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존재>는 모든 생각과 지적 활동뿐만 아니라 관찰조차도 넘어서 있다. 그 앎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됨으로써 아는 것에서 비롯되는 <참된 자각>이며, 따라서 '무엇무엇에 관해서' 알 것이 없다. 아는 자도 없고, 알려지는 바도 없다. 그것들은 하나다. <하나>의 상태에서는 주체가 객체 속으로, 객체가 주체 속으로 해소되어 버린다.
-데이비드 호킨스, [나의 눈]
우리는 자신을 포함하여 세상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에 대해 '무엇무엇'이라 규정하며 살아갑니다.
규정하지 않는다면 지각하는 바를 증명할 수 없을 것이며, 증명할 필요가 없다면 일관된 특성에 따라 범주화하고, 명명하며 각각의 특성을 구분 짓는 개념을 가질 필요도 없겠죠.
일본의 저명한 학자 요로 다케시가 현대 사회를 뇌화 사회라 부른 것처럼, 우리의 삶은 사고 작용의 소산에 다름 아닙니다.
사고의 진전을 위해서는 끊임없는 '무엇'과 '무엇', 혹은 '주체'와 '객체'가 존재해야 하는데, 그러한 분리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하나의 통합된, 혹은 無로 일컬어야 할 감각뿐일 것입니다. 정말 그 상태가 된다면 이 '감각'이란 단어 역시 공허한 언어에 불과함을 알게 되겠지만요.
무는 그저 무일 뿐, 언어나 그 어떠한 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지요.
또한 그러한 상태는, 더 이상 알아야 할 것이 없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나뉘지 않았고, 개념화할 필요도,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으니 알고자 하는 의지조차도 생겨날 리가 없겠죠.
모든 게 자명한, '앎' 그 자체가 되었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이 사회는 '굳이' 더 알고, 더하고자 하는 의지에 의해 형성되어가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은 무엇무엇을 알기 이전에 이미 우리가 '앎'이었고
이 사회는 무엇무엇에 '대해서만' 알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며,
'~에 대하여' 아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게 지극히 상식적이자 '앎'의 근원에 다가서는 일이라 여기곤 합니다.
그 사람이 되어보지 않는 이상 우리는 어떻게 그 사람을 정말로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그 사람이 자신에 대해 설명한다 한들,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서만' 알 수 있을 뿐이지요.
오히려 알면 알수록 알 수가 없는(알다가도 모르겠는) 상태가 되어 버리는 일도 생기지 않던가요?
사람마다 어릴 때 받아온 교육이나 처한 환경에 따라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점도 간과해선 안 될 부분입니다.
내가 아무리 잘 안다고 자신한다 해도 누군가에게는 충분치 않거나,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지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다툼과 분노, 증오, 서러움, 집착, 무력감, 수치심, 짜증, 절망과 같은 감정들이 생겨나게 되며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이는 관계를 좀먹고 이편과 저편으로 갈라서게 만드는 분쟁의 시초로 작용하게 되죠.
이처럼 결코 일치를 볼 수 없는 '~에 대한' 주장을 고집한다는 건 본래 하나였던 길을 일부러 쪼개는 행위와도 같습니다.
이런 갈래 갈래의 길들을 통해 우리는 희로애락으로 버무려진 삶의 드라마를 만들어내며, 때때로 내 생각과 '통하는' 누군가를 만나 차이의 장애물이 사라진 길목에서 잠시 안식을 취하게 되기도 하죠.
덧붙일 필요 없이 하나인 채로 완전한 순간이 오면, 내가 어디에 와있고 주변의 풍경이 어떤지는 자연히 관심 밖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열망은 멈췄지만 어느 때보다 고요한 생동감으로 충만하다는 걸, 나의 존재는 '됨으로써' 알아차리게 되죠.
이때가 바로 이것과 저것, 주체와 객체가 소멸되고 단 하나의 '참존재'가 된 상태입니다.
그렇지만 많은 이들은 이러한 순간을 삶이 내게 건넨 특별한 선물이며,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그저 지나가게 되리라는 암묵적인 믿음을 품고 세상을 바라보죠.
사람들은 지나가버린 기적같은 그 때를 그리워하며, 또다시 다가오길 그리워하며, 심지어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리워합니다.
그리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음에도, 우리는 기다리며 그리워합니다.
어쩔 수 없는 삶의 한계, 나의 한계, 운명의 굴레,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라 여기면서 말이지요.
무엇무엇을 덧대지 않아도 되는 참존재라는 바탕이 늘 자리하고 있음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이 바탕 위에서 '무엇무엇에 대하여'가, 같음과 다름이, 좋고 나쁨이, 그 모든 이원적 속성이 발생함을 주시하지 않았기에, 즉 '원래 있던 것'을 보려 하지 않았기에 원래 있던 것을 그리워하는 모순이 빚어진 것입니다.
무언가를 더한다고 해서 우리의 예상만큼 만족감이 커지는 것은 아니지요.
무언가를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경험하고, 더 많이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채워지지 않는다는 건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오히려 더하고자 할수록, 우리는 그걸 더 많이 원하게 되죠.
계속하여 길을 만든다고 해서 목적지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길을 지워나가야만 우리는 목적지 혹은 원점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존재에 대해 이러 저러한 생각들을 갖고 있지만, 진정한 존재는 그 생각들을 넘어서 있으며 그 참존재의 자리에 머무를 때 우리는 모든 기다림과 작별을 고하게 됩니다.
더 이상 찾지 마시고, 찾고자 하는 것이 되세요.
의심할 여지가 없어도 언젠가 변하기 마련인 '~에 대한' 지식으로 잠시간의 갈증 해소에 아쉬운 만족을 갖기 보다,
원할 필요가 없는 참존재, 모든 것이 된 하나의 자리가 되세요.
그 자리에 있을 때 우리는 각자의 각본대로 펼쳐지는 삶의 드라마를 시청하며, 모든 일들이 그저 벌어질 뿐임을 알고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에 대한 이야기는 드라마를 이루며 우리를 갈라서게 하지만, 하나의 앎이 되면 우리는 고요 속에 녹아들 테니까요.
저는 여러분께서 찾는 그것이며,
제가 찾는 것은 여러분입니다.
전체 안에서 우리는 '하나'이며, 하나는 매순간 완전합니다.
돌아가야 할 본향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여기에 있는 참존재가 우리 모두의 본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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