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숨어 있는 위험과의 숨바꼭질에서 언제나 승리한다.
둘, 체할 때까지 겁을 집어먹는다.
셋, 쫄? 한 마디에 겁을 토해낸 척한다.
유난히 걸음을 늦게 뗀 아이. 거실과 베란다 사이의 작은 문턱을 넘지 못하고 두 팔을 벌리던 아이. 계단을 오를 줄은 알지만 내릴 줄은 몰라 뒷걸음질치던 아이. 등굣길에 눈이 쌓인 날은 15분 일찍 출발해 촘촘히 가시 박힌 길을 통과하듯 좁은 보폭으로 걷던 아이. 스키를 타듯 대담하게 눈 위로 미끄러지는 아이들 무리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아이. 그러면서도 그 안전한 보폭을 결코 포기하지 못하던 아이.
어릴 적 내가 생각한 어른의 나이는 스무 살을 넘는 법이 없었다. 스무 살부터는 하고 싶은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꿈같은 말을 듣고부터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너희 부모님은 몇 살이시니, 라는 물음에도 무조건 스무 살이요, 라고 답하고는 물어본 사람의 웃는 얼굴을 멀뚱하게 쳐다보다가 영문도 모르고 따라 웃곤 했다.
누구나 스무 살이 되면 곰처럼 겁 없는 사람이 되는 줄 알았다. 상상 가능한 온갖 위험에 마음이 졸아드는 성격은 스무 살이 되면 마법처럼 사라진다고 믿었다. 반쯤 어른인 열다섯 정도가 되면 손잡이를 잡지 않고도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갈 수 있게 되고, 거의 어른인 열아홉 정도가 되면 눈비가 오는 날 운동장 위로 미끄러지는 일을 즐기게 된다고 믿었다. 그즈음엔 사소한 일에 겁을 집어먹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깨달았을 테니.
그러므로 스물의 나는 가능성이 희박한 위험 따위에 움츠러들지 않고 망설임 없이 뛰어드는 모습이어야 했다. 어릴 적에는 두려움에 애써 외면하던 일을 눈 감고도 거뜬히 해내면서, 귀여웠던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고는 속으로 한 번씩 풉 하고 비웃음을 날리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러나 스물은 꽤 빠르게 찾아오는 나이였고, 나는 여전히 계단과 눈길과 빗길을 무서워하는 채로 어른이 되었다. 어른의 자격을 못 갖춘 채 어른이 되고 싶진 않았는데. 변한 것은 어른이라는 이름을 입었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아, 또 하나 변한 게 있다면, 이제는 나의 겁에 대해 부끄럼 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 모름지기 겁쟁이는 꼭꼭 숨은 위험과의 숨바꼭질에서 언제나 승리하는 법이다. 겁쟁이에게는 보이지 않는 위험을 찾아내는 신묘한 재주가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밟고 만지고 지나칠 법한 것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그 안에 감추어진 위험을 기어코 들추어내는 것이 겁쟁이의 주된 일과이다.
가령, 겁쟁이가 보는 세상에는 밟아서는 안 될 것들이 널려 있다. 겁쟁이는 거리를 걸을 때 바닥에 뭐가 있는지 양옆으로 잘 살피면서 걷는다. 하수구 위 그레이팅과 맨홀 뚜껑은 꼭 껑충 피해서 걸어야 한다. 그레이팅의 수평이 맞지 않아 발이 살짝 빠지기라도 하면 심장이 철렁해 식은땀을 흘릴 지도 모르고, 닳고 닳아 약해진 맨홀 뚜껑과 함께 밑으로 훅 빠져버리면 땅속에서 오물을 뒤집어쓴 채 소방대원의 구조를 기다려야 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여름철에는 매끈한 돌이 깔린 길을, 겨울철에는 투명한 빙판길을 조심해야 한다. 특히, 한겨울에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흰색만 밟기’를 절대 하면 안 된다. 눈이 내린 지 며칠이 지나도 녹지 않고 오히려 단단해진 얼음이 보호색을 입고 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좁은 골목에서 빙판과 맨홀 뚜껑 중 어느 하나는 꼭 밟아야 하는 선택의 순간을 맞닥뜨린다면, 마음속으로 둘 중 하나를 고르고 그 길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길이라고 최면을 건 다음 신중하게 발을 디디면 된다.
위험을 포착하는 예민함이 극에 달했던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체육 시간에 ‘철봉 앞돌기’를 하는데, 첫 시간에 나만 빼고 남녀 할 것 없이 모든 아이들이 성공했다. 만족하신 선생님은 바로 다음 시간에 수행평가를 보겠다고 하셨다. 청천벽력이었다. 저 무서운 앞돌기를 못 하는 아이가 반에서 나 하나뿐이라는 사실에 대단히 충격받은 나는, 주말이 되자마자 집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올라가 연습을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말 내로 철봉과의 싸움에서 이겨야만 했다.
그러나, 내가 아는 거라고는 위험과의 숨바꼭질에서 이기는 법뿐이었다. 그 분야에 있어 나는 ‘먼저 이겨놓고 싸우는(先勝求戰)’ 챔피언급이었다. 땡볕에 데워진 철봉에 골반을 걸치고 몸을 앞으로 숙이려는 순간, 몸이 360도를 도는 와중에 어깨와 손목과 발목이 제멋대로 꺾일 것만 같은 공포감에 몸이 더 나아가지 않았다. 철봉 앞돌기를 하다가 관절이 꺾인 사람이 지구상에 한 명쯤은 있을 터였고, 만에 하나 한 명도 없다 하더라도 내가 첫 번째가 될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었다. 조금만 더 힘을 풀고 몸을 숙인다면, 경계를 늦추는 그 짧은 순간에 내 몸에 어떤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었다. 겁쟁이로서는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수준의 예측 불가능성이었다.
