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호. 엣헴, 어디 여자가 요가를 배우려 들어?

그거 아셨어요?

요가는 오랜 시간 금녀의 영역이었다는 걸요.

전세계 요가 수련생의 70% 이상이 여성인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데요. 기원 전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요가는 인도의 산, 숲, 동굴에서 비밀스레 수련되었습니다.

인도인 남성 구루에게서 인도인 남성 제자에게로, 그야말로 인도 남성의 몸에 맞게 변형되고 발전되어 구전되는 방식이었죠. 헌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현대의 요가는 이렇게 여성 수련자가 압도적으로 많아진 걸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인드라 데비 Indra Devi 라는, 한 여자의 영화 같은 삶을 들여다봐야 해요. 지구본을 조금 돌려 북유럽 라트비아로 그녀를 만나러 가볼까요.

🎬 Scene 1. 유럽: 춤추는 호기심

1890년 - 1900 년대 사이 소비에트 연방 리가 풍경 ⓒ 미국 의회도서관 소장

1899년 봄, 스웨덴인 은행원 아빠와 러시아의 귀족이자 배우인 엄마 사이에서 유제니라는 소녀가 태어났어요. 당시의 유럽은 전쟁과 혁명으로 한참 어지러울 때였어요. 유복한 상류층으로 태어났지만, 아빠가 러시아 혁명 중 실종되자 엄마와 유제니는 폴란드를 거쳐 독일로 피난을 떠났죠.

베를린에 터를 잡은 유제니는 곧 유럽 곳곳을 순회하는 배우와 댄서로 활약합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명으로 일컬어지는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그러다 호기심에 참여한 한 종교모임에서 인도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산스크리트어 챈팅을 듣게 되는데요.그녀는 이때를 이렇게 회상해요.

잊혀진 부름, 익숙하면서도 먼 무언가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그날 이후로, 제 안의 모든 것이 달라졌어요.
『The Path of Modern Yoga』 엘리엇 골드벅

사실 유제니는 15살 때 우연히 요가 철학 관련 책을 읽고서 어느 정도 인도에 대한 호기심과 신비함을 갖고 있었어요. 성인이 되어서도 그녀의 이런 궁금증은 사그라지지 않았던 거죠.

그녀는 이렇게 마음에 울림을 주는 인도에 꼭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당시 교제하던 은행원 남자 친구가 청혼하자, 결혼 전 석 달간 인도에 먼저 다녀오겠노라 말하죠.

🎬 Scene 2. 발리우드: 인드라 데비의 탄생

그렇게 인도로 떠난 유제니, 남부에서 북부로 인도를 여행하며 그 매력에 퐁당 빠지고 맙니다. 유럽으로 돌아가는 배편에 몸을 싣긴 했지만 머릿속엔 온통 다시 인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어요.

결국 유제니는 약혼자에게 약혼반지를 돌려주고, 값나가는 보석과 외투를 모두 처분해 인도로 향합니다. 어떤 위대한 여정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지 전혀 모른 채로요.

1930년대 인도에서 활동하던 인드라 데비 ⓒ Ashrams of India

그녀는 인도 봄베이 (지금의 뭄바이)에서 발리우드 배우와 댄서로서의 커리어를 이어가요. 이때, 조금 더 인도 이름 같은 "인드라 데비 Indra Devi" 라는 예명도 만들었어요.

1930년 데비가 참여한 영화 <아라비아 기사> 는 크게 흥행했고 같은 해 봄베이의 체코슬로바키아 영사관에서 근무하던 직원과 결혼도 했습니다. 이 결혼은 마이소르의 왕을 포함한 인도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 연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데비는 인도의 초대 총리 네루와 가까운 친구 사이로 지냈으며 이때 타고르, 심지어 간디와도 만났다고 해요.

한동안 데비는 이렇게 인도 사교계의 별로 화려한 생활을 즐겼습니다.

🎬 Scene 3. 마이소르: 구루를 만나다

하지만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몇 년간의 사교생활이 무리가 됐던 걸까요?

데비는 심부전 진단을 받게 됩니다. 의사에게서 받은 처방이 도통 말을 듣지 않아 데비는 통증을 완화할 수 있는 이런저런 방법을 찾아 보고 있었죠. 그러다 마이소르 왕궁에서 열린 결혼식에 초대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당대 최고의 요기 T. 크리슈나마차리아의 요가 수련을 보고 숨이 멎을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돼요. 이전에 요가를 조금 수련해 본 경험이 있었던 데비는 그에게 요가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하죠.

