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회사를 무너트리는 가장 효과적인 검증된 방법

조직을 망치는 법과 살리는 법은 같은 행동의 방향만 다르다

2026.03.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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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angse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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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지식토킹

하고 싶은 말을 합니다. 주로 기술, 인문학, 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들어가며

구독자님, 혹시 이런 경험 있으신가요? 간단히 끝날 수 있는 안건인데 "위원회에서 한번 검토해 봅시다"라는 말에 2주가 흘러버린 적.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다음 회의에서 "다시 한번 논의해 보자"며 되짚는 상황. 잘하는 직원에게는 냉담하고, 성과가 떨어지는 직원에게 오히려 보상이 돌아가는 광경.

이게 조직의 일상이라고요? 놀랍게도 이건 1944년, 지금의 CIA 전신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가 적국을 망치기 위해 만든 공작 매뉴얼의 내용이에요. 이름하여 Simple Sabotage Field Manual[1]​. 제2차 세계대전 한복판에서 연합국에 우호적인 적국 시민들에게 배포한, 말 그대로 '조직을 안에서부터 무너뜨리는 교본'이었죠.

2008년 기밀 해제된 이 문서를 읽다 보면 웃다가 소름이 돋아요. 80년 전 적국을 파괴하라고 쓴 지침이, 오늘날 수많은 조직에서 '정상적인 업무 프로세스'로 운영되고 있으니까요.

스파이의 교본: 조직을 망치는 8가지 원칙

이 매뉴얼은 총 32페이지밖에 안 되는 짧은 문서예요. 하지만 OSS 국장이었던 윌리엄 "와일드 빌" 도노반(William "Wild Bill" Donovan)이 직접 감수한 이 문서에는, 조직을 안에서부터 서서히 무너뜨리는 거의 모든 방법이 담겨 있어요. 

매뉴얼의 핵심 전략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뉘어요.

첫째, 의사결정을 마비시켜라. 모든 안건을 반드시 공식 채널(channels)을 통해 처리하게 하고, 절대 지름길을 허용하지 말라고 해요. 간단한 문제도 5명 이상으로 구성된 위원회에 회부하고, 지난 회의 결정 사항을 매번 재검토하도록 유도하라는 거예요.

둘째, 동기를 파괴하라. 관리자라면 일 못하는 직원을 칭찬하고 보상하되, 일 잘하는 직원은 비판하고 차별하라고 해요. 새로운 구성원에게는 불완전한 지침을 주고, 중요도가 낮은 업무에 배치하라는 지침도 있어요.

셋째, 마찰을 극대화하라. 한 번에 끝낼 수 있는 업무를 여러 단계로 쪼개고, 문서 작업량을 최대한 늘리고, 결재 라인을 복잡하게 만들라고 해요. 아무리 간단한 일이라도 3명 이상의 승인을 거치도록 설계하라는 거죠.

재미있는 건, 이 매뉴얼이 특별한 도구나 훈련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원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어요: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실수와 비효율의 폭을 조금씩 넓히면 된다고요. 즉, 사보타주의 본질은 비정상을 만드는 게 아니라 '정상적인 비효율'을 증폭시키는 것이었어요.

80년 후, 매뉴얼은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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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진짜 무서운 이야기가 시작돼요. 이 매뉴얼의 지침들을 하나씩 현대 조직과 대조해 보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일치하거든요.

"회의를 최대한 자주 열어라" — 2024년 Asana의 Work Innovation Lab 조사에 따르면, 실무자(Individual Contributor)가 비생산적인 회의에 쓰는 시간이 주당 3.7시간으로, 2019년 대비 118% 증가했어요. 관리자는 주당 5.8시간으로 87% 늘었고요. 직원의 48%는 가장 최근 참석한 회의가 불필요했다고 답했어요.

"모든 것을 공식 채널을 통해 처리하라" — 경영학자 게리 하멜(Gary Hamel)과 미셸 자니니(Michele Zanini)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 경제에서 과잉 관료주의가 발생시키는 생산성 손실은 연간 약 3조 달러, GDP의 약 17%에 달해요. 미국 노동 인구에서 관리자·감독자·행정직의 비율은 4.7명당 1명꼴이에요.

