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

[19호] 코스모가 수야님께

돌로마이트, 여름 휴가 이야기

2025.08.21 | 조회 1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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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ave

서울과 뉴욕에 사는 두 여자가 매달 주고받는 편지로 삶을 나눕니다. #문화예술 #책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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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수야님,

 

저는 지난달부터 손꼽아 기다렸던 여름 휴가를 다녀왔어요. 제가 다녀온 곳은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돌로마이트 산맥인데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산줄기와 하늘까지 닿을 듯 우뚝 선 울창한 숲이 창밖을 가득 메우고 있었어요. 그 앞에 서 있으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리고 제가 품고 있던 모든 걱정과 불안이 얼마나 작고 하찮은 것인지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더라고요. 아직 따끈따끈한 여행의 기억을 조금 더 오래 간직해 보고자 이번 편지에는 여행이야기를 담아볼까 합니다. 

자동차 창문 밖으로 보인 돌로마이트 산
자동차 창문 밖으로 보인 돌로마이트 산

돌로마이트는 알프스 산맥의 일부로, 흥미로운 역사를 품고 있는 곳이에요. 1차 대전 이전까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다가 전쟁 후 이탈리아로 넘어왔거든요. 그래서인지 독일식, 오스트리아식 건축물들이 대부분이고, 이탈리아어보다 독일어가 자주 들렸어요.

돌로마이트는 1차 대전 동안 치열한 산악전이 벌어졌던 곳이기도 한데요. 당시 만들어진 요새, 터널과 참호, 각종 전투 시설물들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더라고요. 놀라운 건 전쟁 중 사망자나 부상자 중 상당수가 총탄이나 포탄 때문이 아니라 눈사태, 동상, 굶주림 같은 환경적 요인 때문이었다는 점이에요.

Museum of The Great War, 1차 대전에 사용된 오스트리아군의 요새
Museum of The Great War, 1차 대전에 사용된 오스트리아군의 요새

저도 지금은 박물관으로 변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요새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처음 본 당시의 의료 기구들은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바늘은 지금보다 몇 배나 두꺼웠고, 수술 도구들은 보기만 해도 몸서리쳐지더라고요. 의학 서적 중에는 다리 절단 방법을 사진과 함께 상세히 기록한 것도 있었어요. 그 순간 당시 젊은 청년들이 겪어야 했던 참혹한 현실이 어떤 영화나 책보다도 생생하게 다가왔어요. 그리고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평화와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됐죠. 마침 여행 기간이 광복절과 겹쳐서 짝꿍과 역사에 대한 대화를 한동안 나누기도 했어요.

호텔 발코니에서 보인 집
호텔 발코니에서 보인 집

첫 번째로 머문 호텔에서는 발코니에 나가면 작은 집 한채가 보였어요. 집에 이름이 새겨져 있어서 왜 그런가 찾아봤더니 독일 문화권에서 산간 지역 주택에 이름을 붙이는 건 오래된 풍습있다고 하더라고요. 집 이름은 주로 가문 이름, 집의 별칭, 지역적 특성 같은 걸로 적었는데, 예전에는 숫자로 된 주소 체계가 없어서 집 이름이 곧 주소 역할을 했다고 해요. 가문 이름을 쓰는 경우에는 가족의 역사와 유산을 기록하는 의미도 있고요. 제가 본 집 이름을 번역해보니 '오래된 케이블카'라는 뜻이었어요 😂

그 호텔에서 우연히 하타 요가 수업을 들었는데, 진정한 요가의 의미를 알게된 계기가 됐어요. 수업을 시작하기 전 선생님이 요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셨거든요. 뉴욕에서는 파워요가, 핫요가처럼 땀을 흘리고 운동한 느낌을 주는 요가들이 인기인데, 선생님은 요가의 본질이 신체, 마음, 영혼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셨어요.

요가의 진짜 목표는 어려운 동작을 해내는 게 아니라 호흡을 통해 몸과 마음의 균형을 찾고, 궁극적으로 명상 상태에 도달하는 거라고요. 신체적 고난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마음이 고요해지고 정신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에 이르는 것이 하타요가의 핵심이래요. 제가 어려운 동작을 억지로 유지하고 있을 때도 선생님께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몸의 한계를 무리하게 넘으려 하지 말라고 조언해주셨어요.

요가를 했던 고요한 공간
요가를 했던 고요한 공간

그렇게 한 시간 반 동안 제 몸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오직 호흡에만 집중했더니, 정말 신기하게도 마음이 고요해졌어요. 중간중간 아래층 헬스장에서 누군가 무거운 기구를 들며 끙끙대는 소리가 들렸는데, 선생님이 "우리가 원하는 건 바로 그 반대예요"라고 말씀하시자 다같이 웃었던 순간도 기억에 남아요.

이번 여행을 떠나기 전에 스스로와 약속한 것들이 있었어요. 시간의 공백을 일부러 채우지 않기, 트래블 저널링에 도전하기, 그리고 최대한 자연과 연결되기였죠. 처음에는 빈 시간이 생기면 뭔가 해야 할 일을 찾게 되는 습관 때문에 조금 불편했는데요. 아침에 가벼운 운동을 하거나 숲길을 걸으며 몸을 움직이니 다행이 그런 조바심이 자연스럽게 사라졌어요.

저녁에는 간단한 드로잉이나 저널링으로 그날의 인상 깊었던 순간들을 기록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즐거운 기록 방식이었어요. 야외에서 그림을 그려보려고 도구들도 준비해왔는데, 워낙 햇볕이 강해서 한 자리에 오래 앉아있기 어려워 아쉬움이 남기도 해요. 그래도 하루하루를 그렇게 의식의 흐름대로 보내다 보니 마지막 날까지 노트북을 한 번도 열지 않았답니다. 처음 경험해보는 해방감이었어요. 항상 휴가조차 어느 정도는 워케이션이 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거든요.

아침 산책이 길을 잘못 들어 하이킹이 되어버린 날의 기억을 담은 간단한 그림
아침 산책이 길을 잘못 들어 하이킹이 되어버린 날의 기억을 담은 간단한 그림

뉴욕으로 돌아온 지금, 마치 텅 빈 캔버스에 새로운 그림을 그려나가는 듯한 상쾌함을 느끼고 있어요 (오래가진 않겠지만요). 아마도 그동안 내면에 쌓여있던 온갖 걱정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난 해방감이 아닐까 싶어요.

지난 편지에서 수야님이 나눠주신 '나다움을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저 역시 요즘 깊이 공감하고 있어요. 결국 돌고 돌아서, 내가 진정으로 즐거워하는 것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을 하나씩 탐구해나가는 과정이 모여 나만의 고유한 서사를 만들어간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삶의 방향성도 점점 선명해진다는 것 말이에요.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도, 결국 답은 내 안에 있고 나 자신을 오랜 시간 탐구하는 수밖에 없지만, 요즘은 그 과정 자체가 생각보다 즐겁다고 느끼고 있답니다.

한국에 집중 호우 소식이 계속 들려오던데, 수야님의 출퇴근길이 너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뉴욕은 비가 한바탕 내리고 나서 잠시 선선해졌네요. 다음 달이면 벌써 가을이 코앞이에요!

 

가을의 상쾌한 아침 공기를 기다리며,

코스모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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