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의 파문, 극장 바깥으로 번지다

현실 직시와 현실 변혁의 통로로서의 리얼리즘 연극

2025.05.21 | 조회 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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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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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거리를 두는 것만이 연극이던 고전주의의 시대는 저물고,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리얼리즘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제 관객은 '있어야 할 세상'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마주하게 되었다. 리얼리즘 연극은 저마다의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는 관객 자신이 겪어본 적 있거나, 겪고 있거나, 언젠가 겪게 될 현실이었다. 설령 무대 위 이야기가 관객 자신의 삶이 아니라 하더라도, 객석에 앉은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삶임을 그 시대의 관객은 알고 있었다.

 

리얼리즘 관객은 관찰자인 동시에 행위자로서 객석에 존재했다. 관찰자로서의 관객은 연극적 세계로부터 한 발 떨어져, 주어진 세계 속에서 자신에게 허락된 삶을 살아가는 1인칭의 를 마주하였다. 연극적 세계와의 거리, 그리고 극장이라는 공간이 허락한 현실과의 거리는 관객이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했다. 이와 동시에, 관객은 극중 인물의 온갖 감정을 함께 겪는 행위자였다. 허구적 인물의 삶은 의 삶이자 우리 모두의 삶과 다르지 않았기에, 관객은 무대 위의 누군가와 자신을 반복적으로 동일시하며 연극을 보았다. 무대 위 세계가 4의 벽너머의 허구적 세계임을 알면서도, 관객은 믿는 체하기게임의 주체로서 장면 속에 기꺼이 흡수되어 극중 인물과 닮은 자신의 경험을 돌이켜 겪었다. 이렇듯 관객은 단지 4의 벽너머를 염탐하는 시선이 아닌, 거리두기와 몰입 사이를 끝없이 오가는 주체적인 시선으로 연극을 보았다.

 

먼저 관객이 작품과 거리를 취할 때, 연극은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게 하는 통로가 되었다. 대표적인 리얼리즘 극작가인 안톤 체호프의 연극은 몰락한 귀족 계층, 중산층 등 각자의 고뇌에 처해 있는 평범한 자들의 일상을 소재로 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 자체를 벗어나 각자가 극장에 지니고 온 내면적 고뇌를 들여다보게 했다. 외적인 말과 몸짓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 인물 개개인의 심연은 연극적 세계에서 관객이 만날 수 있는 가장 가깝고도 현실적인 것이었다. 그리하여 관객은 허구의 세계와 잠시 거리를 둔 채 각자의 현실로 돌아가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자신이 수용해온 현실에 대해 생각했다. 리얼리즘 예술가들은 직접 가르치는 것보다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 더 강력한 힘을 지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리얼리즘 연극은 관객이 해결해야 할 사회적 문제를 외치는 대신, 사회적 문제를 발견하는 일을 전적으로 관객의 몫으로 남겨 두기를 택했다. 극장은 문제가 아니었던 것을 비로소 문제로 보게 하는 공간이 되었고, 관객은 가려지고 미화되었던 삶에서 탈피하여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게 되었다.

 

다른 한편, 관객은 연극에 몰입하여 극중 인물의 감정을 함께 겪음으로써 현실 변혁의 동력을 얻었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에서 바냐는 자신이 젊음을 바쳐 선망했던 교수가 위선적인 사람이었음을 깨닫고 분노에 찬 한탄을 내뱉는다. 관객이 감정이입을 통해 도달한 카타르시스는 극장을 나서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노동자 일반이 처한 현실에 대해 분노를 느끼게 하는 동력이었다. 이처럼 리얼리즘 연극은 현실에 대한 개인의 감정을 모두의 감정으로 보편화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관객은 자기 삶의 단편을 재현했던 극중 인물의 감정을 온전히 자신의 감정으로서 느꼈고, 그것이 동시대에 공유되는 보편적인 감정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렇게 관객은 거시적인 힘에 대해 공동체로서 함께 분노할 동력을 얻었다. 이 점에서 리얼리즘 연극은 관객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현실 배후의 힘에 맞서 싸우도록 하는 최초의 계기를 제공하는 예술이었다. 이것은 훗날 사회 변혁이라는 실제적 움직임으로 발전할 씨앗을 제 안에 품고 있었다.

 

이처럼 리얼리즘 연극은 관객으로 하여금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는 동시에 현실의 문제를 바로잡을 수 있게 하였다. 이는 거리두기와 몰입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관객의 주체성에 의해 가능한 것이었다. 관객은 자신이 살아가는 동시대의 현실을 새롭게 직시하게 하는 한편 변혁의 움직임에 동참하게 하는 리얼리즘 연극만의 감각을 즐기고, 거듭 관객이 되기를 선택했다. 그러한 선택은 관객의 연극-체험에 더 큰 주체성과 능동성을 부여했다. 그렇게 객석에 앉아 자기만의 시를 지으며 새로운 재현의 판을 짜는 것이 바로 리얼리즘 연극이 관객에게 부여한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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