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도라 덩컨이 당신의 첫사랑이었군요. 사랑에 빠졌던 첫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때의 감정이 어떻게 당신을 이끌었나요? 그 사랑을 어떻게 지켜올 수 있었나요?
그렇게 단숨에 무언가에 빠져본 건 처음이었어요. 제가 예술에 그렇게 깊이 빠질 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 없던 터라, 스스로도 무척 놀랐어요. 첫눈에 반할 때처럼 자꾸만 궁금해지고, 알고 싶은 게 늘어가고, 심장이 막 뛰고, 무작정 뛰어들고 싶은 그런 감정이었어요.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을 몰랐던 때로 돌아가 첫 만남의 전율을 다시 겪고 싶은 그런 감정이요.
그걸 사랑을 시작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현대무용을 공부해 보기로 결심했어요. 그즈음 '공연예술의 이해' 수업에서 과제로 공연 비평을 쓰게 되었어요. 기억을 더듬어, 그로부터 몇 달 전에 보았던 첫 현대무용 공연 <작꾸 둥굴구 서뚜르게>에 대한 비평을 썼어요. 머릿속에 기록된 몸짓을 역동적인 글로 풀어내는 것이 재미있었어요. 그걸 쓰고 있는 제 자신이 왠지 좋더라고요. 그후로도 공연을 볼 때 늘 손바닥만 한 수첩 하나를 들고 가서, 공연을 보면서 제가 느끼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적었어요. 몸의 아름다움을 저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어요. 더 나아가, 그 일을 업으로 삼고 싶어졌어요. 혼자서 작품을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제가 느낀 아름다움을 글로 나누어 대중에게 전하는 일이요. 안무가, 무용수와 소통하여 작품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야기를 더해주는 일이요.
그런데 걱정이 하나 생겼어요. 예술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는 내가 감히 여기에 발을 들여도 될까?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 남겨두라는 말이 있잖아요. 좋아하는 일을 굳이 내 삶의 중심에 끌어들일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 이만큼 가슴 뛰는 일을 발견한 이상 지금의 마음을 오래 잔잔히 유지하는 쪽이 낫지 않을까, 여기서 더 파고드는 것이 과연 좋은 선택일까,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다시는 오롯하게 순수한 눈으로 현대무용을 보지 못하게 될까봐 두려웠어요. 오랜 짝사랑 끝에 만남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짝사랑의 기간이 무색할 만큼 금방 사랑이 식어버려 다시는 되돌릴 수 없게 되는 것처럼요.
“선생님, 저 고민이 하나 있어요. 제가 예술을 공부하고 싶어졌는데요. 예술을 공부하기 시작하면 다시는 지금처럼 순수한 눈으로 아름다움을 감각할 수 없게 되는 것 아닐까요? 지금 이 마음을 서서히 잃어갈까봐 두려워요.” 그때 공연예술을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께 했던 질문이에요. 선생님은 이렇게 답하셨어요.
“무언가를 알아가다 보면, 처음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걸 사랑할 수 있게 돼요. 예술을 공부한다는 건, 아름다움을 느끼는 방식이 하나둘 늘어가는 과정과 같아요. 방식이 달라질 뿐, 마음이 변하는 건 아니에요.” 그 말을 가슴에 품고, 현대무용을 사랑하고 싶은 제 마음을 믿어보기로 했어요.
아, 그런 과정을 거쳐서 '처음과는 다른 방식으로' 현대무용을 사랑하고 계신 거군요. 말씀을 들으니 현대무용만의 매력을 더 알고 싶어지네요. 모든 예술이 자기만의 언어로 말을 한다면, 현대무용은 어떤 언어로 말을 할까요? 현대무용의 문법은 다른 예술의 문법과 어떻게 다를까요?
현대무용은 몸으로 말하는 예술이에요. 아름다움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요. 거대한 것, 사소한 것, 웃게 하는 것, 울게 하는 것. 현대무용은 그중 움직이는 것의 아름다움에 초점을 둬요.
사실 신체의 움직임은 우리에게 전혀 낯선 것이 아니죠. 현대무용의 매력은 낯익은 것을 낯설게 한다는 데 있어요. 온종일 원하는 대로 몸을 움직이면서 살아가는 인간의 시계를 잠시 멈춰 놓고서, 각자의 몸이 어떻게 반응하고 움츠러들고 뻗어나가는지 가만히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 현대무용의 역할이에요.
객석 위의 불이 꺼지고 관객이 되는 순간, 저는 결심해요. ‘지금부터 내 몸뚱이를 낯설게 보겠다.’ 공연이 시작되면, 극장은 몸에 관한 온갖 상상이 펼쳐지는 공간으로 변해요. 상체와 하체가 어떤 곡선으로 연결되는지, 팔꿈치와 어깨가 몸에서 어디까지 멀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손끝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상상하는 연습을 하는 거예요.
현대무용만큼 인간이 가진 신체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예술이 있을까요? 현대무용은 다른 언어를 빌리지 않고 늘 몸으로 말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현대무용을 ‘가장 인간적인 예술’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가장 인간다운 예술이기에 가장 보편적인 예술이 될 힘을 품고 있기도 하지요. 이것은 제 오랜 확신입니다.
움직임에 대한 애착이 크신 것 같아 춤과의 사적인 관계가 궁금해지네요. 춤과 연이 좀 있으신가요?
상상으로만 꿀렁일 줄 아는 몸치입니다. 학창시절에 춤 잘 추는 사람들을 동경하기는 했어요. 동경하는 마음이 커져서 반 친구들과 수련회 장기자랑을 준비한 적이 딱 한 번 있기는 했는데, 그게 전부입니다.
