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네, 날아오르는

습작

2025.02.05 | 조회 1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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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무

당신의 마음에 활자를 새겨넣겠습니다.

땅 위에서는 아득히 멀어 보이던 구름이, 발끝에 차이는 방구석 먼지 덩이처럼 사소해진다.

고공에 머무르는 행위는 모든 대단한 것들을 사소하게 하는 마법을 부린다. 횡단보도 없는 도로 위를 위협적으로 달리던 자동차는 보드게임 판 위를 느릿느릿 움직이는 말이 된다. 신경질 나는 경적 소리로 고속도로를 메우던 차들은 아무 기척 없이 고요해진다. 울렁울렁 흔들거리며 높은 파고를 헤치던 고기잡이 배의 살벌한 엔진 소리도 잦아들고, 수면 위에 새하얀 그림자만을 남긴 채 멈추어 있다. 바람과 함께 늘상 어디론가 도망가던 구름도 가만히, 제자리를 지킨다. 세상과 얼음 땡 놀이를 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

수요일 점심, 동네 카페의 창가 좌석에 앉아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있다. 책 속에서도 창밖에도 눈이 내린다. 언제쯤 글을 쓸 수 있을까. 괴로운 생각을 멈추려고 얼른 가방에 책을 쑤셔 넣는다. 지금 눈을 맞지 않으면 다음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장갑 낀 두 손으로 밀어젖힌 문 너머로 텁텁한 시야가 덮쳐온다.

이번 주는 또 무엇에 대해 써야 하나. 겁이 많아서, 네거리 갈랫길에서 주욱 미끄러져 건천을 따라 사정없이 굴러 떨어진 소설 속 경하가 자꾸만 떠올라서, 앞꿈치에 힘을 주어 경직된 다리로 걷는다. 눈밭 위를 꾹꾹 눌러 깊숙한 발자국을 새기며 앞으로 나아간다. 나뭇가지에서, 전신줄에서, 건물 꼭대기에서 예고 없이 머리 위로 낙하할지 모르는 눈을 조심히 살피면서.

오타가 점점 늘어 간다. 대충 움켜쥐고 있던 털목도리를 조심히 두른 다음, 장갑 밖으로 잠시 내놓아 시뻘개진 두 엄지를 도로 장갑 안에 숨긴다. 손가락 전체가 단단한 손톱으로 뒤덮여버린 것마냥 감각이 둔하다. 주먹 안으로 엄지를 밀어넣고 끈기 있게 쥐었다 폈다 하며 촉각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통이 큰 기모 바지의 밑단 틈으로 맹렬한 불청객이 들어와 바지를 둥글게 부풀린다. 불규칙하게 갈라진 허연 발목의 살갗이 따갑도록 시리다. 그즈음 나는 카페 뒷골목의 어느 아파트 단지를 지나고 있다. 바짓단을 움켜쥐려고 호주머니 안의 손을 움찔거리는 찰나, 다음 바람이 불쑥 침입한다.

그 순간, 한 번도 그 자리에 있던 적 없는 놀이터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최초의 기적이었다. 사방이 아파트인데, 이렇게 힘찬 눈이 창밖에서 손짓을 하는데, 놀이터에 나와 눈 맞는 아이가 한 명도 없다. 조연으로 잠시 머물다 갈 셈이었던 나는 엉겁결에 놀이터의 주인이 된다. 앞머리에 맺힌 가벼운 눈송이가 금방 물이 되어 축축한 모양으로 이마에 달라붙는다. 눈앞을 가리는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고, 굳은 팔을 뒤로 뻗어 후드를 눌러 쓴다.

내가 앉아 있는 이 벤치는 미끄럼틀과 흔들말과 시소가 한눈에 담기는 자리이다. 색색의 놀이 기구 표면에 결백한 것이 소복이 내려앉는 순간을 나는 목도한다. 그네가 없네, 생경해하며 두리번거리던 찰나 곁눈질로 본 등 뒤로 그네 하나가 생긴다. 그제야 귀에 들리는 삐거덕삐거덕 소리. 눈이 만들어 내는 낯익은 침묵을 꾸준한 속도로 방해하고 있다.

그네 소리가 멎지를 않는다. 저 그네의 춤은 분명 바람을 닮았는데, 더 이상 피부에 한기가 닿지 않는다. 털목도리를 주섬주섬 구겨 접어들고 일어선다. 한 짝씩 장갑을 벗어 호주머니에 넣고, 다섯 손가락을 뻗어 눈이 떨어지는 방향과 수직이 되도록 펼쳐놓는다.

따듯하다. 눈이 닿는 살갗마다 보송한 온기가 내려앉는다. 눈송이가 손바닥 위에 겹겹이 쌓이도록 내버려두다가, 사막의 둔덕만큼 수북해졌을 때 볼이 빵빵한 솜인형을 괴롭히듯 주먹 안에 가둬버린다. 이상하다, 내 몸은 아직 따듯한데. 왜 눈이 녹지 않지. 손바닥 위로 거칠게 그어진 손금을 더 깊게 만든 다음, 손금 안쪽의 짙어진 온기로 한 방울 겨우 녹은 눈을 핥는다.