현대 요가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T. 크리슈나마차리아 (1888 - 1989)

구루 T. 크리슈나마차리아는 지금도 마찬가지만 그 때도 유명했는데요. 그는 제자로 여자나 외국인을 받지 않는다며 데비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했어요. 하지만 데비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결국 데비와 친분이 있던 마이소르 왕이 직접 구루에게 그녀를 받아달라 부탁하게 되죠. 마이소르 왕궁 내의 요가샬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입장이었던 구루, 더 이상 데비를 반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는 외국인 여제자를 들이게 된 것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여자인 데비가 어차피 엄격한 채식 식단과 규율을 못 버틸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데비는 구루의 제자들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이고 성실히 수련에 임했습니다. 데비 옆에서 함께 수련하던 동창생(?)들이 아쉬탕가 요가의 창시자 파타비 조이스, 아엥가 요가의 창시자 B.K.S 아엥가였음을 생각해 보면, 엄청난 일이었죠.

진심으로 수련하는 그녀를 지켜보던 구루는 마침내 인정합니다. 약 1년간 직접 프라나야마와 아사나를 전수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요가를 가르칠 수 있도록 선생님이 될 수 있도록 훈련해주었죠.

🎬 Scene 4. 요가 최초의 여자 선생님

몇 년 후 데비의 남편은 당시 동방의 파리라 불리던 중국 상하이로 발령 받게 됩니다. 구루는 남편을 따라 떠나는 데비에게, 어딜 가게 되든, 그 곳에서도 요가를 가르치라는 미션을 줍니다.

상하이에 도착한 데비는 고위층 부인들에게 요가를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여자 선생님이 이끄는, 전 세계 최초의 요가 수업이었습니다.

이 중에는 상하이에서 가장 유명한 쑹씨 가문의 막내딸이자, 나중에 대만의 총통이 되는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도 있었습니다.

데비의 첫 제자 중 하나로 평생 요가와 채식을 지속했던 쑹메이링 (1897 - 2003)

쑹메이링은 데비의 요가원으로 저택 한 켠을 내어주었고, 데비는 이내 사람들로부터 Mataji (어머니) 라고 불리기 시작했어요. 데비는 그렇게 상하이에서 몇 년간 요가를 가르치지만,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다시 인도 봄베이로 돌아가 다음 챕터를 준비합니다. 이 과정에서 남편과도 사별하고 인생을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져요.

어느덧 중년이 된 데비는 앞으로 남은 생의 목표를 여자들에게 요가를 전파하는 것으로 삼겠다고 다짐합니다. 데비는 새출발을 할 곳으로 할리우드를 점 찍었어요.

당시 할리우드엔 동양사상과 철학에 대한 관심이 태동하고 있었기에, 베벌리힐즈 선셋대로에 연 데비의 요가원은 큰 인기를 끌었어요.

스트레스와 불안을 줄일 수 있도록 긴 사바사나와 간단한 자세 위주로 시퀀스를 구성했는데 할리우드의 여배우들이 특히 좋아했거든요.

요가 애호가였던 마릴린 먼로는 요가 자세를 취한 채로 많은 사진을 남겼다.

무성영화 시대였던 당시 최고의 여배우였던 글로리아 스완슨, 우리에겐 향수로 더 유명한 엘리자베스 아덴, 그리고 시대의 아이콘 마릴린 먼로까지도 데비의 요가원에 요가를 배우러 왔습니다.

데비는 곧 다른 지역에 사는 여성들도 집에서 혼자 수련할 수 있도록 책을 펴냅니다. 이 책들은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어요.

특히 요가의 미용 효과를 강조한 『Forever Young Forever Healthy』 는 전미 베스트셀러가 되어 10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총 29개국에서 팔렸습니다. 미국에서 요가의 인기는 이렇게 여성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고 현대에도 수많은 여성이 요가를 수련하는 계기가 되었죠.

데비는 세계 최초의 여자 요가 선생님으로서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 Scene 5. 멈추지 않는 퍼스트 요기니

데비는 어딜 가서든 요가를 가르치라는, 스승님의 당부를 잊지 않았고 평생 실천했습니다. 미국에서의 큰 성공 이후 그곳에 머무르며 편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도 있었지만 이후로도 여러 나라를 오가며 요가를 전파하는 활동을 이어가죠.

60년대 들어서는 멕시코에 24개의 방이 딸린 요가원을 열어 요가 지도자를 양성하고, 당시 미국과 냉전 중이었던 러시아가 요가 수련을 불법화할 조짐을 보이자 직접 러시아로 날아가 요가는 종교가 아니라고 설득해 요가의 "합법화"를 이끌어내기도 합니다.

미국에서 만난 두 번째 남편이 1977년에 사망한 후, 데비는 아르헨티나에 정착했어요. 그리고 2002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102세를 일기로 눈을 감기까지 새로운 땅, 남미에 요가를 전파하는데 남은 생을 헌신했습니다.

작가 미셸 골드벅은 데비에 관한 전기 『여신 자세(The Goddess Pose)』 에서 그녀도 한 인간으로서 공과가 모두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1920년대 여자 혼자서 유럽에서 인도로 갔던 그 용기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중년에 연고도 없는 할리우드로 가서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는 용기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무려 80대에 새로운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가서 시작하는 건 또 어떻구요! (...) 저는 인드라 데비의 그 용기, 독립심, 모험심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미셸 골드벅 The Goddess Pose 북토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