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나무 엽맥
온형근
여기서 저기로 나서지 않으려면
숲에서 더 느리게 서성대며 머물러야
잠휴정에 이르러 사지 기맥을 풀어 놓고
자동차가 긁어 대는 폭주의 숲 너머를
여름 폭포 소리로 갈음하고
눈을 지긋이 내리깔아 흡호에 집중하니
몸의 기운이 한 바퀴 돌며 순환하는 사이
물보라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눈보라가 두리뭉실 지천에 가득하다.
느린 보폭에서 좌정으로 돌아앉는 동안
눈길 닿는 국수나무의 속마음은 연노랗게 물들고
한 길 위 오리나무 엽맥은 샛노랗게 빛난다.
탈색의 계절을 맞이하기 위해 벗어두었던 외투를 다시 걸친다.
시작 메모
오리나무 엽맥은 샛노랗다. 오리나무 주변으로 가득 머물던 생태적 상상력이 자극된다. 추운 날의 감정과 사유는 천천히 저무는 나무를 더 잘 바라보게 한다. 차가운 바람에서 느껴지는 오래된 외로움이 그리움과 겹친다. '여기서 저기로 나서지 않으려면'으로 시작한다. 느리게 서성거리는 모습이다. 빠른 속도에 대한 반성을 담았다. '잠휴정'은 휴식과 회복의 공간이다. 높은 곳이고 둘러 앉을 만하여 명상에 좋은 곳이다. 자동차 소음조차 여름 폭포 소리로 치환하여 듣는다. 그리하여 기막힌 명소를 포착한다. 도시와 자연을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몸의 기운이 한 바퀴 돌며 순환하는 사이' 내면의 변화 또한 극적으로 연결된다. 국수나무와 오리나무는 이 계절을 통째로 드러낸다. 이 두 나무는 이제 내 마음의 거울이 되어 자리한다. 이들의 상징을 통하여 숨기고 감추는 농단의 행위를 곱씹는다. 탈색의 계절이면 어김없이 드러나는 것을 왜 모를까. 탈색은 단순한 변화라기 보다 상처를 드러낸 후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과정이다. 다시 외투를 걸치면서 새로운 시작의 이미지를 얻는다. 걸치는 사이 나는 또 새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