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날 것 같지 않던 여름의 더위가 갑자기 꺾였다.
분명 지난주만 해도 낮 기온이 25도를 웃돌았는데, 오늘은 15도 이하이다. 단 하루만에 계절이 확 바뀌면서 거리에 사람들의 옷차림새도 급격하게 변했다. 짧은 반바지와 크롭 티, 끈 나시가 사라지고 부츠와 패딩이 등장했다. 나는 10월 첫 주에 미리 준비해 놓은 니트를 꺼냈다. 아이들에게도 후드 잠바와 패딩을 입혔다. 1년만에 훌쩍 커버렸는지, 패딩 잠바 소매 밖으로 딸아이의 팔목이 댕강 보인다. 일단 오늘은 어설프게라도 가을을 맞이해야겠다. 이렇게라도 가을을 준비한 나를 보니 새삼 대견했다. 스산한 밀라노의 가을이 시작되었다.
2년 전 밀라노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날씨가 딱 오늘 같았다.
햇살 한점 보이지 않는, 비를 잔뜩 머금은 먹구름이 언제 비를 토해내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 그런 날이었다. 습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밀라노에 오기 전 이곳 날씨를 여러 번 검색해 보았다. 여름엔 건기라서 비가 잘 안 오고, 겨울엔 우기라서 비가 많이 오고 습하다고 했다. 봄과 가을은 건기도 아니고 우기도 아니니 가장 좋은 계절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중충한 밀라노를 마주한 순간, 나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는 걸 깨달았다. 걱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빗나감을 마주하게 될 것인가?
밀라노에 도착한 이후 며칠 동안 계속 비가 내렸다. 밖에 나가 유럽의 거리를 구경하고 싶었지만, 인도의 무더위에 익숙해져 있던 우리는 그 스산한 공기가 뼈가 시리게 추웠다. 한국의 가을만 생각하며 얇은 잠바만 준비했던 우리는 예상치 못한 차가운 공기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난방이 되지 않는 숙소에서 얇은 이불 속에 들어가 웅크리고 누워있으면 8시간의 시차와 낯선 공기의 노곤함으로 스르르 잠이 들었다.
내가 밀라노의 가을 날씨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제 막 잠에서 깬 사람처럼 흐리멍텅하게 지낼 때 남편은 과연 여기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를 헤아렸다고 한다. 막연하게 인도에서 일하는 것보다 이탈리아에서 일하는 것이 더 좋을 거라는 마음으로 왔는데, 막상 일을 해보니 인도와 이탈리아의 차이를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밀라노로 오는 공항에서 느꼈던, 뭔가 익숙하면서도 당황스러운 느낌적인 느낌이 남편의 일터에도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남편은 ‘식물적 인간’이다. 식물처럼 주기적으로 햇빛을 받고 광합성을 해야만 살 수 있어서 하루에 한두 번은 꼭 햇빛 아래에서 산책을 해야 하는 사람이다. 무더위의 끝판인 나라, 인도에서도 그는 산책을 포기하지 않았다. 땀을 흘리면서도, 모기에 뜯기면서도, 미세먼지 수치가 300이 넘어도 그는 햇빛만 있으면 산책을 했다. 산책은 그에게 호흡이자 생명이었다.
며칠 동안 계속되는 우중충한 날씨에 그와 나는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밀라노에 온 것이 잘한 선택이었는지 되물었고, 과연 여기서 얼마나 살 수 있을지 헤아렸다. 하지만 뒤로 물릴 수도 없었다. 인도에서 밀라노로 이사하면서 생긴 3개월의 공백기 동안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나와 함께 홈스쿨링을 했다. 아이들을 직접 가르치면서 정말이지 나는 홈스쿨링과 어울리지 않는 엄마라는 사실만 잔뜩 깨달았다. 이제 그만 아이들은 학교에 다녀야 했다. 다 큰 두 아이를 하염없이 품고 있을 여유가 내 품안엔 없었던 것이다.
