손과는 조금 달랐다. 선생님 손등은 어떤 얇은 막으로 싸여져 있는 것 같았고, 튀어나온 핏줄 때문에 울퉁불퉁 했다. 어린 나는 선생님 손은 왜 그렇게 울퉁불퉁하냐고 궁금해 했고, 선생님은 뭉근한 웃음으로 나이가 들어서 그렇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 많지도 않은 나이인데, 무에 그리 나와 다르다 생각했던 걸까. 시간이 지나 나는 살이 대단히 많이 빠진 것도 아니면서 손등에 핏줄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도 투명한 새벽, 한쪽으로 누워 책을 넘기다 우연히 꽃봉오리 모양이 된 내 손이 그러했다. 선생님이 생각났다. 우리 선생님은 역사 선생님이고 역사를 가르쳐 주었다. 오래전 이야기라 생각했던 것들은 사실 오래 뒤의 이야기라는 걸 선생님도 알고 계셨겠지.

추신

오늘 제가 소개하는 소설의 단락 중엔 제가 좋아하는 문장이 있어 기울임 표시를 해놓았습니다. 요 내용이 있는 챕터의 소개 페이지에도 있는 문장인데요, 장미꽃 정도는 살 수 있더라도, 그것을 받고 즐기는 마음은 가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일 수 있구나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을 또 보란듯이 감동하는 이모를 보며 한번 더 말입니다. 가끔 요렇게 좋아하는 문장도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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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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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희

    0
    20 days 전

    쉽사리 스러지는 것들은 더 애틋하고 아린 듯 합니다 꽃 향 노을 순간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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