누군가가 미소를 지으면 미소로 답하게 되는 것처럼, 누군가가 춤을 추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몸을 움직이고 싶어지나봐요. 춤을 춰본 경험은 손에 꼽을 정도지만, 현대무용의 세계에 깊이 들어갈수록 춤을 추고 싶다는 욕구가 불쑥불쑥 생기더라고요. 무용수처럼 움직여보고 싶어서 현대무용 수업을 들어보기도 했었고요. 현대무용과 친해질수록 몸짓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을 점점 더 예리하게 감각하게 돼요.
움직임도 전염이 된다니, 재미있네요. 현대무용을 처음 보았던 22년 말부터 지금까지, 약 2년 여의 시간 동안 현대무용의 관객으로서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도 궁금해요.
현대무용 공연을 관람하며 스스로에 대해 새롭게 배운 것이 많아요. 우선, 제 안에 자유로운 움직임에 대한 크나큰 동경이 있다는 걸 배웠어요. 무대 위 무용수들은 자신의 몸을 자유로이 던져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는데요. 날아오름, 넘어짐, 일어남의 순환을 목도할 때면, 넘어지기 위해 날아오르는 듯한 무용수들의 움직임에 늘 경의를 표하게 돼요. 무대 위 무용수들처럼 자유롭게 넘어지는 사람이 되기를, 넘어지는 순간에조차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공연을 봐요.
또, 저는 움직임에 제 감정을 입히는 순간에 최고의 희열을 느껴요. 무용은 무대 위의 몸에 객석에 앉은 자의 마음을 입힐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렇게 몸짓 하나하나가 일으키는 사소한 아름다움을 감각하고, 그러한 순간들이 모여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일은 저를 언제나 가슴 뛰게 합니다.
최근에는 공연을 볼 때 안무가의 창작 의도를 생각하는 일에 더 능숙해졌어요. 그 덕에 무용수의 몸에 제 몸과 감정을 동시에 입혀, 움직임을 함께 겪는 일이 보다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거치면서 예술가가 자신의 정신을 표현하는 방식으로서의 무용을 사랑하게 되었고, 앞으로 더욱 사랑하고 싶어요.
자, 이제 마지막 질문으로 가볼게요.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현대무용은 조금 막막한 예술이죠.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보면 정적 속에서 웃음이 터질 것 같은 기분도 들 테고요. ‘이걸 어떻게 감상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 것 같아요. 현대무용에 막 입문하려는 관객들을 위해 팁 하나 부탁드립니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현대무용을 몰랐던 시절의 저와 대화하는 마음이 들어요. 이건 제가 공연예술 수업에서 배운 건데요. 무용수의 몸에 나의 몸을 입혀보는 상상을 한 번 해보세요. 처음에는 좀 낯설어도, 금세 저 몸이 내 몸인 것처럼 몸을 움찔거리게 될 거예요. 무용수들처럼 온몸에 멍이 들지 않더라도 마음껏 날아오르고 넘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거죠. 말하자면 이런 마음으로 공연을 보면 어떨까 싶어요.
내가 가진 몸은 저 무용수들의 몸과 다르지 않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내 몸은 더 이상 객석에 앉아 있지 않다. 시선의 끝이 닿는 곳마다 내 몸이 가 닿는다. 나는 극장 안의 어디에나 있게 된다. 무용수들의 몸은 곧 어디에나 있는 몸, 모두의 몸이 된다. 자유소극장 안에서 무용수들과 무대와 관객들이 다 함께 춤을 춘다.
더 나아가, 현대무용의 아름다움은 단지 무용수의 신체가 자아내는 당돌한 힘과 유려한 곡선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제가 현대무용의 관객으로서 가장 큰 전율을 느끼는 순간은, 공간을 메우는 무용수의 움직임 속에서 '이야기'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에요. 표면적으로는 그저 동작과 동작의 연결에 지나지 않는 것 같지만, 춤의 본질에는 언제나 누군가의 절실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현대무용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작품 이면의 이야기와 감정을 읽어내 마음 깊이 감각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여러분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보세요.
토슈즈를 신지 않은 맨발. 몸에 딱 붙는 튀튀 대신, 그리스의 조각을 연상시키는 나풀거리는 드레스. 춤 하면 발레만을 떠올리던 20세기의 사람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충격을 준 몸.
자연을 닮아 물처럼 흐르는 몸. 틀을 깨는 몸. 감정을 풀어헤치는 몸. 달음박질치는 몸.
더 많은 사람들이 현대무용의 매력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더 많은 이들이 자신만의 감각으로 현대무용을 즐길 미래를 꿈꾸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꾸준히 현대무용을 알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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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사람들이 제게 이따금씩 현대무용의 매력을 물어올 때마다 설명되지 못하고 남는 무엇이 있어, 그간 못 다한 이야기를 모아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현대무용을 알아가려는 사람과 대화한다고 생각하고, 최대한 힘을 빼고 읊조리며 써내려 갔습니다. 현대무용의 매력이 조금이나마 당신의 마음에 가 닿았다면, 그것만으로 제겐 크나큰 영광입니다.
덧붙여,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국립현대무용단의 커뮤니케이터 ‘춤·사이’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3월부터 12월까지 공연 리뷰, 연습실 참관 리뷰, 안무가 인터뷰 등 다양한 콘텐츠로 국립현대무용단 블로그에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글이 업로드되면 인스타그램(https://www.instagram.com/geul._.namu/)에 공유하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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