"문서 작업의 양을 최대한 늘려라" — 한 테크 기업의 사례를 다룬 Factor.ai의 보고서는, 조직의 비효율이 커지자 경영진이 내놓은 해법이 "더 많은 메모와 더 많은 회의"였다고 분석해요. 결과는요? 모든 의사결정이 더 느려졌고, 리더들은 회의 준비를 위한 회의에 갇혀 마치 영구적인 에세이 작문 대회에 사는 것 같았다고요.

이 수치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현대 조직의 많은 비효율이 '누군가의 의도'가 아니라 시스템이 자연스럽게 사보타주 매뉴얼의 방향으로 수렴한 결과라는 점이 보여요. 사회학자 로버트 머턴(Robert K. Merton)은 이걸 관료제의 '역기능(dysfunction)'[2]​이라고 불렀어요. 효율을 위해 만든 규칙이 오히려 경직성을 낳고, 규칙 준수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는 현상이죠.

즉, 사보타주 매뉴얼이 무서운 이유는 새로운 파괴 방법을 발명해서가 아니라, 조직이 자연적으로 빠지는 함정을 정확히 포착했기 때문이에요.

매뉴얼을 뒤집으면 해법이 된다

그렇다면 이 매뉴얼을 거꾸로 읽으면 어떨까요? 조직을 망치는 원칙의 정반대가 곧 조직을 살리는 원칙이 되니까요.

매뉴얼이 "모든 것을 채널을 통해 처리하라"고 했다면, 해법은 의사결정 경로를 최소화하는 것이에요. 매뉴얼이 "위원회를 5명 이상으로 구성하라"고 했다면, 효과적인 팀의 크기를 줄이는 게 답이에요.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가 말한 '피자 두 판 규칙'[3]​이 떠오르는 대목이죠.

매뉴얼이 "잘하는 직원을 비판하라"고 했다면, 반대로 성과에 대한 공정한 인정과 피드백 체계가 조직의 생명줄이 돼요. 매뉴얼이 "문서 작업을 늘려라"고 했다면, 문서화의 목적과 범위를 끊임없이 재검토해야 해요.

Spotify의 '스쿼드(Squad)와 트라이브(Tribe)' 모델은 이런 역발상의 좋은 사례예요. 소규모 자율 팀이 스타트업처럼 독립적으로 움직이되, 공통 미션으로 정렬하는 구조죠. 사보타주 매뉴얼의 정확한 반대편에 서 있는 조직 설계예요. 대표적으로 넷플릭스의 규칙없음도 좋은 역사보타주의 좋은 예시에요,

핵심은 이거예요. 비효율은 악의에서 오는 게 아니라, 대부분 관성에서 와요. "원래 이렇게 해왔으니까", "절차니까", "안전하니까"라는 말 속에 매뉴얼의 그림자가 숨어 있어요. 관성을 인지하는 것 자체가 변화의 첫걸음이에요.

오스왈드의 시선

솔직히 이 매뉴얼을 처음 읽었을 때, 저는 웃다가 얼굴이 굳었어요. 컨설팅을 하면서 수많은 조직을 안팎으로 봐왔는데요, 제가 "이 조직은 왜 이렇게 느리지?"라고 느꼈던 거의 모든 경우가 이 매뉴얼의 어딘가에 해당했거든요. 3명이면 될 회의에 10명이 앉아 있고, 이미 결정된 사안을 "한번 더 확인하자"며 되돌리고, 승인 3단계를 거쳐야 비로소 이메일 하나가 나가는 구조.

제가 특히 주목하는 건 매뉴얼이 '의도적 어리석음(purposeful stupidity)은 인간 본성에 반한다'고 명시한 부분이에요. 즉, 사보타주조차 훈련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현대 조직은 그 훈련 없이도, 시스템 자체가 구성원을 사보타주 행위자로 만들고 있어요. 누구도 조직을 망치려는 의도가 없는데, 결과적으로 매뉴얼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거죠.

데이터 전문가로서 하나 더 짚자면, 이런 구조적 비효율은 측정이 어려워요. 회의 시간은 측정할 수 있지만, 회의 때문에 발생한 '몰입 시간의 손실'이나 '의사결정 지연의 기회비용'은 대시보드에 잡히지 않거든요. 측정되지 않는 비용은 관리되지 않아요. 그래서 사보타주는 계속돼요, 아무도 모르는 채로.