밀라노와의 첫 만남은 내 남편을 닮았다.
슬리퍼를 찍찍 끌고 들어오던 그를 보며 나는 혀를 쯧쯧 찼다. 노랗게 염색한 긴 머리 사이로 큐빅 박힌 귀걸이가 반짝였다. 반항아의 모습으로 건들거리는 그를 보며 아직 덜 자란 동생의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를 볼 때마다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그랬던 그가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 나는 그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했다.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을 ‘난 연애할 생각이 없어’라는 말로 보기 좋게 포장해서 돌려주었다. 하지만 난 결국 그의 마음을 받아주었고, 사랑을 했고, 결혼을 했고 여기까지 왔다. 이건 우리의 destiny, 운명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밀라노의 첫 인상도 마찬가지였다. 밀라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일단 오긴 왔는데, 이정도로 마음이 힘들 줄 몰랐다. 새로운 나라에 오면서 그 나라의 언어도, 문화도 미리 공부하지도 않고 무대포로 와버린 나의 성의없음을 오랫동안 후회했다.
이탈리아로 잠시 여행 온 여행자의 마음과 이탈리아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생활자의 마음은 꽤 많이 다르다. 여행에 들인 돈과 시간을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긍정적인 것들만 남기려고 애쓴다. 하지만 이곳에서 직장에 다니며 실적을 내야하는 사람에게 이탈리아의 복잡하고 느린 시스템은 복창터지는 경험일 수밖에 없다. 영어가 조금이라도 통하는 여행지의 사람들과 다르게 일상 사람들은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한다. 심지어 “excuse me”조차도 모르는 사람 태반이다. 그런데 나는 첫인상과 다르게 밀라노가 점점 더 좋아진다. 말도 잘 통하지 않고, 행정은 너무 느려서 아직도 ID카드를 받지 못했지만, 이런 어설픔이 오히려 인간적으로 느껴진다고나 할까.
우리는 첫인상을 꽤나 중요하게 생각한다.
첫 학부모 모임에 나갈 땐 무시당하지 않으려 한껏 꾸미고 나간다. 평소엔 관심도 없던 명품백을 학부모 모임에 나가기 전엔 하나 마련해 두어야 하는 이유는,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 백, 브랜드 있는 옷, 신발까지. 나를 나타낼 수 있는 악세서리를 주렁주렁 걸친다.
나는 축 쳐진 눈꼬리 때문에 너무 착하게 보이는 경향이 있다. 이 세상에서 착한 사람은 부탁하기 좋은 사람, 뒤통수 치기 가장 좋은 사람, 사기당하기 좋은 사람, 보이스피싱 당하기 좋은 사람의 대명사이다. 나는 심지어 이름도 선량이라서 외모도 이름도 극하게 착하다. 나는 개무시당하지 않는 방법으로 ‘아이라인’과 ‘스모키 화장’을 선택했다. 그것도 너무 진한 쌍커풀 때문에 절반은 접혀버리지만, 절반이라도 덜 착해 보이길 바라며 화장을 한다. 이렇게 화장하는 날 보며 아이들은 “깡패”같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성공이다.
나는한번 보고 별로라고 생각되면 뒤돌아보지 않고 갈길 가버리는, 매정한 사람이다. 과거의 남성들과 헤어질 때도 그랬다. 한번 마음을 접으면 냉철하게 다시 꺼내지 않는 사람. 미련도 후회도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다. 덕분에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는 미래 지향적인 사람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살았다. 사람도 장소도 나를 반겨주지 않는 것 같으면 나 역시 마음을 접어버리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며 서로 마음이 열리길 기다리지 못했다. 그런데 밀라노에 살면서 이런 내 성향이 미래지향적인 것이 아니라 기다릴 줄 모르는 조급함이라는 걸 깨달았다.
