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멈추는 법

매일 밤, 흐르지 않는 시간 속을 달린다

2025.04.23 | 조회 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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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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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가 되면 10분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빨래건조대에 널어놓은 운동복을 입고 거울을 보며 머리를 단정하게 누른다. 허리춤에 러닝벨트를 차고 노란색 러닝화를 신는다. 러닝벨트에는 휴대폰과 에어팟, 그리고 갈증이 나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질 것에 대비한 체크카드 하나가 들어 있다. 지퍼를 꼭 잠그고, 아직 1010분이 되지 않았음을 확인하며 현관문을 연다. 문턱을 넘는 순간부터 나는 시간을 느끼지 않는 기이한 몸이 된다.

골목길을 지나 횡단보도를 한 번 건너면 하천에 도착한다. 발목과 종아리와 허벅지를 순서대로 신중히 풀어주고 나면, 이제 달릴 준비는 끝났다.

 

달리기를 시작하면 시간은 멈춘다. 시간의 숨을 멎게 하는 것은 달리는 자만이 갖는 특권이다시간이 숨죽인 틈새로 나는 나의 길을 달려나간다.

 

천변을 달리는 것의 가장 큰 이점은 자연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릴 때는 수시로 물 쪽으로 고개를 돌려 물이 흘러가는 모양을 눈에 담으면서, 주변에 반가운 생명이 있는지 확인한다. 지난 한 달간 나는 달리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것을 여럿 알게 되었다. 예컨대 오리는 혼자 다니지 않고 꼭 두세 마리씩 줄지어 이동한다는 것, 다른 무리의 오리가 곁에 와도 아랑곳 않고 제자리에서 논다는 것, 2~3초씩 짧은 잠수를 해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먹이들로 배를 채운다는 것.

달리다가 왜가리를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봄인 듯 겨울인 듯 날이 오락가락하던 3월 초에는 운이 좋아야만 만날 수 있던 왜가리가, 요새는 매일같이 만날 수 있는 익숙한 존재가 되었다. 반환점을 지나 얼마를 걸으면 왜가리가 자주 출몰하는 자리에 도착한다잠시 속도를 줄이며 걷고 있으면, 왜가리가 물속을 신중하게 응시하다가 번개처럼 부리를 내리꽂아 물고기를 낚아채는 걸 볼 수 있다. 쪼그려 앉아 그 모습을 한참 지켜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슬쩍 관심 없는 척을 해버린다.

 

그렇게 풍경을 동력 삼아 시간을 모르며 달리다가도, 발목이 견딜 수 없이 아플 때는 멈추고 싶어진다발목에 무리가 가지 않으려면 사소한 경사도 무시해서는 안 되며, 발목에 속도를 줄이라는 신호를 부지런히 주어야 한다. 그럼에도 선천적으로 발목 가동성이 좋지 않은 탓에, 약간의 경사에도 예상치 못하게 발목 앞쪽이 뭉근하게 아파올 때가 있다. 게다가 하루라도 달리기를 쉬면 가뜩이나 굳은 발목이 더 단단하게 굳어 10분만 지나도 쉬고 싶어진다. (술과 시험공부를 핑계로 3일 만에 달린 날은 엄지 발가락과 발목과 종아리가 어떤 찌릿한 곡선으로 이어지는지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 달려야 하고, 달리면 달릴수록 발목은 단련된다. 고통을 얼른 잊으려면 시간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수밖에 없다. 자꾸만 흐르려는 시간을 고정해 두고 싶다면 멈추지 않아야 한다. 시간이 조금만 더 오래 숨을 참도록.

 

아픔을 잊게 해주는 가장 좋은 친구는 음악이다. 달리기를 할 때 나는 시간을 세는 대신 박자를 센다. 168~169BPM의 노래에 맞춰 노래와 발의 박자를 정확히 맞추는 것은 엄청난 희열을 준다. 내가 달리는 한 음악은 계속되고, 음악이 계속되는 한 나는 달린다. 음악은 쉬는 법을 모르는 초침처럼 내 발을 움직인다. 멈추지 않고 달려야만 노래가 계속될 것처럼, 노래가 끝나면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흘러버릴 것처럼 나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간다.

때때로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사람과 나의 박자를 맞춰보며 아픔을 잠시 잊기도 한다. 노랫소리를 줄이면 나의 신발과 저 사람의 신발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서로 어떻게 엇갈리는지 감지할 수가 있다. 나와 거의 같은 속도로 달리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괜히 친구를 만난 것처럼 기분이 좋아지고, 나보다 빠르게 달리는 사람을 만나면 그의 속도를 따라가지 않으려 더 큰 마음의 소리로 박자를 세며 힘을 낸다.

 

가장 벅찬 순간은 달리기를 마치고 숨을 고르는 순간이다. 그 순간만큼은 내 몸이 그렇게 가볍게 느껴질 수가 없다. 완강하게 중력을 거스르던 몸이 걸음마다 가벼워져 일순간 두둥실 떠오를 것만 같다. 두 뺨 가득 열기가 오르고 머리가 땀으로 젖은 것을 그제야 알아차린다. 땀의 온기와 바람의 냉기가 절묘히 만나며 살에 맺힌 땀방울이 식어가는 걸 감각한다. 살갗에 바람이 닿는 느낌 외에는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서서히 숨을 고른다. 바람의 눈이 되어, 천변을 걷고 있는 나의 몸을 본다. 나의 심장 소리를 듣는다.

 

밤 10시가 되면 저 멀리 하천에서 애타는 눈빛으로 왜가리가 나를 부른다. 조급한 물소리도 뒤따라 속삭인다, 오늘도 함께 달리자고. 그 부름에 응답한 지 어느덧 한 달째.

시간의 숨을 멈춰둔 채 달린 후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닫으면, 벽걸이 시계의 초침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한다. 내 심장 소리보다 큰, 거스를 수 없는 소리. 그렇게 멈춰 있던 밤이 다시 흐르고, 나도 나의 삶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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