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뼈가 녹은 자리에 남는 것은

연극 <물과 뼈의 시간> (두산아트센터, 2025.03.13-15)

2025.03.19 | 조회 1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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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무

당신의 마음에 활자를 새겨넣겠습니다.

사람은 물과 뼈로 존재한다. 탄생부터 소멸까지, 몸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물과 뼈이다. 서로에 기대어 같은 시간을 살던 물과 뼈는 소멸의 순간을 계기로 각자의 길을 간다. 생동을 멈춘 몸에서 물이 빠져나가고 마침내 뼈마저 녹아 사라진 자리에, 시간만이 남아 존재를 지킨다. 시간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 물과 뼈를 가진 어떤 몸이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에 아파했으며, 무엇을 그리워했는지.

여기, 물과 뼈로 이루어진 세 몸이 각자의 시간에서 걸어나와 각자의 극장을 짓는다. 배소현, 김시락, 최수진. 세 사람은 물과 뼈와 시간에 얽힌 각자의 이야기로 극장 짓기를 시작한다.

 

물은 자신을 무엇이라 생각할까. 뼈는 자신을 무엇이라 생각할까. 시간은 자신을 무엇이라 생각할까.

연극 <물과 뼈의 시간> 中

 

물과 뼈와 시간의 마음이 되어, 이들은 각자가 목도한 죽음을 극장에 기록한다. 죽음. 물과 시간의 매개이던 뼈를, 존재가 남긴 마지막 흔적으로 변질시키는 사건. 물이 세상에서 제 흔적을 지워버린 후에도, 뼈는 다만 세상에 남아 조용히 죽음을 말한다.

 

그 뼈는 물기 가득한 살 속에서 태어나 걷고 달렸을 것이다. ... 그 뼈는 피부와 살이 녹아내리는 시간을, 다 녹아 물이 되어 사라지는 시간을 겪었을 것이다. ... 여태 살과 피부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아직은 물기 가득한 내가 ... 소리 없이 말라간 뼈의 시간을 알 수 있을까.

연극 <물과 뼈의 시간> 中

 

, 그 희고 단단한 것은 물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기어코 산 자의 물과 만난다. 네가 죽으면, 너의 뼈와 나의 물이 비로소 만나 서로를 어루만질 수 있다. 이것은 가장 비통하고도 가장 간절한 첫 만남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멀어져버린 두 존재의 다시 없을 만남이 성사되는 시간, 장례.

물을 잃은 뼈에는 이름이 없다. 뼈는 오직 죽음만을 말한다. 물이 사라진 후에도 붙들고 울 무엇을 찾으려고, 남겨진 사람들은 뼈를 곱게 갈아 품에 안으며 떠나간 사람을 기억한다.

 

뼛가루가 날렸다. 아버지가 흩어졌다. ... 누구의 뼈가 들어갔을지 모를 분골기에 아버지의 남은 흔적들이 쏟아졌다. ... 뼈, 너는 아버지인가. 아버지였던가.

연극 <물과 뼈의 시간> 中

 

뼈에게는 제 스스로 이름을 붙일 힘이 없다. 물도 이름도 없는 뼈는 하염없이 시간을 견딘다. 물을 가진 자들이 저에게로 와서 이름을 붙여주기를 기다리며. 마침내 이름을 되찾은 뼈는, 이내 물속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생의 시간에 그토록 단단히 결합되어 있던 물과 온전한 하나가 된다. 언젠가 또 다른 물과 만나 새 몸을 이룰 것을 소망하면서.

그러나, 선형의 시간 속에서 모든 물질은 필멸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필멸 앞에 예외는 없다. 뼈도 그러하다.

 

자연은 무정하고, 죽은 자는 말이 없으며, 뼈가 녹은 자리는 기름지다. 4.3 이후 제주 사람들은 유난히 풀이 무성한 자리들을 파헤치며 죽은 몸을 찾았다. 사람이 많이 묻힌 곳에선 유독 풀이 잘 자라기 때문이다. ... 살이 녹아 사라져도 뼈는 끝까지 남는다. 최선을 다해 물의 기억을 전한다. ... 하나 뼈도 언젠가는 녹는다.

연극 <물과 뼈의 시간> 中

 

뼈도 언젠가는 물처럼 사라진다. 그러면 사랑하는 이의 죽음 이후에 남는 것이 있나. 뼈가 사라진 자리에 최후의 흔적처럼 남은 기름진 땅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나. 뼈마저 모습을 감춘 존재의 공백에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있나. 그런 것에도 형체가 있을까. 만질 수 있을까, 사랑할 수 있을까. 만져도 될까, 사랑해도 될까. 그저 바라보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면, 끝을 모르고 사무치는 그리움과 회한을 달래주는 것은 너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일까.

이제, 세 사람은 마지막 극장을 짓는다.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공통의 작별로 각자의 극장을 짓던 이들이, 함께 하나의 극장을 짓는다. 상실이 낯설었고 상실을 견디는 일에 한없이 미숙했던 세 사람이 서로를 마음으로 껴안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출렁이고 흔들리다 다 증발되어도 결국 남는 건 너를 꼭 끌어안았던 기억일 거야.

연극 <물과 뼈의 시간> 中

 

영속하는 것은 시간뿐이다. 시간의 다른 이름은 '기억'이다. 내가 한때 거기에 존재했고, 그래서 너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 너와 내가 공유했던 그 순간은 변치 않고 여기에 남아 있다는 것. 너와 나 사이에는 시계로 잴 수 없는 시간이 있으니까.

그러니, 물과 뼈가 다 녹아 없어져도 우리는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물처럼 뼈도 한순간에 바스라질까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된다. 사랑을 구성하는 것은 물도 뼈도 아닌 시간이니까. 너의 물이 좋아서, 뼈가 좋아서 그토록 널 사랑한 것이 아니니까.

 

오직 시간만이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시간은 오직 만남 속에서 경험된다.

연극 <물과 뼈의 시간> 中

 

존재하지 않는 것은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사라지지 않는 시간 속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가 된다. 물도 뼈도 없는 너를 내가 기억하듯이,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소중히 기억될 것이기에. 그렇게 소현과 시락과 수진은, 같은 시간 속에 영원히 함께 존재할 것이다.

물질은 시간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너의 물과 뼈가 없는 이곳에도 너의 시간이 있음을 알기에, 언제는 웃었고 언제는 울었던 그 모든 만남을 나는 간직한다. 나의 물과 뼈가 이 땅에서 사라지는 날까지.

 

*

배소현 x 김시락 x 최수진 연극 <물과 뼈의 시간>

두산아트센터, 2025.03.13-15

https://www.doosanartcenter.com/ko/performance/1632

실험 계획서 인터뷰 (연출 배소현)
사전 음성 안내 (프롤로그, 공연 소개, 관람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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