이 매뉴얼이 우리에게 남기는 진짜 질문은 하나예요. "우리 조직에서 '원래 그런 거야'라고 넘기고 있는 것들 중, 사실은 사보타주 매뉴얼에 해당하는 게 몇 개나 될까?"

마치며

정리하면 이래요. 80년 전 적국을 파괴하려고 쓴 32페이지짜리 매뉴얼이, 오늘날 수많은 조직의 '정상적 업무 프로세스'와 구분이 안 돼요. 이건 누군가의 악의가 아니라 시스템이 자연적으로 수렴하는 방향이에요. 그리고 매뉴얼을 뒤집으면, 그 자체가 조직을 살리는 원칙이 돼요.

다음에 회의 초대장이 올 때 한번 떠올려 보세요. "이 회의, 혹시 CIA 사보타주 매뉴얼 11조에 해당하는 건 아닌가?" 그 질문 하나가 여러분의 조직을 조금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어요.

참고자료 & 더 읽기

핵심 출처

  • United State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Simple Sabotage Field Manual — Strategic Services (Provisional), 1944. : 2008년 기밀 해제된 원문을 CIA가 직접 소개한 페이지예요. 매뉴얼의 역사적 맥락과 주요 내용을 요약하고 있어요.
  • United State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Simple Sabotage Field Manual, Project Gutenberg. : 매뉴얼 전문을 무료로 읽을 수 있어요. 특히 11장(조직 방해)과 12장(생산성 방해)이 오늘 뉴스레터의 핵심 소재예요.
  • Gary Hamel & Michele Zanini, "Excess Management Is Costing the U.S. $3 Trillion Per Year", Harvard Business Review, 2016. : 과잉 관료주의의 경제적 비용을 데이터로 추산한 핵심 논문이에요. GDP 17%라는 수치의 근거를 확인할 수 있어요.
  • Asana Work Innovation Lab, 2024 State of Work Innovation Report, 2024. : 비생산적 회의의 급증 데이터를 담고 있어요. 2019년 대비 118% 증가라는 수치의 원출처예요.

배경 지식

관련 링크

당신도 할 수 있다! 조직을 망치는 현장 메뉴얼 : 2022년도에 작성했던 블로그 글이에요. 좀 더 자세히 번역하고 쉽게 적었어요. 

"나쁜 리더는 없다 나쁜 시스템이 있을 뿐" : '전략적 결정' 최고 전문가 올리비에 시보니 교수의 인터뷰 기사인데 개개인이 악의를 가지지 않고 온다는 전제하에 시스템에 좀 더 집중해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것을 묘사합니다.

 

사실 오늘 뉴스레터는 내일을 위해 준비한 뉴스레터인데요. 개인의 생산성과 조직의 생산성에 대해 한 번 고민해보시는 시간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결국, 저런 조직을 망치는 메뉴얼도 스스로를 망칠 순 없으니까요.

 

각주

  1. [1] 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정보기관으로, 1947년 CIA(중앙정보국)의 전신이 된 조직이에요. 정보 수집, 비밀 공작, 적국 시민 포섭 등을 담당했어요.
  2. [2] 관료제의 역기능 (Bureaucratic Dysfunction): 사회학자 로버트 머턴이 제시한 개념으로, 조직의 효율을 위해 만든 규칙과 절차가 오히려 경직성과 비효율을 낳는 현상이에요. 규칙 준수가 원래 목적보다 더 중요해지는 상황을 말해요.
  3. [3] 피자 두 판 규칙 (Two-Pizza Rule):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가 제안한 팀 구성 원칙으로, '피자 두 판으로 먹일 수 있는 인원'(대략 6~8명)을 넘지 않아야 효과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하다는 개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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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안광섭은 세종대학교 경영학과 교수이자 OBF(Oswarld Boutique Consulting Firm) 리드 컨설턴트이다. 대학에서 경영데이터 관리, 비즈니스 애널리틱스 등 데이터 분석을 가르치는 한편, 현장에서는 GTM 전략과 인공지능 전략 컨설팅을 이끌며 기술과 비즈니스의 접점을 설계하고 있다. AI 대화 시스템의 기억 아키텍처(HEMA) 연구로 학술 논문을 발표했으며, 매일 글로벌 AI 논문을 큐레이션하는 Daily Arxiv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KBMA와 기술경영전문대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지은 책으로 《생각을 맡기는 사람들: 호모 브레인리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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