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단어

반칙과 오렌지 나무

#03. 홀연하다, 해쓱하다

2025.01.20 | 조회 243 |
0
나의 단어의 프로필 이미지

나의 단어

매주 작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홀연(忽然)하다

뜻하지 아니하게 갑작스럽다

 

  • 단어를 찾은 곳

이승의 것 같지 않게 홀연하던 소나무들은 철조망 너머로 줄을 맞춰 심겨 있었다. 바다는 관광 엽서 사진처럼 짙푸르고 아름다웠다. 모든 것이 경계 안쪽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숨을 참으며 다음 안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짙게 안개가 낀 새벽, 이 도시의 유령들은 무엇을 할까. 숨죽여 기다렸던 안개 속으로 소리 없이 걸어 나와 산책을 할까. 목소리까지 하얗게 표백해 주는 저 물에 입자를 틈으로, 내가 알지 못하는 그들의 모국어로 인사를 나눌까. 말없이 고개를 흔들거나 끄덕이기만 할까.

한강, 흰, 24쪽

  • 나의 단어라면
사랑하던 친구가 죽었다. 나는 그것이 반칙이라 생각했다. 우선 나에게 말도 해주지 않고 떠났다는 것이다. 새로운 학교에 들어갈 때도, 다니던 회사를 나올 때도 세상은 언제나 그 일이 일어날 것이란 걸 예고해주는데, 왜 그 아이는 예고도 없이 떠났는지 정말로 틀려 먹었다. 게다가 그 애는 몸뚱아리만 홀연히 사라졌다. 그 애는 급하게도 몸만 없어져서, 그 애의 냄새나 목소리나 취향이나 웃음은 전부 나에게 놓고 갔다. 열심히 내려놓으려 해도 되지 않는다. 다 들고 갔어야지, 순 엉터리 죽음이다. 반칙이다.

해쓱하다

: 얼굴에 핏기나 생기가 없어 파리하다.

파리-하다 「형용사」 몸이 마르고 낯빛이나 살색이 핏기가 전혀 없다. ≒ 초하다.

 

  • 단어를 찾은 곳

어둠 속에서 어떤 사물들은 희어 보인다. 어렴풋한 빛이 어둠 속으로 새어들어올 때, 그리 희지 않던 것들까지도 창백하게 빛을 바란다. 밤이면 불을 끈 거실 한쪽에 소파 침대를 펴고 누워, 잠을 청하는 대신 그 해쓱한 빛 속에서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흰 회벽에 어른거리는 창밖 나무들의 형상을 바라 보았다. 그 사람 -이 도시와 비슷한 어떤 사람- 의 얼굴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 윤곽과 표정이 서서히 뚜렷해지길 기다렸다.

한강, 흰, 30쪽

  • 나의 단어라면
빛도 들어오지 않는 집 밖으로 나가면 커다란 오렌지 나무가 있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해가 반짝이는 시간이 되면 나무는 샤워라도 한 듯 윤기를 뽐낸다. 그 앞에 있는 내 어두운 방, 불을 전부 켜도 약간은 어두운 작은 방에서는 마음도 시드는 것만 같다. 기어나오듯이 발을 떼고 문을 열면, 기다렸다는 듯 밝은 오렌지 나무가 주황빛의 열매를 고동색 가지에 걸어놓고 있다. 해쓱해진 마음이 다시 차오른다. 10분, 나는 그 모습을 보려고 10분 더 부지런해진다.

추신

예문을 쓰려고 고민하다 보면 어떻게 이 단어를 저렇게 사용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합니다. 저 단어가 지금 내 문장에 적합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참 멋있고 부럽습니다.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5 나의 단어

매주 작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뉴스레터 문의JH1047.2001@maily.so

메일리 로고

도움말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