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

[17호] 코스모가 수야님께

진정한 아마추어가 되기까지

2025.07.17 | 조회 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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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ave

서울과 뉴욕에 사는 두 여자가 매달 주고받는 편지로 삶을 나눕니다. #문화예술 #책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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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수야님,

 

올해 뉴욕은 한국처럼 습하고 더운 여름이 계속되고 있어요. 5분만 걸어도 땀이 나기 시작하는 습한 더위를 잘 견디지 못해서, 올 여름은 대부분 실내에서 지낼 것 같아요. 유럽에 있는 지인들도 점점 심해지는 습한 더위 때문에 에어컨을 살 계획을 하고 있더라고요. 매년 새 계절을 맞이할 때마다 기후 변화의 영향을 더욱 체감하게 되는 것 같아요.

6월 마지막 주에 런던에 다녀왔어요. 뉴욕이 한창 폭염으로 난리였던 터라, 런던이 정말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였죠. 아침 저녁은 쌀쌀할 정도였답니다. 이번에는 평소와 달리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어요. 매일 사람들을 만나고 워크샵에 가는 J스러운 빡빡한 일정 대신, 4일간 혼자 아티스트 데이트를 해보기로 한 거죠. 몇 개의 전시와 좋아하는 가게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는데, 확실히 하루가 끝나고 기억에 남는 것들이 훨씬 많았어요 (여백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껴봅니다 😂).

새로 발견한 화방 L. Cornelissen & Son. 거의 한 시간을 구경한 것 같아요
새로 발견한 화방 L. Cornelissen & Son. 거의 한 시간을 구경한 것 같아요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사치 갤러리의 "FLOWERS" 전시였어요. 꽃은 여러 문화권에서 미술사 전반에 걸쳐 중요한 소재로 다뤄져 왔죠. 이 전시는 꽃이 예술가들에게 어떤 영감을 주고, 어떻게 해석되어 사용되는지를 주제로 했어요. 첫 번째 방에서는 꽃이 르네상스 시대부터 인상주의, 팝아트에 이르기까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해석되었는지를 볼 수 있었어요.

윌리엄 모리스의 다양한 꽃 패턴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죠...!
윌리엄 모리스의 다양한 꽃 패턴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죠...!

아르누보 시대 알폰스 무하의 꽃은 곡선미와 장식적 패턴으로 화려하게 표현된 반면, 인상주의 시대 반 고흐의 꽃은 강렬한 색채와 붓터치로 자연과의 깊은 교감을 드러냈죠. 다른 방에서는 영화 포스터 속 꽃의 역할도 다뤘는데요. 혹시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영화 <Zone of Interest> 포스터에 등장하는 양귀비꽃은 흥미로운 상징성을 가지고 있어요. 양귀비꽃은 전후 세계를 상징하는 꽃이기도 하지만, 이 포스터에서는 까만 구멍이 뚫린 듯한 형태로 표현되어 있죠. 영화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바로 옆에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나치 장교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그들의 정원에 핀 아름다운 꽃과 그 안의 어둠이 그들의 무감각한 일상과 담장 너머의 참혹한 현실을 동시에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c) A24, Zone of Interest 포스터
(c) A24, Zone of Interest 포스터

최근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작가인 Austin Kleon의 <Show Your Work!>를 읽고 있어요. 한국에서는 <보여줘라, 아티스트처럼>이라고 번역되었더라고요. 저는 다독가라기보다는 애독가에 가까운 편이에요. 그래서 집에 모아둔 책이 많이 쌓여 있는데, 가끔 지금의 내게 딱 필요한 이야기를 담은 책과 우연히 마주치는 순간이 있어요. 그런 순간이 참 좋더라고요. 이 책도 그런 책이에요. 

오늘날에는 오히려 아마추어가 전문가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는 경우가 많다. 아마추어는 사랑의 정신으로 작업을 한다(프랑스어에서 ‘아마추어’는 ‘연인’이라는 뜻이다). 명성이나 돈, 커리어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작업하기 때문에 잃을 것이 별로 없다. 그래서 무엇이든 시도할 수 있고, 그 결과를 기꺼이 공유한다.

오스틴 클레온 <보여줘라, 아티스티처첨>

저는 ‘아마추어’라는 말이 참 듣기 싫었어요. 한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며 늘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거든요. 시험도, 과제도, 모든 걸 완벽하게 해내야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고, 그래야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완벽하게 하나를 끝내고 나면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 때문에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게 두려웠어요. 그래서 새로운 일을 하기로 마음먹기까지 오래 걸렸고, 막상 시작한 후에도 속앓이를 많이 하게된 것 같아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작은 외주 일을 하면서도 '아마추어 같아 보이면 어떡하지' 걱정했고요. 그러다 보니 정작 그림 그리는 게 재미없어졌어요. 스케치북을 펼쳐놓고도 손이 안 가더라고요. 잘 못 그릴까 봐서요. 서툰 내 모습을 보는 게 싫었던 것 같아요.

지난 주말 계속 사용해보고 싶었던 아크릴 물감에 도전했어요! 
지난 주말 계속 사용해보고 싶었던 아크릴 물감에 도전했어요!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어요. 아, 내가 진짜 아마추어도 되지 못했구나. 아마추어는 좋아해서 하는 건데, 저는 결과물이 어떻게 보일지, 남들이 어떻게 평가할지만 신경 쓰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생각을 바꿔보기로 했어요. 아마추어라고 부끄러워할 게 뭐 있나 싶더라고요. 대신 내가 정말 관심 있는 일들을 서툴러도 그냥 해보자고요. 그리고 제가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작업하고 있는 것에 대해 꾸밈없이 목소리를 내보자고요.

그래서 요즘은 서브스택을 통해 조금씩 더 꾸준히 제 이야기를 꺼내보려고 해요. 여전히 떨리긴 하지만요. 그렇게 꾸준히 꺼내다 보면 그 작은 시간과 행동이 쌓일 거라는 믿음을 가져봅니다.

저는 이제 8월 여름 휴가만 기다리고 있어요. 더위를 먹고 나니 하고 싶었던 일들도 손에 잘 잡히지 않더라고요. 한국도 분명 더울 텐데, 수야님도 가끔 더위를 피해 충전의 시간을 가지고 있으시길 바랍니다!

 

더위로 고생중인, 

코스모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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