그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호주머니 안에 말려 있는 장갑을 도로 낀다. 그네 옆에 운동화를 가지런히 벗고, 양말을 동그랗게 말아 눈에 젖지 않도록 운동화 안으로 밀어 넣는다. 불그스레한 맨발로 나는 눈 위에 서 있다. 손을 뻗으면 겁을 먹은 것마냥 자꾸만 도망가는 그네를 강하게 움켜쥔다. 주저없이 나무판자 위에 두 발을 딛고 그네 위에 올라탄다.

기다림을 마친 눈송이가 나에게로 달려온다. 입안을 가득 채우려 달려드는 감연한 눈송이를 온몸으로 반기며, 힘찬 발돋움으로 달려간다. 구부렸던 무릎을 쭉 펴고 바람을 가른다. 그넷줄이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삐걱거린다.

시간이 멈춘다. 눈송이가 낙하하는 소리를 듣는다. 다음 순간, 나는 육지 방향으로 크게 한 번 날개를 쳐서 고공에 그네를 띄운다.

*

세상이 이만큼 고요해지면, 나도 그만큼 잠잠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느려진 모든 존재가 영영 제 속도를 찾지 않는다면, 생은 딱 그만큼 길어질까. 시간은 무한히 늘어질까. 그럼 나는 어릴 적 꿈처럼 영원을 살게 될까. 영겁의 시간 속에서 당신과 나는 어떤 그리운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며 무료함을 달랠까.

실타래처럼 주욱 늘어진 구름. 빈틈없이 이어져 하나의 거대한 무리를 이루는 구름. 듬성듬성 구멍이 나 있어 한 덩이씩 검지손가락 끝으로 콕 찍어 한입에 쏙 넣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구름.

눈이 될까, 비가 될까. 구름의 다음 모습을 계산해 본다. 어쩌면 이미 눈이나 비가 되어 내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육지의 사람들이 백팩 옆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우산을 꺼내 머리 위로 펼칠 때, 나는 그 위로 떨어지는 것이 눈인지 비인지 알 수 없으므로 여전히 구름의 정체를 궁금해할 수 있다. 물음표를 간직할 수 있다는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

제 몸만큼 차디찬 식도 안으로 층층이 눈이 쌓인다.

멈추었던 시간이 서서히 느슨해지며 촉각이 돌아오는 것을 느낀다. 저 멀리서 흔들말과 시소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기 시작한다. 시간을 붙잡아야 해. 아직은 돌아갈 때가 아니다. 등을 돌려 제멋대로 나아가려는 시간을 뒤쫓아 옷소매를 붙잡아야 한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큰 발돋움으로 하늘을 난다.

*

이번에는 공중에서 다른 존재를 마주한다. 날개의 색조차 분간하기 힘들 만큼 먼 거리에 있는 비행기. 날아본 적 없는 내가 이토록 높이 나는 찰나의 순간에 하늘에서 서로를 비껴간다는 건, 그간 옷깃을 스친 무수한 이들에 비할 바 없이 귀한 인연이 아닐까.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솜사탕 기계에서 나오는 듯한 얇은 실바람을 뿜는 자리를 발견한다. 땅 위에 발 딛고 살았을 적에는 보지 못하던 것이다. 출처를 따라간 시선 끝에는 나보다 높은 먹구름 속을 헤쳐가는 비행기가 자리한다. ,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다. 이제 다음 발돋움을 할 차례이다.

*

그러나 이내 힘이 빠져버린다. 몸 안에 눈의 자리를 넉넉히 마련해 두지 않은 탓이다. 이제 여기서 내려 그네 타기를 그만두고 싶다. 무릎을 완전히 구부리고서, 그네가 땅과 가장 가까워지는 순간을 기다렸다 다리를 길게 뽑는다.

발이 땅에 닿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이번에는 그네 밑의 움푹 파인 바닥을 노려보다가 발끝을 있는 힘껏 뾰족하게 세운다. 땅이 너무 멀리 있는 것 같다. 다음 동작을 생각하기도 전에 땅이 시야에서 더 먼 곳으로 도망쳐 간다. 그네 옆에 벗어둔 운동화가 점점 작아진다. 미끄럼틀과 흔들말과 시소가 자그만 장난감이 된다. 머리가 구름과 믿을 수 없이 가까워진다.

제 몸을 멈추는 법을 잊은 그네 위에서, 나는 눈이 녹지 않는 가벼운 몸으로 하늘을 날고 있었다. 하늘을 나는 그네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 땅으로 돌아가면 써야 할 글에 대해 생각하면서.

*

서툴지만 소설 쓰기를 연습하는 중입니다. 이 글의 절반은 진짜고 절반은 가짜입니다. 쓰다 보니 어디가 진짜고 어디가 가짠지 헷갈려서 그냥 전부 진짜라고 믿기로 했어요. 거짓말을 하고 싶을 때는 일단 마음 놓고 거짓말만 한 다음에, 자기도 알아볼 수 없게끔 참말과 거짓말을 교묘히 섞어놓고 뭉뚱그려 그게 다 진짜라고 믿어 보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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