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무용을 소개합니다 - 上

2025.02.19 | 조회 1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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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무

당신의 마음에 활자를 새겨넣겠습니다.

정적과 어둠이 드리운 극장 안. 희미한 몸들이 파문을 일으킵니다. 조금씩 꿈틀대며 몸을 풀더니, 무대 위에서 거침없이 뛰고, 부딪치고, 넘어지기 시작합니다. 반복되는 움직임과 함께 선명해지는 그 몸들을 처음 보았을 때, 어떤 마음으로 객석에 앉아 있었나요?

처음엔 어떤 감정을 느끼려 하기보다 그냥 움직임을 관찰하는 데 집중했어요. 근육의 움직임, 관절이 그리는 모양, 살과 살이 닿는 소리 같은 역동성을요. 각각의 몸이 공간 안에 자기 흔적을 남기고 있음을 느끼면서, 그 흔적을 눈과 귀로 열심히 따라갔어요.

그날 객석에 앉아 있는 동안 이상하게 몸이 점점 가벼워졌어요. 그리고 한결 자유로워진 몸으로 극장을 나섰어요. 제 몸이 지닌 잠재적인 역동성을, 무용수들의 몸을 통해 확인한 기분이었거든요. 어쩌면 저도 그들처럼 뛰고, 부딪치고, 넘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군요. 처음으로 현대무용의 관객이 되었던 그날에 대해 더 들어보죠. 기억에 남은 특별한 순간이 있나요?

아직도 기억나는 순간이 하나 있는데, 무용수들의 개별적인 몸에서 시선을 거두어 몸들이 얽힌 공간 자체로 시선을 옮겼던 순간이에요. 배우는 사람의 마음으로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모든 것을 보려고 애를 쓰다가, 갑자기 그 어떤 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 상태가 된 거죠. 멍을 때린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고, 더 멋진 말로는 초점 없는 응시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네요그날 공연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서 이렇게 썼어요.

나는 무용수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닌, 무용수들이 장악한 거대한 그림을 본다. 무용수들은 무대라는 그림의 일부가 되어 춤을 춘다. 이제 무대는 하나의 생명체이다. 그것은 부분이 아닌 전체로서 움직인다.

신기한 것은, 그 순간 불필요한 모든 요소를 걷어내고 움직임의 역동성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거예요. 하나의 몸이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직선과 곡선이 아닌, 전체의 무질서한 얽힘을 보게 된 거죠. 두 눈이 분명히 무언갈 보고 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었어요. 모호한 것, 초점 없이 흐릿한 것, 명료히 설명되지 않는 것에 더 큰 아름다움이 잠재해 있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죠. 그날 썼던 글에서 몇 문장을 더 소개할게요.

우리는 종종 정의할 수 없는 것들로부터 더 큰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같다. 관객으로서의 나를 압도하는 이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그것을 가장 잘 보존하는 길인 것 같다. 아무것도 보려 하지 않은 끝에 가장 완전한 아름다움을 찾아냈기에, 나는 비로소 자유로운 관객이 되어 무대 위로 뛰어들었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흔히 특정 예술 장르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이야기하곤 하죠. 현대무용과 당신의 첫 만남은 어땠나요? 운명적인 만남이었나요, 아니면 그냥 우연한 스침이었나요?

순전한 우연이었어요. 생각해보니 현대무용과 가까워진 계기가 신기하네요. (웃음) 예술에 막연한 관심이 생겨 예술의전당 홈페이지를 막 기웃거리기 시작한 시기였어요알바 해서 돈도 좀 벌었겠다, 공연을 쭉 둘러봤는데 그나마 친숙한 클래식 공연은 관람료가 상상을 초월하더라고요. 관람료가 비교적 저렴한 오페라하우스 공연들을 둘러보다가 '자유소극장'이라는 독특한 구조의 극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사면이 검은색인 ‘블랙박스 극장'이라고 해서공연마다 무대와 객석의 구조가 달라지고 공연 중에 무대가 움직이기도 하는 거예요. 움직이는 극장이라니, 정말 궁금해지지 않나요? 그렇게 단순한 호기심으로 공연을 보러 갔어요. 구경이나 한 번 하고 오자는 마음이었죠.

공연을 보고 나서야 그런 장르를 현대무용이라고 부른다는 걸 알았어요. 그전까지는 현대무용이 뭔지도 몰랐어요. 공연을 보기는커녕 어디서 주워들은 얘기마저 없었거든요.

 

단순한 호기심이 깊은 사랑이 되려면, 분명한 계기가 필요하죠.

재작년 가을학기, 예술을 좀 더 알고 싶어 듣게 된 공연예술의 이해수업에서 현대무용을 배우고 나서 영상을 몇 개 찾아봤어요. 현대무용 공연을 한 번 봤던 경험이 있어서 더 흥미가 생겼던 것 같아요. '현대무용의 어머니'라 불리는 이사도라 덩컨의 몸짓을 흑백 영상으로 접했던 첫 순간, 저는 그것이 지금껏 본 어떤 예술작품보다도 아름답다고 느꼈어요.

정지에서 역동을 향해 서서히 나아가다가, 정점에 다다르면 다시 서서히 정지로 돌아간다. 일련의 몸짓은 끊어짐 없이 자연스럽게 흐른다. 점층적으로 고조되던 움직임이 마침내 가장 깊은 곳에 숨은 감정까지 폭발시키고 나면, 다시 감정을 하나하나 수집하는 느리고 섬세한 몸으로 돌아간다. 나는 감정을 수집하는 느리고 섬세한 마음이 되어 그녀의 몸을 본다.

그녀의 몸짓이 제게 왜 아름답게 느껴지는지에 대해 스스로 답을 내리고 싶어졌고, 그 호기심으로 말미암아 본격적으로 현대무용의 관객이 되기 시작했어요. 같은 공연을 두세 번 반복해서 관람하며 움직임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에 재미를 느끼기도 했고요. 이후 이사도라 덩컨이 생전에 쓴 자서전과 에세이집을 읽으며 현대무용의 본질을 점차 이해하게 되었어요.

 

*

주변 사람들이 제게 이따금씩 현대무용의 매력을 물어올 때마다 설명되지 못하고 남는 무엇이 있어, 그간 못 다한 이야기를 모아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현대무용을 알아가려는 사람과 대화한다고 생각하고, 최대한 힘을 빼고 읊조리며 써내려 갔습니다. 현대무용의 매력이 조금이나마 당신의 마음에 가 닿았다면, 그것만으로 제겐 크나큰 영광입니다.

덧붙여,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국립현대무용단의 커뮤니케이터 ‘춤·사이’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3월부터 12월까지 공연 리뷰, 연습실 참관 리뷰, 안무가 인터뷰 등 다양한 콘텐츠로 국립현대무용단 블로그에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글이 업로드되면 인스타그램(https://www.instagram.com/geul._.namu/)에 공유하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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