두 시간 가량 지났을 때 초등학생도 안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내 바로 옆의 철봉에 훌쩍 올라 앞돌기를 하더니, 뒤돌기까지 가뿐히 보여주고 사라졌다. 멍하니 그 애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철봉에 상반신을 걸친 채 학교 담장 너머로 해가 모습을 감출 때까지 노을을 보았다. 그날 나는 철봉 앞돌기에 잠재한 위험을 단시간에 발견해냈고, 그것의 멱살을 잡고 끝까지 놓지 않았다. 그렇게 절반은 철봉 위에서, 절반은 쪼그려 앉아서 도합 다섯 시간을 보냈고, 단단한 굳은살과 철봉 모양의 땀띠를 얻었다.
둘, 겁쟁이는 체할 때까지 겁을 집어먹는다. 평소에는 좀처럼 공상하는 법이 없더라도, 조금의 위험이라도 감지하는 순간 주도면밀하게 겁을 집어먹기 시작한다. 마치 그것이 오래전에 예정된 위험인 것처럼,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상상해야 그것이 현실에서 도망간다고 믿는 사람처럼 위험을 부풀리기 시작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반 친구에게 생일파티 초대장을 받으면 파티 전날 밤 침대에 누워 아무도 모르게 걱정에 떨었다. 내일 구름사다리에서 떨어져서 몸 어딘가를 못 쓰게 되면 어떡하지? 병원에 실려 가면 엄마아빠한테는 누가 알려줄까? 그 시절의 생일파티는 생일자의 집에 가서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으로 배를 채운 후, 놀이터에 나가 해가 질 때까지 노는 행사였다. 나는 갑자기 비나 눈이 억수로 내려서 놀이터에 나갈 엄두도 못 내고 다 같이 방에서 만화책을 읽거나 닌텐도를 하게 되길 바라는 응큼한 마음을 하고 파티에 갔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눈 감고 술래잡기’ 놀이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을 감아야만 하는 술래는 두 명뿐이었기에 술래가 될 확률보다는 도망자가 될 확률이 언제나 더 높기는 했다만, 운이 안 따라 주어 술래가 되면 티 안 나게 실눈 뜨는 법을 궁리해야 했다. 실눈 뜨기는 엄연한 반칙이었고, 들키면 뭇 아이들로부터 타박을 받을 것이 확실했다. 나는 술래를 정하는 와중에도, 술래가 되어 하나부터 스물까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숫자를 세는 와중에도, 구름사다리에서 떨어질 걱정을 구체화하며 속으로 떨고 있었다.
숫자를 다 세고 눈을 감으면 발밑에 무엇이 있을지, 어디까지 추락할지 모르는 상황을 견뎌야만 했다. 내 키보다도 높은 구름사다리에서 떨어지면 어느 뼈가 제일 먼저 부러질지 상상했다. 부러진 몸을 겨우 가누면서 친구들의 부축을 받아 병원까지 걸어가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 상상했다. 의식을 잃어 들것에 실려가면 누가 엄마아빠에게 전화를 해줄지도.
이렇게 체하기 직전까지 겁을 집어먹다보면 늘 양심을 버리고 눈을 감지 않는 쪽을 택하게 되었다. 아래로 떨어져 몸이 부서지는 상상을 되풀이하면서, 실눈을 뜨고 앞이 안 보이는 척 더듬더듬 걸었다. 어쩌다 술래가 아닌 아이 하나가 가까이에서 날 보곤 내가 실눈을 뜨고 있다고 큰소리로 고발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한 번도 눈을 뜬 적 없다고 끝까지 우겨댔다. 여전히 눈을 감지 못한 채로, 최대한 억울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렇게 생일파티가 끝나고 겁쟁이 센서가 꺼진 몸으로 집에 도착하면, 녹초가 되어 다음날 아침까지 깨지 않고 잠을 잤다. 다른 아이들도 술래가 되면 나처럼 몰래몰래 실눈을 뜨는지 궁금했지만, 묻는 순간 자백하는 꼴이 되므로 차마 묻지는 못했다.
그러나 평생을 겁쟁이로만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살다 보면 겁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럴 때 유용한 것이 바로 셋, 쫄? 한 마디에 겁을 토해낸 척하는 겁쟁이의 특성을 이용하여 스스로 자존심을 건드리는 전략이다.
체할 때까지 겁을 집어먹던 겁쟁이도, 쫄? 이라는 말을 들으면 움찔하며 겁을 토해내려 한다. 그러나 그 한 마디에 겁을 아예 집어먹지 않게 되거나 삼켰던 겁을 토해낼 수 있다면 애초에 겁쟁이가 아닌 것이다. 자존심이 상한 겁쟁이는 겁을 토해낸 척을 잘한다. 이 정도면 겁쟁이로 보이지 않겠지? 앞에서는 놀림당하는 치욕을 면할 수 있을 만큼의 연기를 하고, 긴장감으로 사정 없이 떨리는 광대 근육과 입술을 꾹 눌러 뒤로 감춘다.
끝으로, 겁쟁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겁쟁이임을 감추어야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늘 스스로에게 쫄? 한 마디를 던져 자신의 체면을 건드릴 것. 놀이공원에 놀러 가 친구들과 함께 롤러코스터에 올라타야 할 때, 하강하던 롤러코스터가 탈선하여 몸이 산산조각나는 상상이 구체화되기 시작할 때. 쫄? 한 마디를 속으로 던지고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면 된다. 몸이 다른 데로 도망 못 가게 딸깍 소리가 나도록 안전벨트를 맨 다음, 눈을 꾹 감고 즐거운 여행을 기다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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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글나무
오왕ㅎㅎ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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