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발 동물이 내 몸을 짓누르고 갔다

나는 땅이다

2025.01.08 | 조회 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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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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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무, <여섯 발 동물이 내 몸을 짓누르고 갔다>, 2024. 한지 위에 먹과 연필, 135X70cm.
글나무, <여섯 발 동물이 내 몸을 짓누르고 갔다>, 2024. 한지 위에 먹과 연필, 135X70cm.

1. 작품소개글

나는 몸으로 기억한다.

내 몸은 움직이는 모든 것의 흔적을 기록한다.

 

움직이는 것들은 대체로 발이 여러 개이다.

발이 두 개거나, 발이 네 개거나, 발이 여섯 개거나.

여섯 발 동물 - 말과 마부는 아니었다 - 이 느릿느릿 날 짓누르고 간 어느 날을 기억한다.

 

걷는 것이 어딘가 어색한 듯 거동이 수상쩍었다.

앞발과 뒷발의 속도가 미묘하게 어긋나는 이상한 놈이었다.

어디서 걸어본 적도 없는 것이 어설프게 걷는 흉내를 내는 것인가.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 확인해야 했다.

고것이 있는 쪽을 찾아 하늘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따가운 태양빛에 두 눈이 질끈, 감겨버린 그 여름날을 기억한다.

움푹 팬 여섯 발자국을 기억한다.

여섯 발 고것이 다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두 눈을 감지 않으리라.

그놈의 얼굴을 똑똑히 보고야 말리라.

 

나는 땅이다.

 

2. 덧붙이는 말: 여섯 발 동물의 정체를 알았다

 

진술서

진술인: 글나무

날짜: 2024. 09. 06.

사실 진짜로 길 생각은 없었습니다.

제가 감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요?

 

그 자리에 선 순간, 그냥 어렸을 때 동물백과에서 본 이구아나 생각이 났어요.

관악산역 앞에서 제 손바닥만 한 플라타너스 잎을 주우려고 허리를 숙였을 때였습니다.

그대로 허리를 푹 숙여 손으로 바닥을 짚는데, 무릎과 발가락이 당신에게 절로 닿더군요.

한낮의 햇발에 뜨듯하게 데워진 당신의 몸이 내 맨살에 닿은 첫 순간이었어요.

 

사실 나는 전생에 초식동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무를 동경하고 사랑하여 이따금씩 하늘을 보며 걷는 나는,

어쩌면 더 높은 가지에 매달린 나뭇잎이 탐나 고개를 길게 뽑던 초식동물의 마음을 닮은 것이 아닐까요.

그 마음을 열렬히 좇아가다보면 언젠가는 배가 고플 때 나뭇잎 생각이 나는 인간으로 진화하지 않을까요.

아, 지금 이 말을 하니까 더욱 배가 고파집니다.

 

나뭇잎으로 가득 차 빈틈이 없는 하늘을 보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런 하늘은 맑은 날에도, 흐린 날에도 같은 푸른색을 띠지요.

변함 없는 풍경은 시시각각 변하는 저를 위로하곤 합니다.

모든 걸 묻고 의심하는 나에게, 그럼에도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이유야 좀 다르겠지만, 하여간 저는 나무와 풀을 사랑한다는 점에서 이구아나와 닮아 있습니다.

아니지, 점점 더 닮아가고 있어요.

걷는 법을 잊어가는 요즈음, 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저답게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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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2 days 전

    앞으로는 초식 인간이라 불러드리고 싶네요;)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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