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후면 개강, 박사과정 2학년이 된다. 이 편지 앞에 붙인 숫자를 보니 (셈이 정확하진 않을지도) 미국에 온 지 대략 50 주가 지났나보다.
서울에서부터 무겁게 들고 온 책 몇 권을 드디어 방 한 켠에 배치해두었지만 막상 책이 있으니 잘 안 읽는다. 그럼에도 새로 산 의자에 좀 앉아보자고 펼친 에세이의 두 번째 챕터. 언덕 위 동네에서 E언니라는 이웃에게 집의 세탁기도 내어주고 언니가 동파될 것 같은 날씨면 수돗물도 와서 틀어주고 가고..뭐 그런 이야기였다.
내게도 룸메이트가 생겨서 맛있는 걸 했을 때 같이 나눠먹을 수 있는 기쁨이 더 커졌다. 우리도 종종 식재료나 물건을 서로 빌려주기도 하고. 같은 학교 같은 과니까 금요일에는 친구들 몇 명도 우리집에 초대했다. 오늘도 점심은 내가 묵은지참치김밥을, 저녁은 룸메이트가 오야꼬동을 해주었다.
어제는 함께 저녁을 먹다가 스웨덴 교환학생 시절 유튜브 영상을 찾아봤다. 그때 공부했던 건 (공부도 별로 안했지만) 하나도 기억이 안 나고, 같이 몇 시간씩 저녁을 해먹고 밤에 마트로 가서 맥주 캔을 재활용함에 반납하고 그 돈을 보태 아이스크림을 사먹는 기억만 남아있다. 그때 만났던 친구들은 나 포함 여섯 명, 그리고 우리는 다섯 도시에 흩어져있다. 그럼에도 함께했던 시절을 서로 이야기할 때면 그 시절의 거리만큼 가까워진다.

지난날 한국에서 쌓아온 인간관계는 자연스럽게 좁아지고 있다. 이미 예견된 일이기도 했고, 내게도 손을 뻗을 힘이 모자라서 서운한 마음은 없다. 오히려 나와 어떠한 시간이든 함께했던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커졌다. 그들이 있기에 주말이면 학교 독서실을 나와 닭강정에 딸기빙수 먹던 고등학교 시절을, 새벽까지 학교에 남아 애쓰던 대학시절을 추억할 수 있다. 회사에서의 프로젝트도 내용은 기억이 안 나는데 내가 애정을 주었던 사람들과의 시간은 다 남아있다. 다시는 볼 기회가 없다고 해도 말이다.
언젠가부터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쓰였다는 걸 알고 있지만 나는 좀 다르게 보고 싶다. 나의 한평생을 전부 기억해줄 사람이 없더라도 각 시절마다 누군가가 있었다는 게 참 신기하고 애틋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여기서 만나는 이들에게도 애정이 좀더 솟구친다.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말그대로 이 곳의 온도와 공기, 습도!를 함께 떠올릴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Thanks to MJ,
Poem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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