밀라노에 처음 왔던 2년 전의 10월이 울컥하도록 시리고 낯설었지만, 며칠 후 짠~하고 선물처럼 해가 났다. 햇살을 머금은 빗방울이 반짝거리는 거리는 눈이부셨다. 해와 비와 바람이 머무는 중세시대의 건물 사이사이로 단풍잎이 나부끼는 풍경은 마치 현실감각을 잃게 만들었다. 길거리 장터에서 파는 점퍼와 부츠를 입고 밀라노의 10월을 당당하게 걸을 때 나도 이제 밀라네제가 다 되었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여전히 알아듣는 말은 “Ciao 안녕”과 “Grazie 미안해요” 뿐이었지만, 나는 천천히 느린 사람이 되어 이곳의 거리를 걸었다.
흐린 날이 계속되다가 오랜만에 해가 나는 날이면 모두들 풀밭에 앉아 식물적 인간이 되어 광합성을 한다. 그들 사이에 나 역시 유유히 그들 사이에 앉아 온몸에 햇살을 저장한다. 그리곤 다시 진한 에스프레소 향을 맡으며 일터와 가정으로 들어가 웃고 떠드는 한 폭의 그림이 된다.
보여지는 것은 겉치레일 뿐, 진실은 그 안에 숨어있는 네 번의 계절이다.
며칠 전 남편과 함께 산책을 나갔다. 어둠이 내려앉은 공원엔 바람에 부딪히는 나뭇잎 소리만 들렸다. 차가운 바람이 그와 나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난 여기를 떠나면 이 차갑지만, 쨍한 공기가 그리울 것 같아. 그리고 봄의 따스함도.”
진짜 밀라노를 알려면 봄과 가을을 경험해 봐야 한다는 그의 말에 공감하며, 우리의 지난 가을, 겨울, 봄, 여름, 그리고 다시 가을을 떠올렸다.
이제야 첫인상보다 중요한 게 뭔지 알겠다. 그건 사랑의 감정뿐만 아니라 미움의 감정도 얼키고 설켜 피어나는 애증이었다.
애증이야 말로, 긴 시간 동안 곁에 볼 수 있는 가장 고도의 감정이다.
(위의 글은 '밀라노에서 배운 삶을 대하는 마음, La vita e bella'에 수록할 글입니다. 언젠간 책으로 엮을 거에요. 구독자님이 저의 첫 독자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달 전에 예매해 두었던 오페라의 유령을 보러 갔다. 20대에 책으로도 읽었었고, 기사도 찾아보며 대략적인 내용을 아는 나와 다르게 남의편은 오페라의 유령을 전혀 알지 못한 상태였다. 내용을 모르면 공연도 덜 재밌는 법. 나는 오페라의 유령을 검색해서 남편에게 보내주었다. 하지만 그는 미리 보지 않은 눈치였다.....
옷장을 뒤져 평소에 입지 않던 검정색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눈과 입술에 힘을 주어 화장도 했다.
"아니 뭘 그렇게 꾸미고 가?"
청바지에 셔츠를 입고 있는 그가 말했다.
"오랜만에 공연 보러 가는데 꾸미고 가야지!"
나는 눈을 흘기며 되받아쳤다.
"그 옷, 내가 사준 거야? 못 보던 옷인데, 새로 샀어?"
"아니! 둘째 언니가 20년 전에 입은 옷이다! 언니가 나 입으라고 작년에 준 거야."
20년 전에 언니가 입은 옷이지만, 전혀 오래되 보이지 않았고, 살이 좀 빠졌는지 허리도 넉넉했다. 만족스럽다.
