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닌 것이 맛대가리가 없다. 아픔을 잊을 만큼 매서운 추위도 없고, 슬픔을 맡겨둘 만한 흰 꽃잎도 없다. 살다 보면 어중간한 것이 필요할 때가 있지만, 지금처럼 마음이 이도 저도 아닐 때는 확실하게 좋거나 확실하게 나쁜 것이 더 도움이 된다. 영하 10도의 추위에 반팔을 입고 오들오들 떠는 상상을 해야만 마음이 편해지는 계절이다.
수업과 수업 사이, 학생회관에 가서 천 원을 내고 학식을 먹는다. 고기가 나오는 날은 줄이 길다. 바깥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코트 단추를 여민다. 빨간 국물에 밥을 통째로 말고 반 숟가락씩 떠서 호호 분다. 얼마 없는 고기를 한 입에 먹어버려 국물만 남지 않도록, 고기는 공평히 한 숟갈에 하나씩만 올린다. 적당히 배가 부르면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커피는 하루에 한 잔만 마신다. 두 잔을 마시면 하루에 만 원을 넘게 쓰게 된다. 빈속에는 우유를 먹지 않는 것이 좋지만, 고소한 맛이 좋아 라떼만 마신다. 마시고 나면 신세한탄 같은 후회를 한다. 단 것이 당길 때는 바닐라 라떼를 시킨다. 그걸 사들고 강의실에 가는 길은 달달하게 수업 들을 생각에 기분이 좋다. 앞에 있는 책상을 두고, 왼쪽 팔걸이에서 책상을 하나 더 꺼내 컵을 올려놓는다. 사르르 녹는 거품으로 입안을 몇 번 채우다 보면 금방 컵이 비워진다. 빈 컵만 남은 책상을, 옆자리에서 같이 수업을 들어주는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그대로 둔다.
동화 같은 노래를 종일 들으면서 동화 속에 있는 상상을 한다. 현실 속에서 숨을 쉬고 말을 하면서, 뇌가 동화 속에 끈적하게 담가진 상상을 한다. 그러면 동화 같은 꿈을 꿀 것 같아서. 그러나 잠에 들면 과거와 미래가 혼란하게 뒤섞인 꿈을 꾼다. 눈을 뜨면 어느 것이 과거이고 어느 것이 미래인지 골라내려는 노력을 하다 괴로움에 다시 눈을 감는다. 다시 눈을 뜨면 또 다른 미묘한 꿈이 자기를 해석해 달라고 보챈다.
학생들을 가르친다. 목소리를 갈아끼우고 눈을 멀쩡하게 뜬다. 공부법 같기도, 인생 사는 요령 같기도 한 것을 가르친다. 틀리는 것이 두려워 거짓말하는 학생을 이해한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학생과 지키지 못할 또 다른 약속을 한다.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고 싶을 때는 남은 생활비를 확인한다. 다음 학기에 내야 할 등록금을 생각한다. 멀쩡한 직업 없이 무력하게 잔고를 채우고 글을 쓰고 읽으며 살아갈 미래를 생각한다.
새벽이 되면 집 앞 하천을 따라 달리고 싶어진다. 롱패딩을 걸치고 몇 걸음 걸으면 벌써 힘이 빠진다고 두 다리가 소리친다. 편의점에서 음료수 하나를 사서 뚜껑을 주머니에 넣고 빨대를 꽂는다. 걸으면서 마시려던 것을 5분 만에 비운다. 빈 페트병을 주머니에 넣고 에어팟 볼륨을 키워 노랫소리로 물소리를 가린다.
좋아하던 장소의 공기를 상상한다. 문을 열면 온기와 함께 어떤 습도와 어떤 냄새가 내 안에 밀려 들어왔는지 기억한다. 그런 마음으로 좋아하는 북카페에 갈 계획을 세워놓은 날은 꼭 늦잠을 잔다. 책이 있는 곳에 가지 않으니 책이 나에게서 점점 멀어진다. 좋아하는 책을 읽지 않은 지 한 달이 되어간다. 좋아하던 것들을 하나둘 삶에서 지우는 건, 마음 다해 사랑할 무엇을 만날지도 모르는 미래를 위해 마음을 비축하려는 전략일까.
나무처럼 바람에 흔들리며 살고 싶은데, 흔들리는 법을 여전히 모르겠다. 그러니 그저 떡하니 버티고 서 있을 수밖에. 부디 이 맛없는 계절이 오래 머무르지 않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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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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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무
버거울 땐 함께 버거 먹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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