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벌써 1월 막바지네. 메일 쓰기 시작한 후로 시간이 더 빨리 가는 것 같아. 디데이를 정해두고 살아서 그런 건지 뭔지 알 수 없다만 신기해.
장황한 답장을 늘어놓기 전 짚고 넘어가자면... 올해 너의 문장이 전부 실현되길 바랄게. 더 다양한 삶을 살피며 따뜻하게 나아갈 수 있길. 온갖 경우의 수에 발을 살짝 적셔보고 이야기 들려줘. 삶은 계속되고 나름의 교훈을 줄 테니. (세상 다 산 사람처럼 말한다 그치?)
아 그리고 네 편지 보자마자 퀸의 멜로디가 스쳐 지나갔어. I want to break free라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거든. 'But life still goes on~!' 경쾌하게 새 verse를 여는 부분인데 한 번 들어봐.
네가 물었지. 2023을 어떤 마음으로, 어떤 문장을 담고 살아가고 싶냐고. 사실 주제를 듣자마자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가 떠올랐어. 많은 사람들이 새해 추천 영화로 꼽기도 하고, 나 또한 새해마다 찾아보곤 하거든.
멍할 때 보면 딱이야. 아니면 새해마다 우울해지는 사람들. 상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머리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파. 나도 이 세 가지 조건에 모두 해당돼.
새해부터 울적할 게 뭐 있겠나 싶은데 연말의 여파가 한 박자 늦게 오는 거라 생각하자. 설명하자면 이런 느낌이야. 2022는 잘 마무리했는데, 그래서 2023은 어떻게 더 잘 살 수 있겠나? 지금 뭐하고 사는 건데? 하며 혼자 괴로워하는 거. 작년 한 해를 이력서에 채운다면 몇 문장을 써넣을 수 있을까. 12개월이 한 세 문장 안쪽으로 요약된다면 그것도 조금 서글플 것 같네.
영화 주인공 월터 미티도 비슷한 고민에 빠져있어. 물론 이력서는 아니고 커플 매칭 페이지 프로필을 채우는 거지만. 비슷하지! 나를 어필해야 하는 거니까. 월터는 가본 곳, 해본 것, 취미 등등 프로필 대부분을 공란으로 설정해둬. 곰곰이 떠올려봐도 쓸 게 없는 거야. 그렇게 텅 빈 프로필을 앞장세우고, 짝사랑하는 셰릴의 프로필을 들여다보지. 그녀의 PERFECT MAN이 되려면 모험적이고 용감하고 창의적이어야 하는데 말이야. 마우스 커서를 맴맴 돌리다가 끝내 그녀에게 윙크 (=매칭을 위해 누르는 좋아요 같은 것)를 날리긴 한다만 계속 오류가 난다. 알고 보니 허허벌판 프로필을 가진 이는 윙크를 날릴 수조차 없었던 거야.
내가 오늘 메일 부제로 '윙크를 받을 수 있을까?'라고 적었는데, 받기는 커녕 나도 월터와 같은 오류를 겪을 듯해.
빈칸이 많은 삶이지만, 월터도 상상 속에선 무지막지한 히어로이자 모험가야.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상상 속으로 다이빙해 그것도 아주 깊이. 지하철을 기다리다 갑자기 불난 건물로 뛰어들어 강아지를 구하는 상상, 새로 온 상사의 못된 말에 반박하며 액션 영화 한 편 찍는 상상, 눈 잔뜩 맞은 모험가의 모습으로 셰릴 앞에 나타나는 상상 등. 아무래도 월터랑 내 MBTI는 같거나 비슷한 것 같아. 일하는 모습 보면 INFJ 느낌이랄까, 과몰입해서 미안해. 나도 시도 때도 없이 상상하거든. 상상하다 내릴 정류장을 놓친다거나 친구 앞에서 멍해진 적이 있어서 월터의 마음이 온전히 이해되었어. 난 요즘 머릿속이 꽉 차 있어서 상상이 비집을 틈도 없는 느낌이야. 난 상상하는 게 참 좋은데 말이지...
왜 그런 말 있잖아. 구체적으로 상상하면 그게 현실이 된다고! 난 이 말을 맹신한다. 내 모습을 구체적인 상황 속에 던져두면 언젠가 데자뷔처럼 이루어질지도. 누구에게나 상상은 무료이자 자유이니까. 올해도 잔뜩 상상해보려고. 상상할 용기조차 없는 삶은 너무 헛헛할 것 같아.
이쯤에서 2023년을 함께할 문장을 소개할게. 상상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문장을 꼭 전해주고싶어.
월터가 일하는 라이프지의 모토인데 월터의 상상이 현실로 바뀌는, 일종의 터닝포인트라고 할 수 있어. 이 시퀀스는 볼 때마다 가슴이 쿵쿵 뛰어. 이게 설레는 건지 긴장되는 건지 둘 모두인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시작의 순간마다 떠오르더라.
내가 이 회사에 다녔다면 매일 모토를 가슴에 새기고 자랑스럽게 일했을 것 같아. 세상을 마주하고 있는 그대로 느끼기 위해 노력하는 것. 유의미한 삶을 위해 꼭 필요한 문장이라고 생각해. 크나큰 의미를 쫓자는 게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서 이 정도의 문장을 담고 산다면 조금 더 활기 있는 삶이 되지 않을까?
서로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고 외면하는 순간 나도 도시도 흑백이 되어버리니까. 이왕이면 한번 사는 인생 컬러풀하면 좋잖아. 흑백을 무시하는 건 아니야.
위에서 소개한 문장을 가슴에 품고 이제 도움닫기 할 차례야. 머뭇거리던 월터가 훌쩍 뛰어 헬기에 올라탄 것처럼 용기를 낼 차례. 그때 용기를 준 데이빗 보위의 노래도 소개할게. 상상 속 셰릴이 기타 치며 부르는 노래인데 왠지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나. 슬퍼서 눈물이 나는 건 아니고 벅차오름 반절, 월터의 용기가 부러운 마음 반절? 나도 올해는 그만 머뭇거리고 헬기에 올라탈 수 있었으면 해. 상상 속에선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많은데 머뭇거리는 사람이 있다면 이 노래와 함께 카운트다운 시작해보길 바라. 점화 후 어디로 향하든 상관없으니. 일단 올라타자!
♬ Ten, Nine, Eight, Seven, Six, Five, Four, Three, Two, One, Liftoff
This is Ground Control to Major Tom
You've really made the grade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굵직한 삶의 전환점이 눈에 띄잖아. 월터에겐 본인이 일하던 라이프지의 폐간이 시발점이었고. 그저 속상한 실업의 순간일 수도 있는데, 도리어 모험의 서두가 된 거지. 공란으로 남겨두었던 프로필은 우와! 소리 나오는 이야깃거리로 가득 찼고. 윙크로 넘쳐나지.
그래 새해에는 터무니 없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재미난 이야기 가득한 프로필을 완성해보자.
추신. 내 삶의 정수를 담은 필름은 과연 어떤 장면일까?
훗날 서로의 25번 필름을 찾아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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