그와 차를 타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우리 집은 밀라노의 서쪽에 있고, 공연장은 밀라노의 동쪽에 있다. 정 반대쪽이지만 밀라노가 워낙 작은 도시다 보니, 1시간이면 충분했다. 차를 타고 가며 이런 저런 쉰 소리를 하며 농담 반 진담 반의 대화를 하다 보니, 공연장에 도착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가고 있었다. 우리도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공연은 4시 시작이었지만, 4시 10분이 되어도 시작하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여긴 이탈리아잖아? 정시에 시작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기차 시간도 지켜지지 않는데 뭐. 밀라노 2년 차는 이 정도의 딜레이는 그러려니 한다.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었다. 브로드 웨이 배우들이 펼치는 오페라의 유령은 오페라와 뮤지컬의 콜라보 같았다. 모든 대사와 노래는 영어였고, 중간 중간 이탈리아어가 나왔다. 코미디가 적당히 섞여있어서 지루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팬텀 역할의 Ramin Karimloo의 노래는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Ramin Karimloo는 이란 태생의 캐나다 뮤지컬 배우이자 가수로, 런던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공연자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2003년에는 오페라의 유령에서 샤니 자작 라울 역을 맡았고, 2010년에 처음으로 팬텀 역을 맡았다고 한다. 그 후 여러 팬텀 중에서 가장 각광 받는 배우가 되었다.
오페라의 유령에서 가장 유명한 곡으로,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이 노래이다. 이들의 공연을 보며 전율이 흘렀다. 코를 골며 졸 줄 알았던 남의 편도 자지 않고 끝까지 공연을 보았다.
우리 바로 옆자리엔 엄마와 어린 아들이 있었다. 엄마는 아들에게 뮤지컬의 내용을 설명해주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드디어 공연이 끝나고 배우들이 인사를 할 때, 객석에서는 박수와 함께 함성이 터져 나왔다.
"Bellissimo!!"
"Bravi"
축하의 말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을 따라 나도 함께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질렀다.
"앞에 서봐, 인스타에 올릴 사진 찍어야지."
내 인스타를 안 보는 척 다 보고 있는 남의편이 말했다. 나는 입을 삐죽 거리며 무대가 잘 보이는 곳에 가서 섰다.
(아마도 이 글도 몰래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
공연장을 나오는데 "Le miserable" 공연 팜플렛이 보였다. 그런데 공연 날이 1년 후였다.
"우리 이거 보러 올까? 이것도 진짜 좋을 것 같아."
"1년 뒤에 우리가 여기 올 수 있을까? 1년 뒤에도 우리가 밀라노에 있을 수 있을까?"
"글쎄.... 1년 전에도 똑같은 말 했었는데, 아직도 밀라노에 있잖아."
과연 1년 뒤에 우리는 레미제라블 공연을 볼 수 있을까? 다시 올 수 있다면 두 아이들과 함께 와야겠다.
저는 요즘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열심히 편집을 하고, 또 열심히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상하게 남의 글을 만지다 보면 내 글이 쓰고 싶고, 내 글을 쓰다 보면 책을 읽고 싶고, 책을 읽다 보면 또 편집을 하고 싶어지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마음 때문에 하루가 꽉 차고 맙니다.
정식으로 글쓰기를 배우지 않아서 글에 대한 자신감이 늘 부족했듯, 그림도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기에 늘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림을 그리고 인스타에 올리면 "잘 그렸다, 멋지다"칭찬들을 해주시니, 그 칭찬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는 중이에요.
저는 주로 느낌이 좋은 사진을 선택한 후 그림 어플을 이용해 태블릿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제가 사용하는 어플은 "Sketchbook"이라는 어플이에요. 장점은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에요. 전문가가 아니기에 여러 툴을 사용하지 않거든요. 물론 유료 결제를 하면 좀 더 다양한 그림 툴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시간이 훌쩍 흐릅니다. 몰입의 순간이라고 하죠. 시간은 모두에게 똑같지만, 몰입의 유무에 따라 상대적인 것 같아요. 새벽 5시에 일어나도 이렇게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 걸 보니, 저는 자주 몰입을 하는 모양입니다.
아직은 먼저 그림을 그려 달라는 사람도, 글을 써 달라는 사람도 없지만, 괜찮아요. 이렇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다 보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가게 될 거라고 믿어요.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 감기 조심하시길 바라며,
다음주 금요일에 또 뵙겠습니다.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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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asong
술술 읽히는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 감기 조심하시고, 늘 행복하세요!!
zzumma in Milan (118)
앗. 정말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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